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1" 11-13장 그리스도의 두 번째 해-네 번째 해 사역.
11장 그리스도의 두 번째 해 사역
그리스도는 샛별의 뒤를 이어 태양처럼 등장하신다. 그리고 복음과 믿음, 회개를 설교하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이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가 전하고 선포하신 모든 설교의 요체가 아닌가?
1. 그리스도의 사역 두 번째 해와 그 해에 행하신 주된 사역들
(1)이 두 번째 해에 그리스도는 자주 사람들에게 설교를 전하셨다. 그리고 그분이 하신 첫 번째 설교는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2)그리스도는 니고데모가 궁금히 여겼던 거듭남에 대해 영적이고 신비스런 설교를 하셨다.
(3)예수님은 눅4:18절에 있는 복된 설교를 전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의 설교의 능력과 열매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직분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일들 속에서 더 높은 의미로 설명되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61:1).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눅4:18).
(4)그리스도는 ‘산상수훈’이라고 불리는 경탄할 만한 설교를 전하셨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얼마나 잘 실천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설교가 모세가 전해 준 도덕적 계명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계명에 대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엄격한 의미와 진지한 해설을 열어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산상수훈과 다른 설교들에서 그리스도는 그분이 율법의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입법자라는 것을 명확히 입증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의 법 안에 모세의 법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이 설교를 산 위에서 전하셨다.
2.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분
(1) 예언자적 직분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①때로 그리스도는 의사 혹은 지도자라고 불린다(마23:10).
②때로 그리스도는 입법자라고 불린다(약4:12, 사33:22).
③때로 그리스도는 상담자라고 불린다(사9:6,KJV).
④때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불린다(히3:1).
⑤때로 그리스도는 언약의 사자라고 불린다(말3:1).
⑥때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불린다(히9:15).
(2)그리스도가 선지자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분의 백성에게 계시하고 전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열어 보여 주고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계시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도들이 이해하고 믿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3)그리스도가 다른 모든 선지자보다 탁월하신 것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①다른 선지자들은 이 위대한 선지자의 그림자요 예표였을 뿐이다.
②다른 선지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의 일부만을 계시했다.
③다른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귀에만 선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음에 말씀하셨다.
④다른 선지자들은 지혜를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지혜로운 자로 변화시키실 수 있다. 다른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죄를 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회복시키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셨다.
⑤다른 선지자들은 자기 자신을 설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증언하신다.
⑥다른 선지자들은 사명과 권위를 그리스도에게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바로 이 말씀을 주신 분이고 그들에게 권위를 주시는 한 분 목자시다.
3. 그리스도가 행하신 표적들
그리스도가 하신 표적들은 많았다. 이 표적들이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가 설교에서 선포하신 가르침을 이행하신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 표적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증하고 증명한 것, 그리스도의 설교가 눈에 보이게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
적용.
(1)표적이 무엇인가? 표적은 자연의 흐름이나 가능성을 벗어나는 특별한 사건이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행한 표적은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자신의 이름과 능력으로 표적을 행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표적과 다른 점이다.
(2)표적이 왜 일어났는가? 성경과 연관되어 주요하고도 진정한 이유가 단 한 가지 있다. ‘표적은 하나님의 진리나 가르침을 처음으로 선포하고 세울 때 그것을 뒷받침하고 확증하기 위해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표적은 나팔이나 사자와 같다. 표적을 통해 복음이 먼저 우리에게 전해졌다. 먼저 시내 산과 광야에서 모세의 율법이 많은 표적을 통해 권위를 드러냈지만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했을 때는 표적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도 먼저 여러 가지 표적을 통해 그 권위를 나타냈지만 복음에 대한 소식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질 때 표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마24:23, 25). 이런 점에서 적그리스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발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표적이나 이적을 행함으로써 적그리스도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지혜와 선견을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것을 택하신 자들에게 선포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확증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표적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12장 그리스도의 세 번째 해 사역
1. 그리스도의 사역 세 번째 해와 그 해에 행하신 주된 사역들
2.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부르고 세우신 것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세우신 것에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아주 많다. 누가는 그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2-13).
(1)사도들을 선택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사도들이 스스로 사도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복음 사역자도 오직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2)사도들이 선택을 받은 시간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날이 밝은 뒤였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선택하러 가기 전에 먼저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 위대한 임명에 얼마나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는지를 보여 준다. 아!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구별해 세워 세상에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고 복음을 널리 선포하게 하신다는 말인가? 그 엄청난 일을 그리스도는 많은 기도를 드리지 않고는 결코 하지 않으신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가 홀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마14:23). 때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밤에 기도하시는 것을 본다(눅21:37). 그리스도는 낮 동안 내내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밤이 되자 기도하신다. 밤에 드리는 기도에는 다음과 같이 특별한 영적 유익이 있다.
밤은 마음의 깊은 회개와 참회를 올려 드리기에 더 적합한 시간이다. 낮에는 메마를 정도로 타들어가지만 밤에는 열기가 식고 차분해지듯이 낮에는 숨어 있던 많은 죄가 밤에는 때를 만난 듯 회개로 토설되고 쏟아져 나온다. 밤에 흘리는 눈물은 심령의 열기와 교만을 차갑게 식히는 달콤한 이슬이다. 밤은 침묵의 시간이다. 주위를 산만하게 하고 마음을 빼앗는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다. 모든 혼란이 사라지는 그때 우리는 영혼의 은밀한 곳에서 잠잠히 하늘 아버지에게 나가 그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가 밤에 기도하신 것은 우리에게 복된 예가 아닐 수 없다.
(3)그리스도는 섬기고 있던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택하셨다. 여기서 제자와 사도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않은 일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4)그리스도가 그들을 선택하신 목적은 사도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워 사람들에게 보내시기 위함이었다. 구원받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도록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것이다. 사명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이런 사명에는 직접적으로 부어진 은사들이 함께 나타난다. 사도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사명에는 또한 교회의 임명과 안수를 통해 받는 일반적인 사명도 있다. 두 사명 모두 충성과 능력을 요구한다.
충성은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청지기는 신실하다. 청지기는 감독자로서 깨어 지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말씀을 선포한다. 목자로서 양을 먹이고 농부로서 수고한다. 청지기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자신의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기 위해 권면하고 훈계하며 가르친다. 청지기에는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고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양심을 올바르게 아는 능력과 구체적인 상황에 진리를 바르게 적용하는 능력은 사람을 세우는 지혜로운 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아!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
3.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받아 주신 것
그리스도는 가르침 속에서 죄인들을 받아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곧 나아오는 자들은 누구나 환영하신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천국에 들어오려는 자를 결코 막지 않는다. 그러나 불신으로 영혼의 문을 닫아 버리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1)하나님 아버지는 기꺼이 죄인들을 받아 주신다. 첫째, 하나님은 죄인들을 받아들이는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도 잃어버리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야 할’ 모든 자를 주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이 지키고 구해야 할 보석들처럼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2)성자 예수님은 기꺼이 죄인들을 받아 주신다. 그분은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실 뿐만 아니라 그 문을 결코 닫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요6:37).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었는데, 그 목적이 바로 죄인들을 받아 주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가 내려오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을 인도하시기 위한 증거
①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에서(딤전1:15)
②그리스도가 죄인들을 향해 아름다운 행위와 태도를 보여 주신다는 것에서(마11:19)
③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인정하고 받아 주며 돌보고 책임지셨다는 것에서(눅5:31-32)
④그리스도가 죄인들의 회심을 기뻐하셨다는 것에서(눅10:21)
⑤그리스도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슬퍼하신다는 것에서(눅19:41-42)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것은 그분이 가르침을 실천하신 것에서 더 잘 나타난다
(1)비유적으로-탕자의 비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①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보기도 전에 먼저 아들을 본다. 죄인이 천국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하나님은 그 죄인을 찾아 내고 주목하여 보신다.
②하나님은 죄인이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죄인을 보신다.
③탕자의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향한 긍휼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탕자를 보자마자 속에서 창자가 들끓고 요동치며 갈망으로 불타올라 어쩔 줄을 몰라 하신다.
④“아버지가……달려가.” 이 모습에서 우리는 얼마나 긍휼이 넘치는 행동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죄인이 단지 오려고만 하면, 그리스도를 향해 기어서라도 오기만 한다면, 긍휼은 걸어서가 아니라 달려가서 그를 맞이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의 행위보다 위에 있다.
⑤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우리는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탕자 같은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가까이 가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는가? 그런 사람을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긍휼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뜻한지를 본다.
(2)실제적으로-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7:38).
①‘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여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앞에 설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②‘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여인에게는 잔치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울고 있다.
③‘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여인의 눈물은 거짓과 가식이 아닌 진실하고 열매 맺는 눈물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그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 시작했다. 오! 여인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죄로 찔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찌른 그분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④‘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머리털은 여인에게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 머리털을 자신의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바친다. 그 머리털을 그리스도의 발을 닦는 수건으로 사용한다. 오, 여기에 진지한 회개의 열매가 있다.
⑤‘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런 행위는 사랑과 슬픔, 사모함으로 가득한 황홀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죄인을 환영해 주시는 분이다.
4. 그리스도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내 멍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말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내 멍에는 쉽다. 그 말은 곧 내 계명은 어떤 불편함도 없다는 뜻이다. 멍에의 어려움은 무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다는 것에 있다. ‘내 짐’은 그리스도의 법도를 말한다. 짐이라는 단어는 주로 배의 화물 혹은 바닥에 안전을 위해 싣는 모래 주머니를 뜻한다. 모래 주머니가 있는 배는 마치 짐을 전혀 싣지 않은 것처럼 파도를 헤치고 나간다. 그러나 모래 주머니가 없는 배에는 안전도 없다. ‘내 짐은 가볍다.’ 율법의 멍에는 어렵고 바리새인의 짐은 무거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기독교 신앙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달콤함과 쉬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기독교 신앙은 합리적이다. 만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합의한 최고의 법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모든 것의 정수를 이 한 법에 담아 놓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성의 가장 높은 단계도 공의로운 해가 만드신 이 위대한 발광체 앞에서는 단지 하나의 작은 불꽃, 섬광과 같이 흡수되고 만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지혜를 모두 집약해 놓은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지혜를 그대로 담아 낸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앙의 법 안에는 오직 완전한 것들만이 있다.
②죄가 고통과 종의 속박을 준다면 기독교 신앙은 그보다 속박이 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③기독교 신앙은 평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3:17).
④기독교 신앙은 외적인 도움과 내적인 도움을 모두 준다. 나는 기독교의 의무들이 어렵고 무겁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겁고 어려운 짐을 가볍게 느끼게 도와주신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성도들의 삶이, 성례전, 기도, 상급에 대한 격려가 우리의 도움이 된다. 지옥의 고통을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이 우리가 죄를 멀리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길을 가도록 도와준다. 성령님의 역사와 복된 영향력이 우리의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도움이 된다.
질문 1.우리가 어떻게 그 멍에를, 의무와 경건, 신앙의 실천을 즐겁게 행할 수 있단 말인가?
대답 1.마음을 바르고 의롭게 지키라.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신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고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속사람과 화평하게 하라. 이성과 감각은 외부의 것들이 즐거운지 아닌지를 내면의 기질을 따라 말해 준다. 그러므로 진실함 속에서 행하고 내면 속에서 화평을 누리는 자는 외부에서 요구되는 의무들을 기쁨과 위로 속에서 쉽게 행할 수 있다.
2.성령님의 사역과 직분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계획하신 사역과 직분을 믿으라. 성령님의 사역과 직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돕도록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8:26). ‘쉬난틸람바네타이’라는 말은 원래 힘과 능력이 있는 다른 사람이 연약한 자의 어깨가 지고 있는 짐을 받쳐 주어 도움을 준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짐을 가볍게 만든다. 우리는 짐의 온전한 무게를 감당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친히 어깨로 그 짐을 받쳐 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그분의 백성을 위로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보혜사”(요14:26, 15:26)라고 부르신다. 성령님이 영적인 기쁨과 위로를 주시기 때문이다. 주목해서 보라. 그 기쁨은 자연적인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이다. 오! 세속적인 마음이 누리는 위로와 경건한 자들이 받는 위로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전자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세상 피조물의 헛됨에서 온다. 그러나 후자는 위로를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온다. 분명히 성령님이 우리를 돕는 분이요 위로자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사역과 직분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모든 의무를 달콤하고 평안하며 기쁘게 수행할 수 있다.
3. 기쁨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독교 신앙과 그 실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의무와 그것을 은혜롭게 행하는 것 안에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오, 우리가 단지 기독교 신앙의 고백과 실천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의무와 그것을 은혜롭게 행하는 것 안에 영광과 영생의 씨가 들어 있다. 때로 의무를 행할 때 우리는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 터져 나오고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경험을 한다. 물론 영광의 씨앗이 아무리 그 속에 있다고 해도 전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은 땅 아래 있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때가 되면 씨앗은 영원한 생명으로 싹을 틔우고 나올 것이다. 그러니 신앙의 실천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것이 꿀보다, 꿀송이보다도 더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이 금보다, 많은 정금보다도 더 소중하게 될 것이다.
질문 2.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자연적인 기쁨과 신앙에서 느끼는 영적인 기쁨의 차이를 알 수 있는가?
대답 1. 영적인 기쁨은 진지하다(전2:2). 자연적인 기쁨 속에는 가볍고 헛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영적인 기쁨은 엄숙하고 건전하며 진지하다.
2. 영적인 기쁨은 회개와 겸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함께 한다.
3. 영적인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된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 의무를 행하는 영혼을 기쁨만큼 생기로 충만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기쁨은 영혼을 더 온전하게 이끌어 준다. 기쁨은 기독교의 실천이라는 바퀴가 더 자유롭게 굴러갈 수 있게 해 주는 기름과도 같다. 우리는 자연적인 기쁨을 누리지만 영적인 의무를 행하려고 하면 마음이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기쁨이 영적인 기쁨이라면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길에서 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4. 영적인 기쁨은 다른 외적인 즐거움이 전혀 없다고 해도 우리 마음을 지켜 줄 것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세상의 모든 것이 어두울 때도 영적인 기쁨 속에 있는 영혼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자연적인 기쁨만을 누리는 영혼은 고난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어둡고 침울해진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영혼이여, 당신은 친구들과 다른 수단들이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을 때는 쾌활하고 즐거워하지만 고난이 찾아오면 이내 낙담과 침울함에 빠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기쁨은 결코 영적인 기쁨이 아니다. 영적인 기쁨이라면 그 기쁨이 당신의 마음을 고난 속에서 기뻐하도록 지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13장 그리스도의 네 번째 해 사역
1. 그리스도의 사역 네 번째 해와 그 해에 행하신 주된 사역들
2.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구별
그리스도의 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보통 그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와 행위를 통해 얻으신 의를 구별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행위를 통해 얻으신 의는 그분이 계명을 온전히 성취함으로써 얻으신 의와 율법의 저주를 만족시킴으로써 얻으신 의로 나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의는 그분이 원래 가지고 계신 타고난 의와 율법을 능동적으로 순종하고 수동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얻으신 의로 나눌 수 있다. 그분이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 의를 원래 갖고 계신다는 말은 잉태된 첫 순간부터 그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은혜로운 기질을 통해 그분이 원래부터 율법을 준수하게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계명에 합법적으로 순종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동적인 순종은 죄로 인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이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극적인 의는 율법에서 금하는 모든 죄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적극적인 의는 율법의 저주를 만족시키기 위해 형벌을 자발적으로 받으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성취할 때 요구되는 모든 미덕과 의무를 행하는 것을 뜻한다. 소극적인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결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의에는 두 가지 의가 있다. 그리스도가 명령된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것과 죄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온전히 만족시키셨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이다. 그 의 역시 두 가지가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이 지닌 거룩함과 삶과 대화에서 보여 주신 거룩함이 그것이다. 전자는 우리가 그분의 타고난 의라고 부르는 것이고 후자는 그분의 실천적인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주석을 눈에 보이게 풀어 주신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자.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주목해서 보라.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온전히 이루어졌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 마치 그 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율법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 것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의식적인 율법을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그러나 또한 도덕적인 법의 목적이 되시고 그분의 존재 안에서 완벽하게 그 법을 완성하셨다. 그러나 그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진정으로 믿는 모든 사람의 의를 위해 그 일을 성취하셨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4).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말인가? 대답은 이것이다.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성취되었다. 타고난 것도 아니고 성화를 통해서도 아닌 전가와 적용을 통해서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취하신 우리의 본질 안에서라는 말이다.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 그렇게 해서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 얼마나 감미로운 진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