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음" (로마서강해7권23장, 김영희강의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섯 번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타났다’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러한 모양인 것은 사람들이 계시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철학을 그 자리에 놓았다. 우리는 진리를 ‘요청하는’ 또는 실체를 ‘탐구’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탐구나 탐사에 가담하라고 초청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공표요, 계시이다. 그것은 ‘명백하게 보여 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성경에는 복음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로마서 1:2은 그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또 다른 증거들이 있다.(1:7, 3:3-6, 3:21, 4:) 이전에는 희미하게 나타났지만,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것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것이 명백하게 열려졌다. ‘나타났다’는 말의 또 다른 강조점은, 그것이 이미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이미 집행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나 우리는 이제 뒤돌아보게 된 것이다.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곱 번째 이유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계시의 내용으로 ‘하나님의 의’이다. 서신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표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푸는 열쇠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 어구는 마틴 루터가 이 표현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그 어구는 실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산출했던 어구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이 1:17절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프로테스탄트라는 명칭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의문스럽기 조차하다. 성경 전체에서 이 17절처럼 더 사활을 좌우하는 구절은 없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으로서의 의를 뜻하지 않는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히 하나님의 거룩이나 공의의 계시에 불과하다면,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는 커녕 가장 무섭고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도로 로마서에 대한 강론을 하기로 되어 있을 때, 이 구절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의 뜻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영혼의 고뇌를 겪어야 했다. 그는 “나는 그 ‘하나님의’ 라는 표현 때문에 너무나 근심한 나머지 녹초가 되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선언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언제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알리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하였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다 철저하게 절망적이고 소망이 없게 만든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의’라는 그 표현이 구원의 길을 차단하고 말았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 표현이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뜻하는 것으로, 구약에 나오는 그 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불완전한 계시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온전한 계시를 얻게 되고 그 계시는 무한히 더 위대하다는 식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의를 뜻한다. 무엇이 ‘의’인가? 그 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있는 의는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열납될 만하도록 자신을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도가 여기서 복음을 즐거워하는 것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만큼 이에 관련되어 있다. 복음은 율법 외에 어떠한 일을 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페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마치 복음이 율법을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는 것처럼 복음과 율법을 대치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복음은 율법을 세운다. 복음이 단순히 사죄를 주고, 행복하게 만들고, 난제들을 없애버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계획 되었는가?
기독교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는 욥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의로우랴?” 복음의 임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교회와 복음전도가 직면하는 위험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점을 착안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거짓된 복음전도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피상적인 가짜 회심을 하게 된다. 믿음 대신 ‘신앙주의’를 낳게 되어 그들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더 이상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느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면전에 우리를 인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로울 수 있는가? 사람이 의로울 수 있기 전에 먼저 율법을 지켜야 한다. 바울은 복음 안에 그 문제를 푸는 하나님의 방식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로 그 의를 제공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한 의를 말한다. 복음의 전체 영광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하게 모든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셨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모든 죄악들에 대해서 선고하는 율법의 모든 형벌을 다 처리하셨다. 그는 우리의 죄책을 스스로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셨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철저하게, 긍정적으로든지 부정적으로든지, 수동적으로든지 능동적으로든지 높였다. 이제 율법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전가(계산)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빚을 청산하시고, 채무가 적혀 있는 책이 도말되었다. 그런 다음에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완전함과 의를 내 계산서에 써넣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두루마기로 옷 입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선다. 그것이 복음의 전체 메시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이 교리를 포착할 때에만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좋은 소식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
구원의 핵심은 느낌이나 또는 이러저러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이 엄청난 것, 바로 그것이다. 사도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덟 번째 이유는
“믿음으로 믿음에” - 복음은 이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방식 때문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길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사도는 이 16-17절에서 믿음의 개념을 네 번이나 언급한다. 믿음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구원의 전체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여러분의 삶 전체가 믿음의 삶이다. 예를 들어 기차 좌석에 앉았을 때 벌써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럽기가 짝이 없으며, 다만 수학적 확률의 법칙을 실행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일반적인 가정 위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언제나 이지적인 것이고, 믿음이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믿음은 무의식적이거나 희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행동이다. 모든 것이 의례 잘 되겠지 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믿음은 고유하고 특별한 성질로써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다.
두 번째 요점은 ‘믿음으로’라는 뜻은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뜻이 아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율법보다 ‘더 가벼운 요구’와 같은 종류가 믿음이라는 뜻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경륜의 시대이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내 아들을 믿겠는가?를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을 옛 율법보다 더 쉽고 단순한 새 율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율법주의적인 모든 것의 반대하는 것으로 믿음을 표현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을 의롭게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적인 생각이다. 반대로 믿음은 내 공로면 충분하다고 말하도록 하는 모든 성향을 부정하고 기각한다. 삶 속에서 모든 자신의 가치의식을 다 몰아내지 못했다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그 통로를 통해서 나는 그 의를 받아들인다.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믿음에 나타내진다는 뜻이다. 그것을 아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며, 그런 사람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랑하고 즐거워한다.
끝으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이 모든 것은 사실상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구는 마틴 루터를 해방시킨 어구였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에 이르게 되었을 때, 율법과 믿음 사이의 온전한 차이가 그것임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는 율법에 따라서 의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루터의 전체 생활은 혁명적으로 변화 되었다. 비참하고 곤고하고 불행한 수도사, 금식도 하고 땀도 많이 흘리고 기도도 많이 해보았지만 더욱 더 실패를 의식했던 그 사람이 종교개혁의 선봉장이 되었다! 1:17절의 이해를 통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추상적인 의가 구체적인 의로 바뀌어졌다! 하박국은 그것을 온전히 다 알지는 못했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난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갈대아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자녀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멸절될까?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들이 ‘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본적인 원리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끝내 분리해낼 것은 하나도 없다. 내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나는 영원토록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이다. 어떠한 것도, 어느 사람도 그것을 결코 바꿀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