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국의 대각성운동, 복음주의 성장, 오늘의 반향(마이클 호튼, 미국제 영성, 강의안)
대각성운동
계몽주의의 추종자들이 막 생기기 시작할 즈음, 뉴잉글랜드 지방에 일시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장로교 출신의 이민자였던 윌리암 테넌트와 화란 개혁교회 출신의 이민자였던 데오도르 프랠링하이젠은 모두 뉴저지 지역에서 교구 목사로서 봉직하고 있었다. 1720년대에 프렐링하이젠은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개혁주의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테넌트 목사도 자기 아들 길버트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여러 지역에 다니며 설교하기 시작했다. 알미니안주의가 더 이상 확산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윌리암 테넌트는 1736년 통나무 대학(Log College)를 창설했다. 이 조그만 학원은 칼빈주의적 전도자들에게 신학 훈련을 시키는 센터가 되었으며 윌리암 테넌트가 세상을 떠난 1746년에는 이 통나무 대학이 지금 우리에게 프린스톤 대학으로 알려진 뉴저지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703년 조나단 에드워즈가 태어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절충적인 반언약제를 주창한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의 손자인 그는 소심하고 말수가 적었는데 학문적으로 탁월한 상태에 있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에드워즈를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기록하고 있다. 13세때 예일 대학에 입학했으며 마침내 그는 원죄와 칭의 그리고 자유 의지에 관하여 훌륭한 변증을 하는 복음의 사수자로서의 활동적인 생애를 시작했다. 존 로크나 아이작 뉴톤으로부터 새로운 과학적 사고를 과감히 빌려와서 과거 뉴잉글랜드의 전통 신학을 사수하고 변증하는 데 사용하였다.
1735년 에드워즈가 목회하고 있는 교구에서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이 미국이란 나라를 영적으로 각성케 한 가장 위대한 영적 각성이 교리 설교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라! 한때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곳이 이제 전체 도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토론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에드워즈는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된 곳에서는 그 어디에서나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부흥을 허락하셨다”고 말하였다. 그의 메시지에 반대하는 교인들 때문에 교회를 사임하게 된 에드워즈는 1757년 프린스톤 대학의 총장직을 맡게 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서 소천(召天)하였다. 에드워즈는 “최후의 청교도”라는 평가를 받았다.
에드워즈가 떠난 자리의 공백을 영국국교회(성공회) 소속의 복음 전도자 죠지 휫필드가 곧 채우게 되었다. 사실상 대각성 운동은 휫필드를 통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신대륙이라는 식민지 전역에 확산되게 되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휫필드의 설교를 들으러 가면서 휫필드가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에 한 푼도 적선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나갔으나 설교가 끝나고 나서 그 필라델피아의 지도자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다 털어넣고야 말았다. 프랭클린은 모인 청중의 수를 어림잡아 삼만 명 정도라고 계산했으며 또 “기독교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생각이 없기는커녕 마치 온 세상이 온통 기독교화되어서 저녁 시간에 시가지라도 걸을라치면 거리거리마다 각 가정에서 찬송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거리를 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제랄드 크레이그의 말이다. “휫필드가 보기에 알미니안주의는 죄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모두 희석시켰다는 사실이 명백하였다. 알미니안주의는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선택(예정)은 사람들에게 세상적(육적) 안전 추구를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칼빈주의가 인간의 모든 희망을 짓밟아 버리고 무관심만을 고조시킨다는 웨슬레의 계속되는 주장이 과연 옳았는가? 그 반대의 견해인 알미니안주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생명력 있는 개념을 내버리지 않았는가? 웨슬레는 자기 친구인 휫필드에게 한번은 ‘자네의 하나님은 나의 악마야!”라고 가시돋힌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도 시대 이후로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 휫필드는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도한 전도자였다. 복음의 진수에 대한 그의 명확한 호소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에드워즈나 테넌트 부자가 그랬듯이 교양 있는 지성과 따스한 마음을 겸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경건과 신앙상 가치 있는 유일한 목표임을 보여 주고 있다. 적어도 한동안 칼빈주의는 미국인의 생활 중심에서 살아 있었다.
칼빈주의는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뉴잉글랜드 지역에 대한 이전의 영광과 영향력을 결코 되찾지 못하였다. 바로 그 각성 운동이란 것이 감정주의로 용해되어 버리고 에드워즈나 휫필드나 테넌트 부자가 가지고 있던 개혁주의적 성격과 동시에 지성적인 사상의 틀을 상실함에 따라 아메리카는 잭슨식 민주주의에 서로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신조를 찾고 있었다.
복음주의의 성장
독립전쟁 당시에 이미 자신감에 차 있는 이성주의(합리주의)와 그에 경합하는 감정주의의 싸움은 불붙고 있었다. 유니테리언(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이라는 이신론(理神論, 하나님이 우주를 질서 있게 만드시고 그 질서와 법칙에 의해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우주 스스로 운행되도록 하셨다는 주장) 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보스톤에서 알미니안주의는 이성주의의 냄새를 풍겼으나 정열적이고 감정적이고 급진적인 기질을 가진 개척 지역에서는 알미니안주의가 점차 반지성주의적 기운을 지니기 시작했다. 앞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성을 신뢰하라고 가르쳤으며 뒤의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감정을 믿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둘다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홉스타터는 다음과 같이 통찰하고 있다. “지성적이며 동시에 교육적인 지도자라는 청교도적인 목회자상은 대중적인 권고자라는 복음주의적인 목사상에 직면하여 점차적으로 약화되어 갔다. 신학 교육 그 자체가 더욱더 도구적이 되어버렸다. 간단한 교리만 알면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교회들은 세속 사회와의 지적 접촉을 회피하였다. 그리고 신앙이 지적 경험의 총체적 세계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합리적인 연구 분야는 자연과학의 영역이라는 전제하에 포기해 버렸다. 1853년 한 유명한 목사는 ‘일반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지적인 성직자는 경건에 모자람이 있고 아주 경건한 목사는 지적인 면에 결핍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갖는다’고 불만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제 2차 대각성 운동 기간(1775-1825)에 대중적인 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의 객관적 내용이 신앙의 실존적 행동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교회의 모습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비슷하게 되기를 원했으며 교회의 형태를 자기들이 결정하기를 원했다. 이리하여 수많은 분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보편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의 개념은 분파적인 의식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였다”고 홉스타터는 지적하고 있다. 1741년 남부 케롤라이나 공보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도심의 유니테리언이 되었든지 여러 정통 교회의 목사가 되었든지간에 훈련을 받은 성직자들이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으며 지식도 없고 복음의 위대한 내용들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적이며 지적인 토대를 잠식시키면서 복음주의자들은 사상(思想)의 시장에서 진지한 변호도 하지 못한 채 복음주의를 내팽개쳐 버렸다. 한때 복음주의는 사상의 기반 위에 서 있었으나 이제는 사상의 장터에서 밀려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태만으로 세속주의가 그 빈 자리에 들어와 미국인의 공적 생활과 사적인 삶을 형성하는 불가피한 세력이 되었다.
실로 우리는 하와의 길을 따라갔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눈은 밝게 되었는가? 로버트 벨라에 따르면 “뉴잉글랜드의 기독교는 공적이며 동시에 통일되어 있었지만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사적이며 다양하다.”
미국은 세워질 때부터 결단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초월적인 종교적 관점이 아닌 시민 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민 종교적 관점은 성경적 기독교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1890년에 미국 인구의 90%가 교회와는 무관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이 대단히 세속화된 상태라고 하지만 현재 그 나라들에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독립전쟁 후의 미국 교회의 출석률의 갑절에 해당한다. 또한 세속화된 현대 미국에서도 교회나 회당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매주 40%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의 반향(反響)
세속주의가 발흥하게 된 원인의 몇 가지는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른 혼란의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원인의 대부분은 종교개혁에 의해 재확인되었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심원한 비전이 붕괴된 데 있다 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미 건국 초기부터 고백적 정통주의의 입장에서 일탈하였다. 그 고백적 입장이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을 의미있고 일관되게 설명해 주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설 자리를 마련해 준 입장이었다. 우리의 지식과 자료들이 급속도로 축적됨에 따라 그 정보들을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재정리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미국인은 자율 의식을 필요로 하였다. 존 맥닐,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공공의 정의라는 명분에 대한 의식과 책임 있는 대의 정치에 대한 강력한 선호를 항상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연결시켜 왔다.” 스코틀랜드에서 존 낙스는 메어리 스튜어트를 물리치고 대의 정치의 기반 위에 장로교를 세웠다. 이 신앙에서 새뮤얼 러더포드는 그의 명저 「법이 왕이다」를 썼으며, 그 책에서 그는 통치자의 권위는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했다. 러더포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초안 작성에 참여한 사람이다. 러더포드의 주장들은 널리 채택되었으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 인용될 정도였다. 크롬웰과 칼빈주의자들이 주도했던 의회에 의해 발생한 영국의 시민전쟁은 영국의 절대 왕정을 종식시켰다. 한 자료에 의하면, “크롬웰은 신앙적 관용과 경건한 나라와 대의 정치를 원했던 헌신된 청교도였다.”
내 말의 요지는 민주주의가 초기 식민지 역사에서 개혁주의 전통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의 자연스런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수평적 차원(피조물 대 피조물)에서 개혁주의 전통이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수직적 차원(창조주 대 피조물)에 있어서는 독재적이다. 「불의 전차」(1924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 8회 올림픽 육상 경기에 출전하여 주일성수를 하기 위해 주일 경기를 포기하고 평일 경기에 종목을 바꿔 출전해 금메달을 딴 스코틀랜드 목사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에서 그 스코틀랜드 목사는 약간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청중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은 민주 정치를 하지 않으시며, 독재 정치를 하신다”고 말했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도움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종교가 창조주 대 피조물의 수직적 관계 또한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역사가인 마트 놀과 나단 해취, 그리고 조지 마스든은 “간단히 말해서 칼빈주의는 신학적 논쟁 때문에 중도하차 당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가 미국 독립전쟁의 자유 정신을 배격했기 때문에 배제되었다.”
대각성 운동의 학도들인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은 제 2차 대각성 운동의 씨를 뿌렸다. 개인적인 회심에 대한 강조에 덧붙여 새롭게 공공의 정의를 강조했다. 여자들의 참정권 운동과 노예 페지 운동은 에드워즈와 테넌트의 영향을 받은 이 학도들의 후원을 받았다. 비록 후기의 부흥사들이 이와 같은 공공의 개혁들을 자극한 신학 사상의 틀을 버렸을지라도, 그 부흥사들은 개인의 신앙과 사회 복지를 함께 연결하는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이 마침내 그들의 개인 신앙을 세상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의 비관주의가 그 이전 250년 동안 지녀 왔던 「승리주의적 후천년설」(the triumphalistic postmillenialism)을 무너뜨린 이후의 일이다.
우리가 더욱더 많은 영토를 내어줌에 따라 우리(복음주의자들)는 미국을 세속화시킨 것이다. 다른 세계관들이 들어와서 채워질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남겨 준 사람들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이었다. 신앙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들이 내적으로 부적합했기 때문에, 혹은 그 이유들이 부적합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불신앙은 자라게 되었다. 그 책임을 세상의 인본주의자들에게 돌리기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정직하지 못하다. 그리고 정직성은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사상의 영역들을 이웃에게 양도하고 우리 자신의 사적인 게토(ghetto) 안으로 피신했다. 그 개인적인 게토 안에서 복음주의라는 종교는 사적으로는 호소력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적실성이 없는 종교로서 적절히 그러나 사실은 비극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하비 콕스, “세속주의는 종교적 세계관들을 상대화시켰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무력화시켰다. 종교는 사적인 것이 되었으며, 세속화는 불과 쇠사슬로 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하였다. 세속화는 신자로 하여금 그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며, 헌신자를 설득하여 신앙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는 사실을 설득하였다. 전통적 종교들의 신들은 단지 개인적인 숭배의 대상으로나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소집단들의 후원자로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 신들은 세속 대도시의 공적인 삶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사적인 것으로 여기자 사회라는 자동차는 달리는 데 필요한 다른 연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 자동차는 유사 기독교적인 가솔린으로 달려가고 있다. 색깔 없는 녹색이란 말이 있을 수 없듯이 가치와 무관한 문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세상을 세상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처럼 웃기는 일도 없으며 그런 일처럼 시간 낭비하는 일도 없다. 에른스트 르낭은 프랑스의 철학자로서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앙을 잃었다. “우리는 빈 향수병(이제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기독교)의 향내를 맡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 향수를 만드는 법이 남아 있다! 그 향수병에 본래 내려오던 향수의 진액으로 채우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 성분들이 무엇이었는가를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빌립보 성의 그 간수가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 라고 외쳤듯이 우리도 그렇게 외쳐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는 그 물음에 한 가지 답변을 해주는데 그 답변은 성경의 답변이다. 개혁주의의 해석(답변, 처방)은 전통에 근거해 진리냐 오류냐의 검증을 받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라쉬는 그의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과거에 대한 우리 문화의 무지는 바로 우리 문화의 파산의 뚜렷한 반증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칼빈주의, 유니테리언주의, 알미니안주의, 세속 세계관 그 어느 것을 받아들였건간에 처음 세계관에서 다음 세계관으로의 이행이 세속화 과정에서는 중심적이다. 역사가 조셉 하루투니안은 말한다. “이전에는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었다. 이전에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항상 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악하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의 원천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전에는 인간의 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에게 좋은 것들이 하나님께도 영광이다.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살았으나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을 섬기고 있다.”
우리는 “다시금 우리 조상들의 신앙으로, 우리 조상들의 성경으로, 우리 조상들이 이 나라를 세울 때 하나의 전제로서 사용했던 그 성경적 원칙들에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제리 폴웰은 말한다. 그러나 미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들의 신앙”이란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니었으며 계몽주의의 이신론과 알미니안주의와 좀더 이전의 성경적 신앙의 세속화된 자취의 혼합임을 알 수 있다.(예를 들어 존 아담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이것은 아주 무서운 신성모독”이라고 맘대로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우리 조상들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만약 그 성경이 프랭클린과 페인과 알렌과 존 아담스가 격찬했던 제퍼슨의 성경을 가리킨다면, 이 말에 대해서도 항의할 만한 일이다. 제퍼슨 성경이란 제퍼슨이 개정한 성경을 말하는데, 그는 성경에서 초월적인 요소들(기적들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 부활 등)과 새로운 미국인의 합리적이고 자기 결정적인 감각에 비판적이라고 여겨지는 여타의 가르침들을 다 삭제해 버렸다. 성경에 대한 존 아담스의 태도가 그 점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성경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모든 책들보다도 더 많이 나의 철학에 맞지 않는 것들을 담고 있다. 나의 철학에 맞지 않는 성경의 그러한 부분들에 대하여 나는 좀더 조사해 보기 위해 보류해 놓았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권위에 대한 그와 같은 견해는 폭넓은 혼합적 시민 종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른지 모르지만 순수한 신앙에 대적하는 그러한 견해와 태도는 철천지 원수가 아닐 수 없다. 단순히 우리 조상들의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경박한 견해는 관공서 앞의 넓은 잔디밭 위에 세워진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조각품”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하는 일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복음과 골수 이신론적인 종교와를 혼동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의 대의를 방해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을 세우기 위한 전제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원칙들”의 대부분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중반 동안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수는 뉴잉글랜드 지방의 성인 인구의 삼분의 일을 넘은 적이 없으며 남부 지역에서는 성인의 5퍼센트를 결코 넘지 못했다. 미국 건국의 국부 중의 국부라 할 수 있는 조지 워싱턴은 트리폴리에 보낸 한 편지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미합중국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라는 종교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견해들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구실들도 두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조화를 결코 깨뜨리지 못할 것이라고 각 정당들은 선언하고 있다.“
대중 종교(또는 민속 종교)라는 것이 결코 무종교보다 나은 것이 아니다. 성경적 종교와 이교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점차로 다원주의적이 되어 가고 있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불신자들이 “(피상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도록”(딤후3:5) 방치할 수 없다. 우리는 선교사로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알려져 있지 않은 새로운 땅에, 열 사람들 중 여덟이 자기들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열 사람들 중 네 사람만이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반도 못되는 사람들만이 사복음서의 이름을 댈 수 있는 그런 미국 땅에 선교사로 파송받아야 한다.
예일 대학의 역사학자인 시드니 알스트롬은 말한다. “한창 때의 청교도주의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반(反)혁명이다. 복음주의는 청교도 400주년의 결실을 즐겁게 추구하여 그 풍성함을 청교도 후기 세계의 엄청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돌려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 대신에 복음주의는 세상을 세상적이라고 정죄만 할 뿐이지 진지하고 지성적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전략일지 모른다. 그리고 과거의 어떤 위대한 전통의 부요를 갈급한 세계에 전해 주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알스트롬은 덧붙인다.
하루투니안, “이제 ‘인생의 비장함’에 대한 의식과 그로부터 나오는 지혜와 냉철함이 곧 부활되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과 선택과 인간의 부패와 중생의 교리들이 의미했던 진실들을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전적 프로테스탄트의 이러한 교리들이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그 교리들의 성경적 기원이나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상원의원인 마크 하트필드, “많은 사람들은 시민 종교가 아무 종교가 없는 것보다 더 낫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견해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다. 내 견해로는 시민 종교는 무해하지도 않고, 일반화된 유니테리언류의 신앙도 아니다. 그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숙고하도록 해주고 이 나라에 윤리적인 지침까지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민 종교는 성경적 신앙이 가지고 있는 예언자적 차원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적 성격을 결(缺)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적 자기의(自己義)와 심지어 우상 숭배의 도구로 이용당할 수 있는 여지가 대단히 많다.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무해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모사품에 만족할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의 모사품을 만든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치명타를 입히게 될 것이다.” (e-book, pp 18-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