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오로지 신령한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 감각을 부여받을 때 깨달을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고하고도 실제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진리 사이의 다른 견해 때문에 망설이지 않는다. 복음에 대한 “아마 사실일 거야”라는 의심은 끝나고, 그의 머리 속에 모든 것이 진리로 자리잡게 되므로 이제 더 이상 그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영적이며 신비스러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는 그의 마음에 강력한 현실로 다가온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단순히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진실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보게 하신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 구원, 천국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들을 그리스도인은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과 행동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그러나 우리가 체험하는 믿음의 경험들 중에는 이러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소위 계시라고 하는 많은 것들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확신적”이지는 못하다. 계시는 사람들의 태도나 행위에 영원한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의 생활에서 실제적으로 무궁하고 영원한 실재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행동은 보여 주지 못한다. 그들의 감정은 한순간 치솟아 올랐다가 즉시 사그라지므로 변함없는 확신의 발자국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다.
마술사 시몬도 머리로는 믿었지만(행8:13), 여전히 “악독이 가득하며 물의에 매인 바 되었다”(행8:23). “믿고 떨었던”(약2:19) 귀신들의 경우처럼 지적 믿음도 감정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감정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영적 확신은 오로지 영적인 사람들에게서만 나온다. 이는 진리에 대한 영적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 마음을 조명해 주실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영적 이해란 위의 것들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내면적 감각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제 영적 이해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하늘의 것들을 확신하게 하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존재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다른 존재들과 가장 구별되는 점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이 아름다움은 그 어떤 아름다움과도 전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있는 이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인 신령한 신적 아름다움을 본다. 이 신령한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줄을 그리스도인이 직접적이고 직감적인 이해로 알게 해준다. 그를 설득할 길고 복잡한 토론이나 논쟁이 필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신령한 하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붙잡는 것이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죄의 더러움에 매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미워하고 저주하는 죄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이나 타락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이 거룩함의 달콤함과 죄의 쓴맛을 음미할 수 있는 미각을 허락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절망적인 부족함을 보고 또한 느낄 수 있다.
이것만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 구세주의 필요성, 또한 인간의 마음을 소생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성경이 진실되게 말하고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고 믿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그 죄를 엄히 벌하신다는 것을 우리로 믿게 만든다.
이런 영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우리 영혼들이 성경이 계시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그의 속죄의 무궁한 가치와 복음의 구원 계획의 위대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행복이 거룩함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고, 또한 그 무엇으로도 묘사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느낀다. 이 모든 진리는 오로지 신령한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 감각을 부여받을 때 깨달을 수 있다.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2:2)
이러한 확신은 학자나 역사가들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에게 확신을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눈을 여시고 복음에서 빛나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신령한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하신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며, 이 증거는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한 것이다. 마치 교양이 없는 사람들은 훌륭한 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듯이,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이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그리스도인은 모든 의심을 눈처럼 녹여 버리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게 하는 이 아름답고 신령한 복음의 영광을 보고, 맛보며 음미한다.
가끔 우리의 영안은 희미해질 때가 있다. 우리가 생동감 넘치고 강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독교 안에 있는 이 하늘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보다 더 맑고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
기독교를 위한 역사적인 증거들이나 다른 논쟁들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도 높이 평가해야 된다.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며, 또한 신자들의 신앙을 재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영적 확신을 주지는 못한다.
오로지 영적 아름다움과 하늘의 신령한 것들의 영광을 보는 시각만이 영적 확신을 줄 수 있다.
- 조나단 에드워즈,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pp 14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