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 (로마서강해7권26장, 강의안)

강대식 2015. 12. 7. 17:41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18)

 

진노’ -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하여 진노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과격한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성품에 있어 그러한 것이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진노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혐오를 뜻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께 구역질나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을 섞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루셔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뜻하는 바는, 죄를 보실 때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 죄를 다루시며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복음을 결코 증거할 수는 없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또한 증거할 수는 없다. 바울이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확한 병행을 이룬다. 여러분이 17절의 진술을 받아들인다면, 논리적으로 반드시 18절의 진술도 받아들여야 한다. 진노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만큼 나타났다. 실로 18절을 믿지 않는다면 17절의 진정한 필요성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나니” -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모든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시되 참으로 명백하고 분명하게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양심 속에서 나타난다. 모든 사람들은 악이 심판을 받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 속에 심어 놓으신 것이다.

 

두 번째, 죄의 귀추들은 이 점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어떤 법을 어기면 고통을 받는 자연법칙이 있다. 건강법칙을 잃으면 건강에 해를 입게 되어 질병과 고통을 겪게 된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즉각 고통스러운 귀추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도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한 부분이다.

 

세 번째, 피조계와 자연계의 모든 상태가 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이다. 피조계에 나타나 있는 가시와 엉겅퀴는 죄의 결과이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19-21)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네 번째, 죽음의 보편성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2:17)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를 나타내신다.

 

다섯 번째, 역사(성경역사, 일반역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을 보여주는 방식을 주목하자. 성경역사 속에서 아담과 하와가 받은 형벌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다. 양식을 위해 땀을 흘려야 했고,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과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되었다. 만약 그것을 떼어내버리려고 애쓴다면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홍수사건, 바벨탑,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울이 죄 때문에 어떻게 고통을 당했는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례를 보라. 그들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된다. 만일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을 밖으로 던지실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위대한 메시지이다.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운명도,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그들을 흩어버리셨으며, 지금까지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존재하고 있다. 일반역사에도 큰 문명의 역사를 읽어보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역시 그런 식으로 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도록 허락하셔서 그의 백성들을 훈련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위를 거역하여 일어날 때 그들을 내리치셨다.

 

여섯 번째, 죄에 대하여 진노를 퍼부으시는 하나님의 방식에는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가 그 귀추들을 거두도록 하신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1:4-5)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다. 예언서들도 오직 한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나를 들어라.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답게 행하고 있지 않다. 만일 너희가 계속해서 그러한 행실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만일 회개하고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고 다시 축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를 거스리는 원수를 일으켜 그 원수가 너희를 멸하게 하리라”. 그 선지자들의 교훈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벌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이 날에 대한 주제를 여러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의중은 그 모든 것보다 더 크고 더한 것,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나타남에 있어서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역사 중에 있었던 어느 일도 그 십자가의 사건에 버금가는 것이 없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시는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보시고 그냥 묵과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 주님께서는 고뇌하고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고통을 당하시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아셨기 때문이다.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다. 그 찌꺼기까지 다 마셔야 했다. 그것은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게 한 바로 그 진노를 체험하고 계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궁극적인 선언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간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노의 깊이에 대하여 어떠한 개념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진노를 죄에 대해서 퍼부으면서도 죄인을 멸망당하지 않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발견해내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다.

 

부활도 그점을 드러낸다. 부활은 세상이 의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선언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나타나야 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재판장이심을 선언하였다. 부활은 그러므로 이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교리헌장이다.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모든 예언, 그리고 재림 시의 심판에 대한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날에 속한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전체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은 바로 그 날을 고대하고 있다. 마귀들과 그 천사들은 다 회개치 않은 모든 죄인들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시는 날까지 유보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가두어져 있다. 홍수 전에 죄를 지었던 사람들, 베드로가 이른 바와 같이 옥에 있는 영들(벧전3:19), 그들이 모두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세계가 심판날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에 대하여 여기서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때로 그 심판의 진노가 연기 되어 뒤로 미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심판은 오고야 만다. 그것은 절대로 확실하다. 마지막 심판,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심판이 있게 되어 있다.

 

그 심판은 영원할 것이다. 성경에 보면 죽음 너머에 어떤 다른 기회나 소망이나 다른 찬스에 대한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의 면전에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뿐이다. 성경의 전체의식과 의미는 그 점을 명백하고 전혀 오해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하고 있다. 죄에 대해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는 육체적인 죽음 그 자체로서 나타나고 드러낸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죽음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의 메시지 처음부터 그것을 말하고 있다.

 

만일 경건치 않은 자들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우리가 이 다른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것은 토론의 문제도, 논증의 문제도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가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 함께 이야기 되고 선포된다.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러한 개념을 미워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도가 사람의 이성이나 사람의 이해나 혐오 등등에 좌우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의 의를 나타내셨듯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당신의 진노를 나타내셨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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