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복음의 증험될 필요성" (로마서강해7권24장, 강의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쫒아 나타나나니”(롬 1:18)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를 읽고 갈피를 잡지 못하며 극히 어려운 서신이라고 생각하는 원인은, 16-17절에서 사도가 무엇을 말하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6절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고 17절에서는 동시에 복음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진술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 복음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며, 로마서의 주제이다.
‘믿음’이라는 말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믿음’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또 다른 위험이 존재한다. 믿음을 행위의 반대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행위의 반대는 ‘하나님의 의’이다. 행위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이 다른 구원,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주는 것이다. 행위의 반대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치는 의가 행위의 반대이다. 또한 믿음은 율법의 반대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을 때 율법을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서 성취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다.
믿음의 본질(히브리서 11장)은 첫째, 믿음은 믿는 것을 뜻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3) 이지에 관계된 부분이다.
둘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확신)하며”(13) 마음이 거기에 쏠렸다.
셋째,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고백) 하였으니”(13) 지성과 마음과 의지가 수반된다는 말씀이다.
실로 히브리서 11장에서 강조되는 요점은 이 11장의 사람들이 고통받았던 방식이지만 즐겁게 고통을 받았던 방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행동을 수반하거나, 어떠한 것을 행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변화와 고백을 유발시키고 삶에서 증거가 드러나야 한다.
사도는 그 복음을 크게 높인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들만이 살 것이기 때문이다. 18절부터 시작하여 3장 20절까지 계속해서 어째서 이러한 자만이 살 것이라는 확신을 하느냐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이 대목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대목 중에 하나이다. 이 대목의 흐름과 논증과 진술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첫째,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복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속죄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을 그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대목을 이해한다면 복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즉시 복음을 환영하며, 삶의 나머지 부분을 살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인류 전체에 대한 역사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어, 성경에서 발견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요약이다. 또한 말세까지의 인간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보여준다. 구원에 관한 온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목적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역사이다. 인간 역사에 대한 바른 설명은 이것밖에 없다. 진화론은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무너뜨린 최고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진화론이 옳다면 어째서 세상이 이러한가?
셋째, 오늘날에 그 대목이 특별히 가치가 있다. 문명화라고 불리우는 것이 궁극적으로 볼 때 얼마나 무모하다는 것을 오직 유일하고 참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문명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삶이 거의 완벽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위대한 대목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기본적인 원리를 대면하게 할 뿐 아니라 세상이 어째서 그러한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며 놀라서도 절망해서도 안 된다. 복음 전도가 무엇이며, 복음전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통찰력을 바로 여기서 얻게 된다.
이 대목의 객관적인 분해) - 성경을 접근하고 연구하는 참된 방식은, 먼저 개괄적인 개념을 보고, 다음에 상세한 부분들을 고찰하고, 그리고 분석한 것을 통해서 드러난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다시 종합해야 한다. 성경은 마치 하나의 교향곡과 같다.
18절,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의를 대항한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한다. 그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된다.
19절-1장 마지막, 하나님의 진노가 유대인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의 경우는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공정한 것인가? 하는 그 반론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계를 통해서 필요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전혀 핑계댈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 이방인들이 그처럼 그런 삶에 버리움을 당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고 벌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2장, 도덕성에 대한 놀라운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다르지 않느냐? 문제는 사람들의 개념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깨닫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옳게 행하느냐가 문제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놀라운 생각에 관심이 없고, 여러분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릇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내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랑하시고 인애로우시며 용서하신다”. 이렇게 믿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는가? 문제는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떠한 효과를 가져 오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전체적인 삶의 태도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총체적인 관계로 판단 받을 것이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2:4).
2:17-마지막, 하나님께서 할례의 표를 주셨다는 사실, 모든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아닌가? 반론으로 곧 율법을 가졌다는 사실이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문제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2:28).
3장,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3:1) 구약 역사 전체를 다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행하신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가? 1-8절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유대인이 가졌던 이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시 자체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계시를 직접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린 아이가 그리스도인의 부모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아이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닌 부모들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보다 그리스도인의 부모들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10절부터는 이 성경 문제를 거론한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바로 그 율법이 그 유대인들을 정죄하였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19). 사도는 1:18절의 시작한 지점으로 되돌아 와서 마무리를 지어 말한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이 대목이 얼마나 엄청난 대목임을 알았다. 또한 이 대목이 시간세계 전체를 다 관장하고 있고, 인간의 전체 줄거리를 다 내포하고 있으며 이방인과 유대인들, 전 세계를 다 다루고 있다. 또 세상에 들어온 가장 위대하고 선한 좋은 소식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소식이라는 것을 확증해 준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그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하신 의에 관한 메시지요, 그 의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다 같이 주어진다. 바로 그 메시지를 바울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