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불경건과 불의" (로마서강해7권27장, 강의안)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죄는 율법을 어기거나 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은 두 돌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돌판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언급한다. 죄를 보는 첫 번째 방식은 경건치 않음으로 봐야만 한다. 율법의 첫째 돌판 중 어느 것을 어기더라도 그것은 경건치 않음의 범주에 들어온 것이다. 둘째 돌판은 우리의 행실을 다룬다. 보편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른 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실패하다면 그것은 불의이다. 사도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모든 불의라고 말할 때 첫째 돌판과 둘째 돌판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죄는 이 두 제목 아래로 다 포함시켜 말할 수 있다. 1장 나머지 부분은 이 18절의 강해라고 할 수 있으며, 경건치 않음과 불의의 문제에 있어서 인류가 어떻게 잘못을 범했는가를 강론하고 예증한다.
죄란 무엇인가?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 첫째는 두 가지 것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함께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들의 관계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아니면 자기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옳다고 상상하면서 자기들의 행실과 행위를 돌보지 않는 두 경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었다. 의인은 없는데 경건함이 있다고 하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둘째는 그 두 가지를 놓는 순서로, 경건치 않음은 언제나 불의보다 앞선다. 죄의 본질적인 진수는 불경건이다. 불경건은 어떤 모양으로나 형태로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미하기 위해서 사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보다 더 철저한 어떤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불경건이다. 우리의 최대의 노력은 언제나 모든 범사와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졌던 오직 유일한 관심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가르친다. 경건치 않음이 첫 번째 죄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기 전에 그들은 불경건의 오류에 빠져들었다. 사실상 불의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경건치 않은 것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의 태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옳다면 여러분은 어떤 특별한 범행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지었음을 깨닫게 하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불의보다 불경건을 앞에다 놓는 것이다. 로마서 1장 끝부분에서 그 무서운 죄악들에 대한 목록을 보면서 “나는 이러한 일들 중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긍휼을 베풀어달라거나 용서해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장시키고 있거나 비정상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을 말하는 류의 사람은 제일 우선적인 죄가 경건치 않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또한 그 자체가 벌써 가장 깊은 사망을 불러올 죄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이미 자기 자신을 닮은 신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경건치 않음을 떼어내고 불의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없다. 바울이 우리 모두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겪는 고통의 전체의 원인은 사람들이 이 순서와 이 추이관계를 망각하여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문제는 그동안 사람들이 ‘하나님 없는 종교(도덕성)’에 관심을 가져왔다는데 있다. 멋지고 세련되고 법을 준수하는 사회를 좋아하는 소위 선한 사람들이 가진 위험은, 이 하나님과의 사활적인 관계가 없이도 종교를 가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데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도움을 얻기 위해 교회를 요청한다. 그들은 “종교는 도덕을 산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바로 경건하지 않고 의로와 지려는 시도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갈망도 없이 공적인 예배를 즐길 수 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사회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냐?”라고 묻고 싶다.
저는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망각할 위험에 처하여 있다. 안타깝게 교회 내에서마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아들만 언급하는 ‘예수신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에 빠져있다.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자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다 하나님 아버지 중심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주관적이 되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난제들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구원을 일차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인도받는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어떠한 것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식이 결핍되고, 경외심, 거룩함이 적어지고, 경박함과 입심좋음 같은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잡혀지기까지는 다른 것들을 아무리 바로잡는다 해도 소용이 없다. 흥겨움이나 다정다감이 기독교적인 기쁨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나님의 거룩을 인식하는 것이요, 죄의 깊이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파멸된 인간들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피를 흘리신 사실을 인식하는 기쁨이다. 그것이 거룩한 기쁨과 감사를 유발한다.
요약하면 그러므로 이러한 바른 순서로 일들을 놓지 않는 한 참된 복음전도는 없다는 것이다. 복음전도의 일차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갖게 하는 데 있다.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에 실패하면 모든 이단과 다른 기구들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놓으신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십계명의 순서를 생각하라. 그러므로 복음전도도 같은 동일한 출발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