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10장 복음이 이끄는 확신
열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확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복음이 주는 위로를 누려야 한다는 사실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거룩한 삶에 필수적인 확신에 대해 좀 더 살펴보려고 한다.
신자가 완전한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분명히 완전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르쳤다! 이들은 한결같이 “믿음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구원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확신 교리를 포기했다. 오늘날 많은 성경 교사들의 구원의 확신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구원이 결코 확실하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것으로, 꼭 확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신자들이 참된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하고 좌절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확신 교리에 대한 반론 중 또 하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확신은 교만과 허영이라는 악한 열매를 낸다. 심판날이 오기도 전에 사람들은 천국에 자기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신앙의 의무를 가볍게 여기고, 거짓된 안전에 취해 모든 방탕한 것에 자신을 방임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을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생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부지런히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선행에 힘쓰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모든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게 하는 데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지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반론에 대항에서 믿음의 확신이라는 정통 교리를 변호하고자 한다.
첫째, 믿음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 즉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둘째, 내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자신의 구원을 철석같이 믿는 것이 아니다.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거짓된 구원의 확신에 빠져 있다.
내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란 진실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은 확신에 찬 믿음일 뿐 아니라 거룩한 믿음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것 때문에 우쭐해 하지 않는 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욱 겸손해진다(빌3:3). 이런 믿음의 확신은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두려움을 저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을 핑계로 육신적인 안정을 도모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확신으로 인해 자기의 유일한 피난처와 안전이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육체를 따라 뒤로 물러날까 두려워한다.
거룩한 길로 인도하는 구원의 확신에서 어떻게 영적인 게으름과 방종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확신을 통해 신자들은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된다. 이는 자신들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이다(고전15:5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로 확신하는 사람은 율법적인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 데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탄은 항상 이런 구원의 확신은 죄악된 나태함과 방종으로 이끌 뿐이라고 부추기지만, 신자들은 이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셋째, 믿음의 확신과 의심하는 것이 서로 배치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로 구원의 확신 교리를 떠난다. 구원을 의심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자신의 구원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이 땅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라 할지라도 육체와 영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갈5:17). 성도라 할지라도 그 지체 속에 마음의 법과 싸우는 죄의 법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은가?(롬7:23). 진실로 믿지 않는 사람도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지 않는가?(막9:24). 믿음의 확신이 있으면서도 때로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육체와 마귀가 신자에게 있는 믿음을 공격하면서 의심을 불러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도 의심으로 힘겨워 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구원의 확신을 전혀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참된 신자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이렇게 다룬다. 시편 기자처럼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11). 자기 안에 일어나는 의심을 정죄하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시77:10). 이런 의심은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의심 속에서도 지금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주시라고 기도한다.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쳐 주시도록 기도한다. 확신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할 수 없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단 말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과 싸울 수밖에 없다! 의심과 싸우고 의심을 거부하는 것이 또한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다. 내가 말하는 구원의 확신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은 이 교리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 얻는 진정한 믿음은 의심을 거부하고 항상 확신 가운데 머물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넷째,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값없이 받아 누린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 말하는 진리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여전히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성경은 복음을 믿어 확신을 얻으라고 말한다.
믿음의 확신을 얻는 일과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외적인 증거뿐 아니라 내적인 증거도 있다. 신자인 우리 안에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신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롬4:17).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들을 존재하게 하신다. 구원의 확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전혀 가질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신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바라시는 일이다!
이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누려야 하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첫째, 구원의 확신은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 얻는 믿음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약속된 대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도록 하는 성령의 은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을 묘사하는 이 표현들은 모두 확신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수 있다. 믿음은 본질상 의심하고(마14:31), 흔들리고(히10:23), 두려워하고(막5:36), 망설이는(롬4:20) 것과는 상반되는 일이다.
믿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다른 표현들-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께 기대는 것-은 확신을 함의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영혼은 두려움과 어려움과 염려와 절망을 대적할 힘을 갖게 된다. 주님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사람은 모든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도 주님이 자기의 하나님이신 것과 자기의 구원이심을 확신한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31:14).
신자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해도 좋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능히 구원하실만큼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절하시고 긍휼이 많으시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을 믿는 사람을 내어 쫓지 않으신다.
둘째, 성경은 곳곳에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확신하라고 한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촉구한다(히10:22, 새번역). 이런 믿음은 “의인”의 믿음이다(히10:38). 또한 성경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묘사하는 믿음이다(히11:1). 믿음에 대한 이런 묘사에 확신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믿음은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처럼 구원의 문제를 우리 마음의 눈 앞에 명료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와 신자가 연합하게 하는 믿음을 “확신”이라고 부른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14).
어떤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사실임을 완전히 납득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분명한 약속은,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을 때 믿음의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4:18-25).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야고보 선생은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좋은 것을 구하라고 명령한다. 이 좋은 것 중에는 확신도 포함된다. 확신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확신이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 구한 것은 무엇이든지 의심하지 말라고 한다(약1:6-7). 이 성경 본문은 우리가 믿을 때에 어느 정도 확신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준다. 확신이 없이는 구원을 전혀 누릴 수 없다.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면서 사는 것이 겸손은 아니다. 오히려 교만과 불순종이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확신에 찬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 나오면 즉시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가장 악한 죄인들 역시 믿는 즉시 구원의 확신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새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두고 보시기 위해 유예기간을 갖지 않으신다. 자살하려든 간수를 예로 들 수 있다. 바울은 말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하나님께서는 구원과 확신을 불가분의 관계로 맺으셨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을 자기 소유로 영접하는 것-그분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분을 영접하면 그분은 즉시 우리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넷째,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신했다. 이들의 확신은 인간 본성에 있는 선한 자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신뢰했던 하나님의 약속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들에게 주신 시편과 노래 중에는 확신으로 넘쳐나는 것들이 있다. 시편 23, 27, 44, 46편이 특별히 그렇다. 이 노래들에 담긴 확신은 시편 기자의 진실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다.
구약성경의 역사 전반을 보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히11장).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우리의 모범으로 주셔서, 우리도 그들처럼 영혼 구원을 위해 믿음으로 살도록 하신다(히10:39). 이들 대부분은 놀라운 확신을 포함하는 구원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성도들의 삶을 읽다 보면 그들이 의심과 두려움에 빠진 것도 보게 된다. 구약성경의 성도들이 의심했을 때는 대개 특별한 고통을 당하거나 자신들이 끔찍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믿음을 방해하는 의심과 두려움을 이들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도 보게 될 것이다(시42:11, 31:22, 78:7, 10).
그리스도의 구원이 계시된 사도 시대에 교회는 큰 확신을 누렸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바울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고 했다.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신다(롬8:15-17).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는 우리를 신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증거하시는가? 왜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시는가?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다. 다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확신을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구원 얻는 믿음을 주신다. 확신에 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인 것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 자신의 어떠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신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양자의 영이시다. 신자가 갖는 믿음의 확신은 신자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증거에 달렸다.
구원의 확신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예로 들면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확신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때때로 의심에 빠졌던 신약과 구약의 많은 성도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를 이들은 간과하고 있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는 나도 동의한다. 예전보다도 훨씬 적어졌다.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 성경 교사들이 일조한 바가 크다. 이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가르쳤던 확신의 교리를 저버렸다. 어떻게 확신의 교리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들은 의심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을 예로 들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꼭 확신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구원 얻는 진정한 믿음은 항상 정도의 확신을 수반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의심에 빠질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의심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거부하고 정죄한다.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한다. 확신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려고 한다.
다섯째,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손과 입을 통해 몸이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편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자신과 관계 맺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구원 얻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 되기를 기뻐하시고, 나를 자녀 삼아 후사가 되게 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을 굳게 확신하기 전에는 마음으로부터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와 함께 하시고, 결코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없다.
여섯째,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믿음을 통해 우리 마음은 깨끗해지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확신할 때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을 믿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거룩하게 살 수 없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전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룩하게 살 수 없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독려하되, 구원의 확신 교리를 가지고 독려하지는 마십시오. 이 교리는 거룩하게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믿음은 얼마나 비참한지 모른다! 은혜의 복음이 아닌 율법의 원리에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복음의 원리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의무는 율법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에 기반을 둔 것이어야 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함 •부끄럽지 않게 하는 소망을 품음 •여호와 하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함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함 •몸과 영혼을 하나님이 받으실 산 제사로 드림 •몸과 영혼과 모든 염려를 주께 맡김 •모든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함 •주님만을 자랑함 •찬송중에 승리함 •환난 중에 기뻐함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를 덧입음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 •우리의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언제라도 자신의 영혼을 드림 •복된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함
일곱째, 확신의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원 얻는 믿음이 확신을 주기는커녕 악을 일삼게 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주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영혼들은 온갖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들은 어떤 견고한 위로도 누릴 수 없다. 자신에 대해서 선한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다. 자신은 전혀 거룩하지 않고 죄 가운데 죽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들을 위로하려면 더 나은 방법이 필요하다! 죄인의 괴수라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의 약속을 거저 받는다고 말해 주라. 이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이들을 격려하라. 죄사함과 거룩과 영원한 영광을 담대히 그리스도를 의지하라고 촉구하라. 확신을 말하지 않는 가르침은 수많은 악을 초래한다. 구원을 확신하지 않고 의심하는 것을 겸손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자신이 과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성찬에 참여하는 것조차 꺼린다.
참된 신자는 믿을 때에 믿음의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신자라 해서 당연히 구원의 확신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릇된 가르침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확신을 잃어 가고 있다. 온갖 의심에 둘러싸여 이들의 영혼은 괴로워한다. 일생을 두려움과 의심으로 허비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용기와 열정이 일어날 리 없다! 이들이 이 땅의 것에 몰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고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모든 죄악을 피하는 길은 구원의 확신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담대하게 주의 이름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김으로써 이 확신을 지키고 새롭게 하라. 죄에 빠져 빛을 잃었을 때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믿으라(사50:10).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