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하나님의 도성」, 제11권,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기원과 종국 (강의안7)
제 11 권
1. 두 도성의 기원과 종국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이 말하는 그 도성이다. 성경은 그 거룩한 권위로 말미암아 만국의 모든 문헌 위에 있으며,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명백한 섭리에 의한 계획의 결과였다.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시87: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여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 주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시48“1-2,8).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며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시46:4-5). 거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 있으며, 그것을 건설하신 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불어 넣으셔서 그 도성의 시민권을 갈망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지상의 도성의 시민들은 이 거룩한 도성의 건설자보다 자기의 신들을 더 높이며, 그가 신들의 신이심을 모른다. 이제 나는 두 도성, 곧 천상의 도성과 지상의 도성의 기원과 과정과 당연한 종국을 논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두 도성은 현세에서는 서로 섞여 있으며 얽혀 있다고 하겠다. 두 도성이 어떻게 천사들 사이의 차이점에서 시작했는가를 이야기하겠다.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진리는(창1:26) 이해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믿을 수는 있으므로,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짐승들과 공유하는 부분을 초월한 높은 부분으로, 자기보다 높으신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이성과 지성의 자연적인 능력인 우리의 마음 자체가 고질적인 죄과 때문에 어두워지며 약하게 되어, 하나님의 변함없는 광명을 환영하며 즐기지 못할 뿐 아니라 용납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 마음을 하루하루 점점 새롭게 함으로써 치유하며 저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려면, 우선 믿음을 주입시키며 정결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믿음 안에서 진리를 목표로 더욱 확신있는 전진을 할 수 있도록, 진리 자체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하나님의 신성을 버림없이 인성을 취하시고, 이 믿음을 확고하게 세우셔서, 사람들이 사람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의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얻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인간 그리스도 예수가 계신 것이다(딤전2:5).
그는 인간으로서 중보자시요, 길이시기 때문이다(요14:6,히10:20). 목표를 향해서 가려고 애쓰는 사람과 그 목표를 연결하는 길이 있으면, 그는 목표에 도달할 소망이 있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분이 만들어 놓으신 길이다. 하나님으로서 목표시요, 사람으로 길이시기 때문이다.
3. 성령께서 지으신 정경과 그 권위에 대하여.
이 중보자는 처음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며, 후에 자신과 사도들을 통해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신 대로 말씀하셨으며, 다시 정경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제정하셨다. 정경에는 최고의 권위가 있으며, 우리가 몰라서는 안될 일, 그러나 자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들에 관해서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 우리의 내적이나 외적인 감각에서 단절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알며 보증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감각기관에서 단절된 것은 알거나 보증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하며, 그것들을 직접 감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용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지 못했어도 본 사람들을 믿는 것과 같이, 지성과 심정이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도 – “느낌”(sensus)이라는 말에서 “판단”(sententia))이라는 말이 나왔으므로, 여기서 “느낌”을 말하는 것은 바르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내면적 감각에 제시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저 비물체적인 빛으로 나타나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그것들을 계속적으로 그렇게 보는 사람들을 신용해야 한다.
4. 우주 창조는 시간과 관련없이 하신 일이거나, 새로운 결정으로 하신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우주가 가장 크며,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시다. 우리는 우주의 존재는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이 계심은 믿을 뿐이다. 그러나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데 대해서 하나님 자신보다 더 믿을 만한 증인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 들었는가? 아직은 성경보다 더 분명한 것이 없다. 거기서 예언자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한다(창1: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 예언자는 현장에 있었던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 있던 것은 하나님의 지혜였으며(잠8:27), 이 지혜로 만물이 창조되었다. 또 이 지혜는 거룩한 영혼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하나님의 친구와 대변자로 만들며(지혜서7:27), 자기가 한 일을 소리 없이 알려 준다.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며(마18:10) 합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하나님의 천사들도 거룩한 영혼들에게 말한다. 이런 영혼들 중의 하나였던 예언자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하며 또 글로 쓴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도록 설복하기에 합당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진리를 계시하여 알게 하신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아, 그는 또한 우리들이 가지게 될 믿음을 오래 전에 미리 말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창조하시지 않았던 천지를 무슨 까닭에 그 때에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는가? 만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에피쿠로스파와 마니교도들) 우주는 영원하여 시초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진리에서 아주 등을 돌렸으며 불경건이라는 치명적인 역병에 전염된 것이다. 설혹 예언자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더라도, 우주 자체가 그 끊임없는 변천과 운동, 그리고 거기서 보이는 모든 모양을 통해서, 이를테면 무언중에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외친다. 보이지는 않으나 형언할 수 없이 위대하시며, 보이지 않으나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아니면 이 우주를 창조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외친다.
5. 우리는 우주가 전에 무한히 긴 시간이 지나갔으며 우주의 밖에 무한히 넓은 공간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주 이전의 시간이나 우주 이외의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6. 우주창조와 시간은 기원이 같으며, 어느 한 쪽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운동과 변천이 없으면 시간이 없는 것이며, 영원에는 변천이 없다는 것이 시간과 영원의 올바른 차이점이라면, 어떤 피조물이 생겨서 운동함으로써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시간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운동과 변천의 여러 부분은 동시에 있을 수 없고 서로 잇따르며 따라서 그 계속되는 부분 사이의 길거나 짧은 기간이 시간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영원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으며, 하나님이 시간의 창조자와 제정자이시다. 그런데 많은 시간들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셨다고 어떻게 말하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우주 창조 이전에 어떤 피조물이 있었으며, 그것의 운동으로 시간이 지나갈 수 있었다는 말인가?
신성하고 무오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다고 하며, 하나님은 그 이전에 아무것도 지으시지 않았다는 뜻을 보인다. 만일 어떤 다른 것을 만드셨다면 그것을 “태초에”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우주는 시간 속에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시간과 동시에 만드셨다. 변화와 운동의 창조도 우주 창조에 포함되었다면 우주는 시간과 동시에 창조되었다. 이것은 처음 6일간 또는 7일간의 순서를 보면 명백하다. 이 며칠 동안에 아침과 저녁이 있었고, 하나님은 창조 작업을 제6일에 마치셨고, 제7일에 하나님의 안식이 신비롭고 숭엄하게 상징되었다. 그 날들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말은 고사하고 생각조차 하기가 심히 어렵고,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7. 태양이 창조되기 전에 아침이 있고 저녁이 있었다고 하는 그 며칠 동안의 형편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하루는 보통 해가 져야만 저녁이 되고, 해가 떠야만 아침이 된다. 태양이 창조된 것은 넷째 날이었다고 하므로, 처음 사흘 동안은 태양이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의 말씀으로 빛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눠서 빛을 낮이라 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창1:3,4). 그러나 그것이 어떤 성격의 빛이었으며, 어떤 주기적 운동으로 저녁과 아침을 만들었으며, 어떤 저녁과 아침이었는지도 우리의 감각이 미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지성으로 그 일을 이해할 수도 없지만, 주저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 그 때의 빛은 어떤 물질적인 빛이어서, 우리가 볼 수 없는 우주의 상층부로부터 왔든지, 또는 후에 태양에 불을 붙인 빛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빛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과 축복된 영들로 구성된 거룩한 도성을 의미한 것이었으리라. 여기에 대해서 사도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다”고 하며(갈4:26), 다른 곳에서도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한다(살전5:5).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해식과 일치하는 어떤 의미를 이 날의 저녁과 아침에서 찾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창조주가 아시는 지식에 비하여 피조물이 아는 지식은 황혼과 같으며, 피조물이 창조주를 찬양하며 사랑하게 될 때에 새벽이 되며 아침이 된다고 하겠다. 창조주를 버리고 피조물을 사랑하는 일이 없으면, 밤이 내리지 않는다. 성경이 처음 며칠을 기록했을 때에 밤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결코 “밤이 되며”라고 하지 않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했다(창1:5). 둘째 날과 그 밖의 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참으로 피조물을 창조주의 지혜에 비추어, 이를테면 그것을 창조하신 설계에 따라 볼 때의 찬란한 지식과 비교하면, 피조물들을 그 자체대로만 보아서 아는 지식은 희미하며 퇴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밤이라기보다 저녁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피조물이 다시 창조주를 찬양하며 사랑할 때에 아침이 돌아온다. 피조물이 자체를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첫 날이다. 궁창 곧 위의 물과 아랫 물 사이의 하늘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둘째 날이다. 땅과 바다와 땅의 모든 식물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셋째 날이다. 크고 작은 빛과 모든 별들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넷째 날이다. 물에서 헤엄치거나 공중을 날아다니는 모든 동물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다섯째 날이다. 땅 위에 사는 모든 동물과 인간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그렇게 할 때에, 그것이 여섯째 날이다.
8.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뜻.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할 때에, 우리는 마치 일이 하나님에게 노고가 된다는, 유치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느니라”고 한다(시33:9,148:5). 그것은 귀에 들리는, 사라지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자들의 안식을 의미한다. 마치 한 집의 기쁨이 그 집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극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갈채를 보낼 때에 극장이 갈채를 보낸다고 하며, 목장에 있는 소들이 울 때에 묵장이 운다는 식으로 말해서,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에 대한 말을 그것에 대해서 한다. 그와 같이 어떤 때에는 원인에 대해서 그것이 결과인 듯이 말한다. 기쁜 편지라는 말은 그 편지가 읽는 사람을 기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저 예언자적 저자가 하나님이 쉬셨다고 한 것은 지극히 적합한 표현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쉬며, 하나님이 그들을 쉬게 만드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9. 천사들의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나는 지금 거룩한 도성의 기원을 논하려 하며, 우선 천사들의 기원을 말하려 한다. 천사들은 그 도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며, 나그네가 된 일이 없으므로 행복한 부분이다. 나는 이 논술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 문제에 관련된 성경 말씀들을 적당한 만큼만 설명하겠다. 우주창조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는 천사들이 창조되었는지, 또는 언제 창조되었는지, 명백한 말씀이 없다. 그러나 만일 언급이 있다면,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하는 말씀에서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암시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말한 빛에 포함되었다.
천사들을 빠뜨린 것이 아니라고 내가 생각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제7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하는 말씀과, 성경의 맨 처음에 있는 말씀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말씀은 명백히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만드시지 않았다는 뜻을 알린다.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이 제일 처음으로 창조되었다. 그 맨 처음에 만드신 땅은, 성경이 부언하듯이, 보이지 않으며 형태가 없었다. 빛이 아직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어두움이 깊음 위에 있었다. 이 깊음은 땅 곧, 흙과 물이 마구 섞인 것이었고, 빛이 아직 없었으니, 어두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조 작업에서 모든 것이 그 다음에 각각 그 자리에 배치되었고, 그것이 엿새 동안에 완성되고, 하나님이 제7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고 할 때에, 그 사역에 천사들이 포함되지 않은 듯이 보이는데, 어떻게 빠뜨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명백한 말씀은 없다. 그런데 성경의 다른 곳에 확실한 증언이 있다. 세 청년이 풀무 속에서 부른 찬송에 “주의 지으신 만물이 주를 찬송할지어다”라고 하면서, 이 만물 가운데 천사들도 포함시켰다(외경의 다니엘3:57-58, 세 젊은이의 찬송가). 시편에는 다음과 같은 찬송이 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주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사자(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주의 이름을 찬양할 것은 저가 말씀하시매 지어졌고 저가 명하시매 창조되었음이로다”(시148:1-5,70인역).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사들이 하나님에게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장 명백하게 듣는다.
“별들이 창조되었을 때에 나의 모든 천사들이 소리를 높여 나를 찬양하였느니라”(욥38:7,70인역). 별들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천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별들은 제4일에 창조되었다. 엿새 동안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 가운데 천사들도 포함되었다면, 그들은 제3일도, 제2일도 아닌, 첫 날의 틀림없이 낮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 빛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설하기 위해서 “첫 날”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하루”(날은 하루라고 변역할 수 있음)라고 했다(창1:5). “하루”라는 같은 표현을 반복해서 여섯 또는 일곱이라는 수를 채웠으며, 우리에게 일곱 번 알린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으며, 이 빛이야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면, 천사들은 확실히 영원한 빛에 참가하는 자들이 되었다. 그 영원한 빛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지혜 곧 만물을 창조한 그 지혜에 불과하며, 또 그 영원한 빛을 우리는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른다(요1:9,14, 8:12, 12:46).
이와 같이 천사들은 그들을 창조한 빛에서 빛을 받아 빛이 되었고, “낮”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들은 저 변함없는 낮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낮에 참가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천사들과 그 밖의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했다. “세상에 들어오는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요1:9)이 또한 모든 순결한 천사를 비추어, 그 천사로 하여금 그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빛이 되게 만든다. 만일 그 천사가 하나님을 버리고 멀어지면, 그는 “불결한 영”이라고 하는 다른 천사들과 같이 불결하게 된다. 그럴 때에 그런 천사들은 “주 안에서 빛”(엡5:8)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어두움이다. 그것은 영원한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악은 그 자체의 본성이 없으며, 선이 없게 된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10.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며 단순하고 불변하는 삼위일체이다. 그리고 그 본질과 속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것이 아니다.
홀로 단순하며 그러므로 홀로 불변하는 선 곧 하나님이 계신다. 이 선에 의해서 모든 선한 것이 창조되었으나, 그것들은 단순하지 않으며 따라서 변한다. 내가 그것들이 창조되었다고, 곧 바꾸어 말하면 지어졌다고 말하고, 났다고는 하지 않은 데에 유의하기 바란다. 단순한 선에서 난 이는 역시 단순하며, 난 이는 낳은 이와 같다. 이 두 분을 우리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이라고 부르며, 두 분은 그 영과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의 영을 성경에서는 특별한 의미로 거룩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닌 다른 분이시다. 성부도 아니요 성자도 아니시기 때문이다. 상령을 나는 다른 분이라고 했고, 다른 것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같이 단순하며, 그들과 같이 불변하는 선이시며, 그들과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분이 함께 한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시기 때문에 단순하시다. 우리가 이 선한 본성이 단순하다고 하는 것은 거기에 성부만 계시기 때문만이 아니며, 성자나 성령만이 계시기 때문도 아니다. 또는 사벨리우스 이단파가 생각한 것과 같이, 이름만 삼위일체요 위격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본성과 그 가진 것 속성이 같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부르는 것이다.
단순하다고 하는 것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속성과 그 본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원적이며 참으로 신적인 존재들을 우리는 단순하다고 부른다. 그들은 본질과 속성이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다른 것에 동참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서 신적이며, 지혜로우며, 행복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지혜의 영을 다양하다고 표현한다(지혜서7:22). 지혜는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가 내포한 것들은 그 본성이며, 하나이면서 그 내포한 모든 것들이기도 하다. 지혜는 여러 가지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안에 지적 실재(實在)들의 무수한 보고(寶庫)가 있다. 이런 실재들 가운데는 변화하며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불가시적이며 불변하는 이념들 곧 지혜 자체가 창조한 것들의 원형이 포함되었다. 우리의 이 우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이 우주를 아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고 놀라운, 그러나 올바른 생각이다.
11. 거룩한 천사들은 창조된 순간부터 지복을 누렸지만, 진리 안에 굳게 머무르지 않은 천사도들도 그 지복에 참여했는가?
우리가 천사라고 부르는 영들은 어떤 모양 어떤 순간에도 암흑이었던 일이 없으며, 창조된 순간부터 광명의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러한 광명을 등진 천사들은 현명하고 행복한 생활의 영예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천사들도 여전히 이성을 지닌 생명을 보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이성이며, 설령 없어지기를 그들이 원한다고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생명과 같다. 아무리 오래 간다고 하더라도, 끝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끝이 없어야만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영원성이 자동적으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지옥 불도 영원하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영원하지 않은 생명은 참으로 또 완전히 행복하지 않다고 상정한다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즐긴 것이 아니다. 그들의 복된 생명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따라서 영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공포심 때문에, 몰랐다면 무지 때문에, 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완전히 복된 생명을 거룩한 천사들은 즐긴다고 믿는다. 천사들은 천사로서 도달할 수 있는 커다란 복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복되심과 비교하면, 그 크다는 것이 얼마 만한 정도겠는가?
12.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을 아직 받지 못한 의인들의 복과,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누린 복을 비교한다.
피조물 중에서 이성적 또는 이지적 수준에 속한 것은 복되다고 말할 가치가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며, 그 수준에 있는 것은 천사들뿐만이 아니다. 낙원에 있었던 처음 사람들도 죄를 짓기 전에는 행복했다는 것을 누가 감히 부정할 것인가? 그들은 자기들의 행복이 얼마나 계속될 것인지, 또는 그것이 영원할 것인지를 몰랐다.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영원했을 것이다.
현재의 선을 즐긴다는 점에서 본다면, 낙원에 있었던 처음 사람은 어떤 의인보다 복되었다. 아무리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와 같은 치명적인 약점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본다면, 자기가 천사들 사이에서 아무 지장 없이 끝없는 교제를 즐기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 가게 되리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실히 아는 사람은, 어떤 신체적 고통을 받을지라도 낙원의 크나큰 복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의 앞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14. 마귀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하는 설명에 대하여.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는 진리에 서지 않았다”(요8:44)고 하는 말은,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결과, 그가 진리에 서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가 진리에 서지 않은 것이 원인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는 것이 결과이다. 같은 표현 방법이 시편에도 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신 고로 내가 불렀사오니”(시17:6,70인역), “하나님이여, 내가 부른 고로 내게 응답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된다.
15.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느니라”(요일3:8)고 하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마귀가 그 본성에 따라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전혀 죄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증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사야가 바빌론 왕을 마귀의 대표로 보고, “너 아침에 떠오르던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느냐?”고 했으며(사14:12,70인역), “네가 하나님의 낙원 즐거운 가운데 있어서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도다”라고 한다(겔28:13).
여기서는 마귀에게 죄가 없었던 때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조금 내려 가서 더 명백하게 “네가 지음을 받은 날로부터 너의 날에 흠 없이 행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겔28:15). 만이 이 구절들에 대해서 다른 더 적합한 해석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가 진리에 서지 않았다”는 말씀을, 그는 진리 안에 있었으나 진리 안에 영구히 머무르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하였느니라”는 말씀은 그가 창조된 처음부터 범죄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시작한 때로부터 범죄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귀의 교만 때문에 죄가 처음으로 생겼다.
17. 악의라는 결함은 본성에서 오지 않고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사악한 범죄는 창조주에게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으뜸이라”(욥40:14)는 말씀은 마귀의 본성을 의미하며 그의 악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우리의 생각은 옳다. 악의라는 결함이 나타날 때에 그런 결함이 없는, 창조된 대로의 본성이 먼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결함은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며, 반드시 본성에 해를 준다. 악한 의지까지도 본성이 처음에는 선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한다.
19.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라는 말씀의 뜻
나는 빛을 처음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천사들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며,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창1:4-5)고 하는 것은 거룩한 천사들과 불결한 천사들을 구별하셨다는 뜻이라고 제창한다.
물론 하나님만이 이렇게 구별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만이 어느 천사가 타락할 것인가, 어느 천사가 진리의 빛을 잃어버리고 교만의 암흑 세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를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 예견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통 보는 하늘의 발광체들에게 명령해서 우리가 잘 아는 낮과 밤을, 곧 우리의 빛과 어두움을 나누라고 하셨다(창1:14,15,16-18).
그러나 진리의 빛을 받아 영적으로 빛나는 천사들의 거룩한 공동체인 저 다른 빛과, 공의 빛을 등진 악한 천사들의 추악한 마음 속에 깃들인 저 어두움을 나누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20.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은 후에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말씀의 뜻.
우리가 묵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한 다음에 즉시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고, 빛을 낮, 어두움을 밤이라고 칭하신 다음에는 이런 말씀이 없다. 하나님이 빛을 좋게 보시는 동시에 어두움도 좋게 보셨다는 인상을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말씀하는 어두움이 죄 없는 것일 때에는, 곧 하늘의 발광체에 의해서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이는 빛과 구별되게 된 어두움을 말씀할 때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첨가 되었으며, 그것은 빛과 어두움이 나뉘인 후이고 그 이전이 아니다.
30. 여섯이라는 수는 그 약수(約數)의 합계와 같은 처음 수로서 완전한 수임.
엿새 동안에, 곧 같은 하루를 여섯 번 반복하면서, 창조가 완결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6이 완전수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에게 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동시에 지으시고, 그 후에 그것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시간의 경과를 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 역사가 완전하다는 것을 상징하시기 위해 6이라는 수를 도입하셨다. 여섯은 그 약수들을 곧 6분의 1과 3분의 1과 2분의 1인 하나와 둘과 셋을 합하면 같은 여섯이 되는 최초의 수이기 때문이다.
31. 완성과 안식을 축하한 제7일에 대하여.
제7일에 하나님이 쉬셨다고 한다. 곧 같은 날이 반복된 일곱 번째 날이었으며, 일곱도 다른 계산방법에 의해서 완전수이다. 또 일곱째 날은 하나님이 처음으로 거룩하게 하신 날이라고 한다. 이 날을 어떤 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거룩하게 하셨다(창2:2,3).
3은 첫 기수(奇數)요, 4는 첫 우수(偶數)이며, 이 두 수를 합하면 7이 된다. 그래서 7로 모든 수를 대표하는 때가 많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느니라”(잠24:16)로써 의인은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멸망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시한다. 이것은 죄를 짓는 데 대한 말씀이 아니라, 고난을 당해서 겸손하게 된다는 뜻이다.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119:164)라고 하는데, 일곱이라는 수는 전체나 어떤 것이 완전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흔히 사용된다. 이 수에 하나님의 안식이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얻는 안식이 있다.
안식은 전체에 즉 완전무결한 데 있으며, 부분에는 노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만 알 때에 우리는 애를 쓰며,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13:10)고 한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할 때에도 노고를 겪는 것은 이 때문이다.
32. 천사들은 우주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하는 견해.
혹은 우리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으니라”(창1:3)는 말씀은 거룩한 천사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때에 창조된 물질적인 빛을 의미한다고 하며, 천사들은 물과 물을 나누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기 전에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하는 말씀이 의미하는 때보다도 먼저 창조되었다고 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태초에“, 곧 ”처음으로“라는 말은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천사들이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지혜로, 곧 그의 말씀으로 지으셨다는 뜻이며, 성경에서 말씀을 처음이라고 설명한다고 할는지 모른다. 복음서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말씀 자신이 나는 처음이라고 대답하셨다(요8:25).
나는 이 반대 의견에 반대하지 않겠다. 그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생각할 때에 창세기의 첫머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찬양을 발견하게 되므로 아주 흐뭇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각 원하는 해석을 취할 것이다. 이 구절은 심히 뜻이 깊기 때문에, 독자의 지혜를 단련하며 신앙의 기준을 떠나지 않은 것이면 여러 가지 견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33. 천사들은 서로 다른 두 사회로 갈라졌으며, 그 두 사회를 빛과 어두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음.
어떤 천사들이 죄를 짓고 우주의 가장 낮은 곳으로 던져졌으며, 심판날에 최종적으로 정죄될 때까지 이를테면 갇혀 있으리라는 것을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선언했다. 즉,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의 어두운 구덩이에 던져 두어 심판 때까지 벌을 받게 하셨다고 한다(벧후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천사들과 다른 천사들을 예지로 또 실지로 분리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천사들을 “빛”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우리와 같이 아직 믿음으로 살며, 저 다른 천사들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기대할 뿐이고 실지로 즐기지 못하는 자들도 사도는 이미 “빛”이라고 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한다(엡5:8). 그러나 저 타락한 천사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나쁘다는 것을 알거나 믿는 사람들은 그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창세기 말씀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으니라”(창1:3)고 하며,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니라”(창1:$)고 하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빛과 어두움이라고 해석할 것이지만, 우리는 천사들의 두 사회라고 해석한다. 즉, 한 쪽은 하나님을 기뻐하며, 다른 쪽은 교만으로 부풀었다. 전자를 향해서는 “주의 모든 사자여 그를 찬양하라”(시148:2)고 하며, 후자의 두목은 “네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고 한다. 전자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는 듯하며, 후자는 자기를 높이려는 불결한 욕심의 악취를 풍긴다.
전자는 마음껏 하나님의 인애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남을 해하지 못하도록 억제된다. 그래서 이 두 천사 집단은 서로 다르며 서로 반대된다. 전자는 본성이 선하며 의지가 바르고, 후자는 본성이 선하면서도 그 의지가 패악하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더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빛과 어두움이라는 이름은 그들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저자의 본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신앙의 기준을 엄수했고, 이 기준은 동등한 권위를 지닌 다른 구절들에서 신자들이 충분히 확인한 것이다.
34. 궁창으로 물을 나누었다는 것은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생각과 물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물이라는 이름은 천사들을 의미하며,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창1:6)고 한 말씀은 이런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의 물은 천사들이며 아래 물은 눈에 보이는 물이든지 또는 악한 천사들의 무리든지 또는 여러 민족을 의미하리라고 한다. 만일 이 생각이 옳다면, 천사들이 언제 창조되었다는 것은 여기에 없고, 언제 나뉘었다는 것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물이 있으라 하셨다”는 말씀이 아무데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어리석고 패악한 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땅에 대해서 같은 어리석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땅이 있으라 하시며 땅이 있느니라”는 말씀도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땅과 물이 땅이라는 한 단어에 포함되어 있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시95:5)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