존 라일, 「곧은 길」, 제13장,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나사로를 보고"(눅16:19-23)(김영희강의안12)
제 13 장 부와 빈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16:19-23)
1. 하나님께서 사람들 각자에게 부여해 주신 처지는 대단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자.
주 예수께서는 가난이나 부한 것 중 어느 한편을 찬미하는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신다. 두 사람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처지는 매우 다르다. 우리는 이 비유가 본래 뜻하는 바가 아닌 그릇된 교훈을 끌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이 항상 선한 것도 아니며 항상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부유한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예수께서는 단지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보는 일, 보리라고 기대해야 하는 일을 기술하신 것뿐이다. 이 세상에는 항상 빈자와 부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느니 차라리 모든 사람은 키와 힘이, 지능이 똑같아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고통의 주된 원인은 죄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죄야말로 가장 먼저 척결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거룩해져야 한다. 평화의 왕이 오시어 큰 권능으로 통치하여야 한다. 이 모든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보편적인 행복이 가능할 것이며, 부자와 빈자를 갈라놓고 있는 장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 이야기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 존재할 두 계층에 대한 상징임을 기억하자.
2. 인간의 현세적인 조건이 곧 그의 영혼의 상태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아님을 주목하자.
이 비유에서 나오는 부자는 번창하는 자의 세상적인 전형이었던 것 같다. 현세의 삶이 전부라면 그는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던 자로 보인다. 현세의 좋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 그 부자야말로 비참하게도 정말 가난한 자였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는 재물이 많았지만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지’ 아니하였고,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입었지만 의의 옷은 입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궁전에서 살았지만 영원한 곳에는 집이 없었고, 환락을 나눈 친구들은 많았으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벗이요 대언자는 없었다.
나사로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가장 비참하고 빈곤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였고, 영광의 상속자였다. 그는 가장 좋은 옷, 곧 구세주의 의를 입고 있었고,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장 좋은 양식이 있었다. 그는 가장 좋은 벗, 곧 하나님을 친구로 두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모든 것을 영원히 누릴 것이다. 그것들은 살아 있을 때에 그를 감싸주었고 그가 죽었을 때도 그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가난한 나사로’가 아니라 ‘부요한 나사로’라 불림이 마땅하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표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간의 후손들을 내려다보실 때, 세상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전혀 중요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단지 영혼의 상태만을 보시며 그 상태에 따라 그들을 평가하신다. 우리가 믿음에 부요하게 될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하게 될 때까지 우리는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회심한 거지가 회심하지 않은 왕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가 네 궁핍함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라고 말씀하신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 열 부족의 통치자였다. 오바댜는 그 집의 종에 지나지 않은 자였다. 그 중,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소중하였겠는가?
우리는 부와 세상적인 위대함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영혼의 올무와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빈궁과 시험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것들은 위장된 축복인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들은 항상 사랑과 지혜로운 배려로서 보내어진다. 그것들은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유리시켜 천상의 것들에 사랑을 바치도록 가르쳐 준다. 죄인들은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고 성도는 그것들로 인하여 선한 일에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욥 5:17)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느니라”(히 12:6)
현세에서 행복을 누리는 큰 비결은 인내하고 만족할 줄 아는 영을 갖는 데 있다. 이 세상은 상을 받는 곳이 아니라는 진리를 매일 깨닫도록 힘쓰자. 진정 심판의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 날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일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행한 대로 받게 될 것이다.
3. 이제 누구든지 죽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다. 그들은 둘 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나는 장소로 갔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가 아무리 획책하고 계획하고 연구한다 할지라도, 모든 과학적인 성취를 이룩한다 할지라도, 결코 정복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없는 원수가 있으니 죽음이 곧 그것이다. 므두셀라의 생애도 ‘그는 죽었다’라는 단 두 마디의 말로 종결을 지어져 있다.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가진 평등주의자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고 아무에게도 기다려주지 않으며 격식을 차리지도 않는다. 물론 이것이 진부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쓰는 것은, 알고는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사역자들의 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극단적이고 과격하고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죽음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역자들은 담대하고 확고해야 하며 타협함이 없는 말로 말해야 한다. 어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편이 낫다. 우리는 백스터가 세운 표준대로 설교해야 한다.
“이것이 최후의 설교인 듯 그리고 죽어가는 자가 죽어가는 자들에게 설교하듯 그렇게 설교하리라”
사람들이 어느 날엔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자로서 사는 법을 배우기를 기원한다.
“잘 살고자 하는 자여, 죽음의 날을 항상 벗 삼도록 합시다”(존 번연)
4.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귀중하다는 것에 주목하자.
나사로의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비춰주는 빛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 중 가장 작고 가장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왕 중 왕께서 돌보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야말로 자신은 그 사실을 잘 모르지만 가장 훌륭한 친구이자 수행원인 존재들을 가진 자이다. 많은 죄 짐을 지고 있는가? 특별한 시험에 들어 있는가? 그분께서는 당신의 머리털까지도 헤아리고 계시며, 그분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다. 당신을 해치는 자는 곧 하나님의 눈동자를 해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형제요 지체인 자를 상케 하는 것이다.
당신이 받는 시험은 아주 지혜롭게 배려된 것이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당신의 선을 이룰 것이다. 주님께서는 정해진 분량의 햇빛과 바람, 추위와 더위, 그리고 비와 폭풍을 주시고 나면 어김없이 추수를 하신다. 신자의 일이 다 이루어지면 천사들은 그를 데리러 올 것이다. 슬프게도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바로 환난의 기간을 단축해주는 자들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이 업신여기고 있는 자들의 중보로 인하여 세상 왕들이 평화로이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육체 안에 거하는 한 이 세상은 시험의 장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사로의 형제들을 위해 마련된 많은 위로가 있다.
5. 이기심이라는 죄야말로 참으로 위험하고 영혼을 멸망시키는 죄임을 주목하자.
이 비유에서 그 부자가 살인자이었다거나 도둑, 간음자이였다는 말은 전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유대인의 종교의식에 모두 참여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왜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있다. 그 행위에 관한 한 오늘날 존경스럽고 선량하다고 여겨지는 부류의 사람들과 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생각을 하면 아주 숙연해진다.
1) 이 이야기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 당신의 삶을 이끄는 지배적인 동기는 무엇인가? “나는 올바르게 살았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적절하게 책임을 이행했으며, 기독교가 요구하는 모든 의식에 참석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바울의 말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
이 부자처럼 자신만을 위하여 산다면 우리 영혼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2) 이 이야기는 소극적인 죄도 지옥에 갈 만한 죄임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 그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이유는 그가 행했던 많은 일들 때문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일들 때문인 것 같다. 나사로가 그의 대문에 있었지만 그는 나사로를 못 본 척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마 25장(42-43)의 심판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다. 만일 주의하지 아니하면 소극적인 죄가 우리 영혼을 멸망케 할 것이다.
3) 이 이야기는 재물이란 특별한 위험을 동반해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 재물의 소유는 영혼을 매우 완악하게 한다. 재물 앞에서 사람들은 치를 떨며 얼어붙는다. 재물에는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는 성향이 들어 있다.(딤전6:10)
아간은 돈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를 패배케 하고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였다. 발람도 돈 때문에 빛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였다. 게하시도 돈 때문에 나아만과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하여 문둥병에 걸렸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돈 때문에 초대교회의 첫 위선자가 되어 생명을 잃었다. 가룟 유다도 돈 때문에 그리스도를 팔았고 영원히 멸망하였다.
사실 돈이란 만족을 모르게 하는 소유물이다. 그것은 근심을 덜어주는 그만큼 또 다른 근심을 가져온다. 세상의 모든 다툼의 원인은 단 하나 돈, 바로 그것이다. 돈은 마음을 가장 쉽게 변하게 하고 올무에 빠지게 하는 소유물이다. 가난 했을 때는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리던 자가 부자가 되면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즉 이 비유의 부자처럼 돈을 가진 자들은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이중의 수고를 해야 하고, 이중으로 경계해야 한다.
4) 이 이야기는 특히 말세에 팽배해 있는 이기심에 관하여 특별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한 때문이라”(딤후3:1-2) 우리는 지금 그 말세에 살고 있다. 이 시대만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현세적인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하고 안락함을 누렸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이 시대야말로 자기를 위해 쓰는 비용과 자선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서로 큰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시대이다. 큰 부자이면서도 글자 그대로 좋은 일을 위해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자가 많이 있다. 이것이 바로 말세에 나타나리라고 예언된 바 있는 그 이기심과 탐심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주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그 부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고로”(눅12:21) 책망을 하신 것이 공연한 일이겠는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함은 “재리의 유혹”(마13:22)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공연한 일이겠는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눅16:9)라고 말씀하신 것이 공연한 일이겠는가? 자기를 버려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푼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신 것이 공연한 일이겠는가?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찬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에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선행이 우리를 의롭게 해 줄 수는 없다 하여 전적으로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돈을 가진 자가 있는가? 당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천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돈은 좋은 종이지만 나쁜 주인이다. 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자기 사랑은 궁전에서만 아니라 오두막 같은 곳에서도 펼 수 있다. 가난만이 당신을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기심이라는 병은 너무나 뿌리가 깊은 것이라서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만이 완전한 치유책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 진 당신의 빚이 엄청남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제아무리 크고 값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드리지 못할 것이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6. 맺는 말
1)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새 사람을 입었는가. 나는 내 본향을 준비해 두었는가를 자문해보라.
2) 구원을 받고자하면서 현세를 위해 자기를 바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부자의 희망 없는 최후를 기억하고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분에게 오라고 초대한다.
3)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청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기억하라. 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늘 주위를 돌아보고 심령으로나 육체로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