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아래서 참된 회개의 4 특징/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깊은 회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먼저, 이런 회개는 그 본질이 복음적이다. 율법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회개는 율법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우리의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정서이다. 이런 회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리스도로 가득하다. 이런 회개는 십자가 아래서 만개(滿開)하는 한 송이 꽃과도 같다.
속죄의 보혈을 한 번 바라보는 것, 주님이 우리 죄를 사하셨음을 한 번 느끼는 것,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이 십자가로부터 흘러내려 우리의 영혼을 적시는 것!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죄인들, 가장 오래된 죄인들, 죄인 중의 괴수인 죄인들, 무수히 크고 많은 죄악으로 늘 비열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복음적인 애통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둘째, 이런 회개는 그 본질이 거룩하다. 세상의 슬픔과 반대된다는 뜻이다. 이런 회개는 현저하게 경건한 슬픔이다. 우리 영혼이 가장 거룩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십자가 아래 있을 때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이성적인 피조물이 지켜본 것 중에서 가장 이례적인 거룩함을 보게 되는데, 곧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신 일이다.
이 기이한 일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영혼에는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때 생기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은 자연히 십자가에서 발견한 그 기이한 거룩함과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광경 앞에서 마음이 녹아내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의 회개는 그 본질과 열매가 거룩할 수밖에 없다.
셋째, 이런 회개는 매우 강렬하다. 인간의 영혼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가장 깊은 감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경험할 수 있다.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엎드려 있는 영혼이 느끼는 슬픔은, 장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보다 훨씬 더 깊고 통렬하다. 장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은 인간의 본성적인 감정에만 영향을 줄 뿐이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슬픔은 인간의 영적인 감정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뒤흔들어 놓는다. 장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에는 신앙적인 요소가 전혀 없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슬픔에는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깊은 죄책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회개는 기쁨의 예고편이다. 자신의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면, 우리의 심령 속에는 가장 깊고도 순결한 기쁨이 자리잡게 된다. 경건한 슬픔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거룩한 기쁨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다. 눈물을 흘리며 이 귀한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어 있다.
밤새 십자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더라도 새벽이 오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심령에 깃들 것이다.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는 영혼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은 머지않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빛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을 이루셨다는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해 있다는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천국이 확실히 우리의 것임을 아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아. 이런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통과하는 동안 십자가는 찬란한 해같이 점점 더 밝은 빛으로 여러분의 길을 비춰 주어 마침내 여러분을 완전한 영광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다.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십자가 아래서」, pp 6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