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라벨

[스크랩]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24장

강대식 2015. 10. 16. 10:43
24장 성령의 내주하심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도입

사도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도는 참된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해 내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방편은 성령의 역사의 유무이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의 진상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판단의 기준인 성령의 역사하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 고백이나 의무의 이행 같은 어떠한 외적인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사람들의 마음의 품격과 성향(frame and temper)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는 이 기준 하에 성도들을 평가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주목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효력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확실히 연합되었다는 확실성을 증거해 주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검증받아야 할 가장 크고 중대한 문제이다. 이는 외양적인 그리스도인과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별해 내는 시금석과 같다. 우리는 죽어 있는 채로 살아 있는 가지에 외양적인 잠시 붙어 있는 식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복된 뿌리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수액을 받아 살아 있는 가지로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가지로서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Ⅰ 내주하시는 성령님

1 잘못된 이해

우리 안에 인격으로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분의 본질적인 신성(神性)의 고유성들을 우리에게 나눠주신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태양 빛이 집에 들어온다고 태양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끼치시는 은혜와 감화의 분량이 그리스도께 주어지는 분량과 동일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다(요 3:34).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충만으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분이시다. 물론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 역시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신 동일한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은혜의 분량에 있어서는 각 신자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분량과 정도의 차이를 떠나서, 우리 마음에 나타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 자체가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확실하게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열매를 맺음으로써 접붙여진 나무의 일부분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2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분별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신 그 능력의 범위 안에서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 영혼의 활동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직접적인 믿음의 행위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 행동의 진위를 분별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실상을 화인할 수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2-13).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분별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그 효력의 자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들로 이것의 증거를 삼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성령께서 주시는 일반적인 은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은사를 영혼과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증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그저 우리에게 오신 것 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룩한 자들을 도우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발람에게 오셨던 것처럼(민 24:2), 거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임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성령님께 있어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시는 대상은 분명 신자들에게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3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와 내주(內住)하심의 차이

성령의 도우시는 역사와 내주하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도우심은 일시적인 것이다. 반면에 내주하심은 지속적인 것이다. 성령님께서 당신 자신을 신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내주하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살고’(갈 5:25).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갈 5:18). 성령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롬 8:9).

4 신자들 안에 내주하여 계신 성령님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신자들이 복된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은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영광

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그들 안에’ 라는 표현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 언약의 영은 공포와 속박의 영이었다. 그 아래 있던 자들은 종의 신분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영이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다. 그들은 아들의 신분이라는 새 언약의 위대한 선언의 특권과 면책권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근거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상속자로서 첫 언약의 속박에서 자유케 된 자들이란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율법에 매인 자들이 아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6-7).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영혼에게 적용되는 것은 성령으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각 사람들의 영혼에 적용하시는 것을 은혜의 수단으로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성삼위께서는 복된 질서를 통해 일하신다. 각 격위마다 독특하고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선택하시고, 아들은 구속(救贖)하시며, 성령께서 거룩케 하시는 역할을 수행하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의 효력을 발하게 하시는 분은 효력을 발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아들이 이루신 아버지의 뜻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주신 일, 곧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거룩하게 하시는 일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확실한 증거이다. 이는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였음을 풍성하게 확증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Ⅱ 성령의 일하심의 보편적인 법칙

1 주권적인 방식으로 일하심

성령께서는 매우 주권적인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분량만큼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성령께서 베푸신 은혜의 분량은 전적으로 당신 자신의 주권적 기쁨에 기인한다. 당신께서 가지신 주권에 입각하여 은혜의 분량을 조절하시고 사람에 따라, 또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은혜와 은사를 베푸신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우리의 영혼속에 일어나는 움직임은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수동적인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거듭난 후에는 우리 영혼에 능동적인 마음의 역사를 세우신다. 우리가 일하고 성령께서 도우시는 방식으로 말이다(롬 8:16). 그러므로 거듭난 이들이 성령님의 자극없이 자신을 일으켜 분발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는 오류이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은 영혼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의 일하심을 방해하거나 자기들 속에 계신 성령님의 존재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위험의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역시 언제라도 성령님을 근심케 할 수 있다.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마음의 부패와 정욕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을 아주 떠나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여우 성령께서 위로의 영으로 역사하시는 일을 한동안 중지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2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은 신자들의 활동 자체가 아닌 그 의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는 내면적인 힘에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영혼의 내면적인 지각과 신령한 의도에 관한 문제이다. 말이 아둔하고 어법이 제대로 맞지 않는 기도라 할지라도 그 내면에 성령님께 속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성령님의 모든 역사는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조화를 이룬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다. 만약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서 행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영감은 그 자체로 모순 일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마음에 계시는 성령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복사물과도 같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Ⅲ 성령의 내주하심의 특별한 표지

1 죄의 지각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수치감

죄를 지각하게 하는 일은 분명한 성령님의 역사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성령의 역사 중 가장 먼저 선행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성령께서는 가장 먼저 죄를 책망하시고, 죄를 깨닫도록 하신다.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은 거룩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죄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죄에 대한 각성으로 말미암는 양심의 고통이 우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강렬한 소원으로 이끌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의 분명한 증거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성령은 우리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한다는 영적 생명의 법칙을 세우신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그분은 생명의 성령이시다.

이 역사는 성도들의 활발한 영적활동과 의무들을 통해 나타난다. 죄의 무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여혼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법을 갈망하여 이제 영적 생명의 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다.

영적인 생명은 영적인 지각을 전제로 한다. 죄의 무게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어찌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목말라 할 수 있겠는가? 무론 때때로 영적 생명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마음이 죽어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2 그리스도께서 가지시는 관심과 동일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또 다른 증거이다.

성령께서 마음에 거하실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하는 자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6-27). 참된 영혼을 소유한 자는 세상의 악을 보며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겔 9:4).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오직 세상에서의 자신의 영화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3 육체를 거스르심

성령께서는 육체를 거스르시는 분이다(갈 5:17). 당신께서 거하시는 영혼이 가진 부패의 요소들을 제어하시고 억제하시는 분이시다. 신자들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육체의 행위들을 제어할 수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이 역사야말로 성령님의 성화 사역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국면이다.

하지만 이 사역을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신자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죄로 더럽혀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완벽한 상태는 천국에서만이 가능하다. 이 땅에서의 성령의 내주하심은 전적인 죄의 지배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한다. 죄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는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성령의 내주하심을 받은 영혼은 죄에 대하여 이전과는 매우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적어도 거듭나기 전과 같이 죄의 유혹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의향을 갖지는 않는 것이다. 부패한 행위를 경멸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신자들의 의도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가지신 의도에 기인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죄를 온전히 제거하길 간절히 원하며 이렇게 울부짖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죄에 대한 이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심령 가운데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4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성령님은 기도와 간구의 영으로 존재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는 탄원의 영이시다. 신자들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신자들의 간구를 돕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께서는 그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도록 해 주신다. 그것은 믿음과 인내이다.

5 성령의 내주하심을 증거하는 마음의 구조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영혼은 마음이 생각하는 것에 종속된다. 마음의 구조가 세상적이라면, 그 사람의 영적 구조는 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심한 자가 가지는 마음의 구조는 이와 다르다. 그들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천국과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의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는 곧 생명과 평화의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기쁨과 희열을 위해 영적인 것들을 맞바꾸는 어리석은 일들을 행하지 않는다.

성령을 영혼에 모신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성령의 다스림심에 맡긴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성령에 대항하는 혈과 육의 강한 유혹을 거부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영혼의 성향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이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는 것은 우리의 가장 큰 의무이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진실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Ⅳ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몇 가지 의문들

1 ‘저는 제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저의 영혼을 뒤덮는 엄청난 어두움을 봅니다.’

영적 지식에 관한 두 가지, 곧 양적인 부분과 그 효력에 관한 문제로 답을 하려 한다. 확실한 사실은 지식의 분량과 그 효력은 큰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느끼는 영혼에 대한 상태의 실상이 우리가 가지는 인식에 의해 죄우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겸비함을 가지고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도한다면, 그래서 아주 작은 물방울만큼이라도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면 괜찮다. 우리가 가진 단 한 방울의 영적인 지식이 인간적이고 거룩하지 못한, 또는 매우 세상적이며 도덕적인 사변적 지식의 대해(大海)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주 적은 참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도 알게 할 것이다.

2 ‘저는 때때로 영적 의무들을 감당할 때 저의 마음이 고양되고 정서가 녹아드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제 본성적 방식에서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다는 확신이 든다면 제게 큰 위로 될테데 말입니다.’

자아가 원하고 기대하는 의도대로 그 모든 일의 목적이 인간의 찬사를 받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부패하고 위선적인 본성으로부터 파생된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나약함과 죄악성을
깊이 깨달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고양이라면 그것은 결코 단순한 본성의 열매로부터 치부될 수는
없다.

육체의 뿌리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적인 마음을 고양시키는 것 역시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에 역사하시는 두드러진 방편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영적인 일에 대해 무감각하고 별다른 의욕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근거로 자신들 속에 성령께서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상 그들이 영적인 영혼들이며 은혜로운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영혼이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곧 완전히 죽어 있는 상태와 영적으로 둔감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매일 영혼의 슬픔을 느끼며, 태양이 없는 아침을 맞는 것처럼 성령의 위로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편치 않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안전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단지 기쁨 안에서 열매를 거두는 수확의 시기를 맞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육신의 정욕으로 혼란스러워하고 굴복당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성령의 내주하심을 확신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도가 ‘성령 가운데 행하는 자는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갈 5:16)고 말한 것을 근거로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성도들은 어느 때라도 죄를 발현하지 않는다거나, 어떠한 경우라도 죄에 굴복당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해석하지는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러한 해석대로라면 이 말씀은 로마서 7장 23절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셈이 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도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것은 두 가지의 원리를 함축하고 있다. 그 하나는 성도들 속에 있는 은혜의 원리이다. 은혜의 원리란 죄의 활동을 초기에 감지할 수 있게 하는 원리를 말한다. 또 다른 원리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고 난 이후에 찾아오는 죄에 대한 회개의 마음이다. 이는 신자들이 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경고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신자들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자들로 나아가는 것이다.

결론

성령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거하시는 성전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이 성령님의 은사야말로 장차 나타날 여러분의 영광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며 증거이다. 우리의 영혼 가운데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 영혼의 처한 조건과 욕망, 그리고 그 영혼 속에 존재하는 총체적인 반감과 뿌리 깊은 증오가 어떠하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서 그와 같은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가장 경이로운 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정결하시고 완전무결하게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 같이 부정하고 불결한 마음에 내주하시는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것이 기적 중 기적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영혼을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이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들을 초월하여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그들과 같은 상태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온 영이신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알게 된 자들이니 말입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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