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마샬

[스크랩]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14강 복음이 이끄는 삶의 중요성과 유익

강대식 2015. 12. 12. 22:03

 

열네 번째 원리

복음이 이끄는 삶의 중요성과 유익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쁨의 삶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날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은혜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경건한 삶에서 떠나고 있다.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죄와 싸우다 지쳐서 경건한 삶을 포기하고 만다. 대부분 경건을 재미 없고, 우울하고, 손해 보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사는 삶은 경이로운 삶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정말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은혜로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히고자 한다.


이에 앞서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을 한 번 정리하고 상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지금까지 복음-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와의 연합과 사귐으로 들어가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죄책과 부패에 사로잡힌 본성적 상태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을 수 없고, 율법이나 자신의 공로로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좋은 소식이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까지는 선한 사람이 되려고 본성의 강물을 거슬러 가 봐야 아무 소용없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고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새 사람과 새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입는다. 이런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사는 것이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거룩한 삶은 신자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능력이나 육체의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아무런 선한 일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롬7:18).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선행에 대한 영광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든 목적에 부합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다(롬11:6, 사2:17, 겔36:21-23, 31-32).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최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전10:31).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거룩한 삶에 대한 교훈이 확증하는 복음 진리를 주목하라.

첫째,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성화는 거룩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원죄 교리를 확증해 준다. 여기서 원죄라 함은 아담의 죄를 통해 물려받은 죄책뿐 아니라, 인간 본성에 자리한 전적인 부패를 가리킨다. 중심에 자리한 이런 부패로 영적으로 선한 일에는 전혀 무능력하게 된 인간은 항상 죄로 치달아 사망에 이를 뿐이다(시51:5, 롬5:12)


많은 사람들이 원죄 교리를 부정한다. 사람들이 원죄 교리를 믿게 되면, 자신의 죄를 원죄 탓으로 돌리고 그 교리를 악용하기 때문이다. “원죄를 가진 연약한 인간인 이상 나도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원죄 교리가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원죄 교리를 부정해야 사람들이 선한 일에 열심히 참여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원죄를 부인하는 이면에 있는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결국 재앙으로 끝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원죄를 부정하고는 누구도 참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원죄 교리를 무서워하지 말라! 원죄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드높이는 교리다!


둘째,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성화는 예정 교리를 확증해 준다. 예정 교리 때문에 사람들이 거룩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교리를 부정한다. 예정을 믿는 사람들은 “이미 모든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내 노력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주장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룩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런 주장은 공허할 뿐이다. 선택 교리는 행위로 거룩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지, 은혜로 거룩을 추구하는 노력까지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롬11:5-6).


셋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성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이신칭의 교리에 부합하다. 이 위대한 복음 교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교리가 거룩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려 온갖 방탕하고 불경건한 삶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억지로라도 선한 삶을 살게 하려면 행위를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하는 조건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약 스스로 노력해서 그 삯으로 천국을 받을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진정한 칭의 교리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경건하게 만들려는 모든 전제와 노력을 무산시킨다! 바울은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는 성화의 방식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확증한다(롬8:1).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교리를 반대하는가? 일단 은혜로 구원을 받으면, 그 후에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칭의의 효력과 결과가 바로 성화다. 칭의를 주신 동일한 은혜의 샘에서 성화도 흘러나온다. 칭의와 성화는 동일한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성화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먼저 의롭게 되어야 한다. 칭의는 반드시 성화에 선행한다.


넷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확증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성도의 거룩이 자라가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거룩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참된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혔다. 그리스도 안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보화인 참된 거룩을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관없이 생각할 수 없다(고후13:5, 요일5:12, 요6:53, 고전1:30, 골3:11). 몸의 지체는 머리와 연합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모퉁이돌과 연락하지 않는 돌은 살아 있는 성전의 일부가 될 수 없다.


다섯째, 믿음으로 이루는 성화에 대한 가르침은 성도의 견인 교리를 확증한다(요3:36, 4:14, 5:24, 6:37, 10:23, 요일3:9, 살전5:24, 빌1:6). 영원한 안전을 가르치는 이 교리 때문에 사람들이 선한 일에 힘쓰지 않는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적인 능력과 육체적인 노력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함으로 선을 행하는 데 더욱 신중하고 담대하게 된다! 성도의 견인과 영원한 안전의 교리야말로 내가 아는 한 가장 위로 넘치는 교리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성화는 참된 거룩에 이르는 데 있어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식이다. 진실로 겸손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거룩을 위해 힘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다른 방식으로 거룩하게 살려고 할수록 오히려 죄를 더 불러일으키고 좌절만 더해 갈 뿐이다. 모든 시도는 기껏해야 비굴하고 위선적인 순종만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생과 슬픔으로 생을 마감했다(사1:11).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길이다(고후5:19, 엡1:7). 믿음으로 누리는 성화야말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성령께서 우리 삶을 거룩하게 하신다(롬8:5, 갈5:17, 벧후1:3-4).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고자 하는 새 마음을 받았다. 새 본성을 가진 사람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요일3:9).


복음은 경건의 기초를 제공한다. 복음을 통해 새롭게 된 우리는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을 받았다. 복음은 죄를 억제할 뿐 아니라 죄를 죽인다. 신자는 외적으로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도 깨끗해진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다.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이루신 일 덕분에 거룩한 삶을 산다. 여전히 남아 있는 옛 본성 때문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니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누리는 성화는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즐거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성화는 거룩에 이르는 아주 수월한 길이다. 복음 진리를 받고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이 길을 안다. 물론 이들도 때로는 자신의 많은 율법주의적인 생각과 행동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거룩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고 쉬운 길이요, 다른 길로 가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거룩한 길로 인도하신다(요일2:27, 요16:13). 율법주의자처럼 거룩에 이르기 위한 여러 생각들로 번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무를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오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성령과 더불어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성화-처음에 그 길을 들어서는 것은 어려울지 모르지만-가 가장 편하고 쉬운 길이다. 육체와 마귀는 우리를 겁주고 미혹하려 할 것이다.


자신의 절박한 필요와 무능함과 죄악을 진실로 깨닫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거룩이라는 선물은 너무나 즐겁게 다가온다!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기 위해 거룩을 얻으려고 실제 자기 몸을 율법으로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와서 취하라. 믿고 거룩하게 되고 구원을 얻어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더 얼마나 준비한단 말인가!(왕하5:13) 그리스도의 짐은 가볍다.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짊어지고 가시기 때문이다(마11:3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가는 거룩한 길은 평강의 길이다(잠3:17).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진노를 불러오는 율법을 따라(롬4:15) 겪을 수밖에 없는 양심의 두려움과 공포가 전혀 없는 길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행위를 조건으로 둘 때마다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에 대해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데, 신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를 보전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과 능력을 믿음으로 부여잡을 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이 모든 어려움을 막아선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자요, 우편에 그늘이 되신다(시121:5).


거룩한 여정으로 우리를 이끌고 위로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거룩한 길에는 희락과 평강이 넘친다(빌4:4-6).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어 누리는 거룩한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넘쳐난다. 모든 선한 일에 즐거움으로 참여한다. 거룩한 이 길을 가면서 하는 수고는 즐거움 그 자체다! 신자는 복음으로 새로워진 본성을 따라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길을 걷고자 하는 신령한 욕망으로 산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즐거움과 사랑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걷는 거룩한 길은 그 어느 길보다 존귀하고 고상한 길이다. 선지자 하박국도 이 생명의 길을 기뻐했다.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로 결심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능력으로 삼았다. 그렇게 했을 때 그의 발은 사슴의 발과 같이 되어 높은 곳으로 다녔다(합3:18-19).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는 믿음을 통해 거룩하고 존귀한 삶을 산다.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사는 신자의 삶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선하게 여기신다고 확신해도 좋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결코 이런 삶을 살 수 없다.


믿음으로 성결케 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게 행하고, 하나님과 영광스러운 관계를 누린다. 믿음으로 누리는 성화의 삶은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소중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믿음으로 걷는 성화의 길은 너무 존귀하고 보배로운 길이다(히10:19-20, 벧전3:18).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이 거룩한 길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로 값 주고 산 길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걷는 성화의 길은 선한 옛길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참된 무리가 걸었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걷는 성화의 길은 완전한 거룩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조만간 완전한 거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했다(엡4:13).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는 성화는 하늘에서 누릴 영화의 시작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영화롭게 될 때에라야 우리의 성화도 완전해진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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