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1장 영국의 청교주의, 2장 교회원의 자격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신학자, 철학자, 설교자.
-형이상학자이며 칼빈주의자.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자, 18세기 부흥운동의 주역(조지 휫필드).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로이드존스, 청교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은 리차드 백스터의 전기를 읽은 데서 비롯. 그러나 그것에 대한 관심을 더욱더 부추긴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를 발견한 일.)
∎제임스 패커는 “가장 순수하고 가장 위대한 청교도”, “청교도 중의 청교도.”
∎에드워즈의 생애
-그는 키가 크고 수줍고 상냥한 사람이었으며, 강한 정신과 겸손한 심령의 소유자였다.
-가족 중에 부친과 외조부는 목사.
6살 때-그의 아버지와 네 명의 누나의 지도를 받아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
13살이 되기 바로 전 예일대학에 입학. 이미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숙달.
17살이 되기 바로 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
그 뒤 2년 후에 뉴욕에 있는 작은 장로교회의 목사가 됨.
1724년에 예일대학 교수가 됨.
1727년 노샘프턴 교회로 임명을 받아 조부를 돕게 됨(부목사).
1729년 솔로몬 스타다드의 사망, 그때부터 담임목사가 됨.
1734-1735년에 그리고 1740-1742년에 하나님의 성령의 놀라운 활동을 목격.
교회에서는 신도들의 입회 자격과 성찬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1750년 6월에 23년 재직기간을 끝으로 면직. (성찬 참여 교인의 필수 조건으로 외조부 스타다드가 폐지한 개인적 신앙고백을 회복시킬 것을 주장.)
1757년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으로 선출, 1758년 2월 16일에 정식 취임.
이어 2월 23일에 천연두 접종을 받았으나 3월 22일에 열병으로 사망.
∎저작 및 설교
“인간의 신뢰 속에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1731,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영혼에게 비추어지는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빛” 1734,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1737,
“진노의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 1741,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로 손꼽힘)
“영국 부흥운동에 관하여” 1742,
“종교적인 열정에 관한 고찰” 1745,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삶과 일기” 1749.(19세기 미국 사회에서 베스트셀러 중 하나)
∎“신앙감정론”, “의지의 자유”, “참된 미덕의 본질”-기독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저들.
∎제자인 사무엘 홉킨스는 1764년에 그의 설교집 18권을 편집하고 출판. 1774년 그는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인 “구속의 역사”를 출판.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총 27권 되는 전집을 발간.
*국내 부흥과개혁사 출판사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보여 주는 조나단 에드워즈 클래식(8권)
놀라운 회심 이야기/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균형잡힌 부흥론/종교적 감정론/기도합주회/
자서전,결심문, 일기/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참된 미덕의 본질.
-대표설교선집
-예일대 결정판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시리즈
신앙감정론/부흥론/구속사.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을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 3가지
첫째, 조나단 에드워즈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심의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글들은 물론, 철저히 이성적이며, 논리적이며, 철학적이지만, 최종적인 서술에 있어서는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내며, 그 스스로가 18세기의 합리주의와 인본주의와 이성주의에 맞서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지켜낸 저술가이기도 하다는 근거에서 그렇다.
둘째, 확실히 그는 체험적이며 경험적인 신앙에 그의 신앙과 신학의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길이를 온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자신의 죄악과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투쟁하며, 간구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만큼 영혼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한 사람이 있을까?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성의 사변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단연코 아니며, 하나님을 깊이 맛보아 아는 체험적이며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셋째, 역사상 가장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전인격적인 신학을 가진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오랜 시간 공부만 한 사람은 지성주의에 빠지기가 쉽고, 경험적인 체험만을 추구한 사람은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에 빠지기가 쉬우며, 변화된 실천과 운동만을 강조한 사람은 강압적인 행동주의로 치우치기 쉬운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에드워즈를 보면서 영적인 균형을 보게 된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체험과 뜨거운 가슴으로 영혼들을 섬기고 사랑했던 목회자이자, 날카로운 붓으로 알미니안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시대를 풍미한 대 학자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자신이 믿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의 기준과 교회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투쟁한 개혁가였다.
서론: 에드워즈 신학의 청교도적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청교도 제4 내지 제5세대에 해당하는 청교도 전통의 상속자였다. 이 장에서는 영국에서 청교도주의가 발생하게 된 시대적 배경, 또 영국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로 이주하게 된 이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 영국의 청교주의
순결한 교회의 개념
기독교가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성도답지 못한 사람들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도나투스 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점도 주름도 없는” 성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의 상징이었다. 이들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은 정통 기독교 사상을 지도하게 될 교회론을 계발했는데, 그에 의하면 두 개의 교회가 있었다. 하나는 순수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 얻도록 예정하신 모든 산 자, 죽은 자 혹은 장차 태어날 자들을 망라했다.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나 전적으로 순수하지는 않은 가견 교회였다. 그것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한 산 자들만을 포함했다. 그러나 가견 교회의 모든 회원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앙을 고백한다고 다 진정한 신앙,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비록 가견 교회가 전적으로 순수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고도 심한 악인들을 눈에 띄게 회개할 때까지 추방함으로써 순결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어거스틴은 인정했다. 후대 교회는 어거스틴의 이 원칙에 따라 교회원 자격을 제한하려 노력했다.
16세기의 종교 개혁 때에 많은 열심 있는 사람들은 기성 교회를 떠나 자기 자신들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 했다. 그들은 의식들(ceremonies), 혹은 교리, 혹은 직분자들 때문에 기성 교회를 떠났고, 또 어떤 이들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교회원 자격을 허락한다고 떠났다. 그 중에서 재세례파들은 다른 대부분의 개혁자들보다 교회원 자격에 대한 더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엄격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그들을 도나투스 파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영국의 가장 열렬한 개혁자들인 청교도들에 대해서도 퍼부어졌다. 사실 청교도들은 재세례파도 도나투스 파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원 자격에 대한 독특한 개념을 계발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가견 교회를 불가견 교회에 더 접근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국의 종교개혁
청교도의 기원은 12세기 알프스 골짜기에 살고 있던 발도 파(Waldness) 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이들의 교리와 행습이 훗날 영국의 청교도들이 채용한 것과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12세기의 개신교도들”로 불리기도 하는데 교리와 생활의 순결로 인하여 “순수파” 라는 의미의 “카타리(Cathari)" 파라고 불리기도 했다.
13세기에 발도 파는 박해를 피해 일부는 독일로, 일부는 영국으로 갔는데 후자의 경우 롤라드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어 그들의 교리를 영국인들에게 전파했다. 그 때문에 “롤라드 파(Lollard)”라 불렸고, 바로 이 때문에 영국의 종교개혁은 15세기의 롤라드 운동에 대중적 뿌리를 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0년대에 헨리 8세(1509년에 즉위)가 교황을 배격함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1534년에 수장령을 통과시켜 영국 교회의 모든 권력을 교황으로부터 왕에게로 이동시켰다. 그 때부터 영국 왕은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다.
1547년 헨리의 열 살 난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개신교도들이 궁중에서 실권을 쥐게 되었다. 영국 교회는 많은 로마 의식들을 제거했다. 신학자들의 위원회가 조직되어 예배를 검토하고 개혁했다. 그러나 로마 사제들이 직무를 수행할 때 입었던 의복들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청교도들은 그것들이 미사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것들로서 과시와 허풍을 위한 것이라고 경멸하며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다.
1553년 에드워드의 여동생인 메리가 즉위하여 영국을 로마에 되돌려 주자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개신교도들은 대륙으로 도피했다. 거기서 그들은 칼빈과 츠빙글리 그리고 부처의 라인란트 제자들로부터 개혁에 대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1558년,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즉위하자 영국인 망명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에드워드 치하에서 시작했던 일을 다시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온건한 개신교도들을 감독으로 임명하고, 1559년 “교회의 공동 기도문과 예배, 그리고 성례의 집행에 관한 통일령”을 공포하며, 교황주의자들보다 청교도들을 더 미워한다고 선언했다. 엘리자베스는 1563년의 39개 조항 속에 모든 개신교도들이 가장 불쾌하게 여기는 모든 의식들을 공식화하고, 감독들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국교회의 교리뿐 아니라 예전과 의식들에 대해 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비국교도 교회들 형성의 단초였다.
청교도들의 요구
청교도들은 꾸준히 그 수가 증가하면서 더 많은 개혁을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의 통치가 끝날 무렵까지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교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하고 싶었던 극단주의자들은 그것에 불만을 느꼈고 퓨리턴이라는 이름으로 조롱을 당했다. 1600년에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에 아직도 잘못된 90가지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 중에는 외경의 사용, 예전과 정형화된 기도, 어떤 시기에 결혼이나 육식을 금하는 것, 그리고 대감독제의 존재 자체, 그리고 교회가 인정하는 30여 가지의 다른 직분들에 대한 반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의 부패에 대한 목록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비성경적 의식들과 직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예배에 덧붙여진 인간적 의식들이 우상숭배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고 불평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베풀 때 십자가 표시를 긋는다든지, 성찬의 떡과 포도주 앞에 무릎을 꿇는다든지 등등. 특별히 후자는 청교도들을 분노케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황주의자들이 경배의 행위로 요구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경배의 대상은 떡과 포도주 속에 임재한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진짜 몸이었다. 즉 그 행위는 화체설이라는 가톨릭의 성찬론 교리와 직결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은 교회의 회원 자격에서도 부패를 발견했는데, 특히 성직자들에게서였다. 메리 치하 때 많은 영국 성직자들은 로마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했으면서도 공적인 회개를 하지 않은 채 개신교 목사가 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치하에서는 빈 성직을 고분고분하고 무능한, 그리고 평판이 나쁠 뿐 아니라 복음을 설교할 자격이 없는 자들로 메우고, 유능하나 비타협적인 청교도 설교자들은 배제하고 침묵시켰다.
청교도들은 설교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위대한 진리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주요한 수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설교로 교인들을 교훈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목사들(구두 제조공, 이발사, 양복 제단사 심지어 물동이 지는 사람, 목동, 말 지키는 자들)의 임명에 분개했다. 영국의 많은 목사들은 건전한 지식 대신 감정적인 유창한 언변을 일삼고 청중들을 웃게 만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거나 자신들의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혹은 고전들에 대한 지식을 늘어놓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볼 때 영국의 가견 교회가 불가견 교회로부터 너무나 멀어져 있는 것은 명백했다. 그들의 성경 해석에 의하면 교회는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권고하거나 질책함으로써 권징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범과자를 출교하게 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은 출교권이나 다른 권징권이 개 교회들과 목사들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 교회는 로마교처럼 감독들이 모든 권징권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교회들은 그런 범과자 같은 회원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감독들은 권징권을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 가지고 놀 듯했다. 악명 높은 도둑들과 간음자들은 풀어 주고 정직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 때문에 출교 당했고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만 처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개혁 방법론의 차이
모든 청교도들이 목표에 있어서는 일치했지만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견해가 달랐다. 대다수 청교도들은 기존 정부를 장악하여 그 정부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 내에서 권력과 지지를 획득하는데 열중한 나머지 하원의 의석을 차지하여 가장 발언권 강하고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하고도 잠재력 있는 무기인 출판이라는 수단에 의해 정부를 장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소수의 청교도들은 정부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방법이며 영국 교회는 로마교회처럼 개혁 불능이라 판단하고, 당장 새 교회들을 조직하여 무지하고 사악한 자들을 배제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이들은 메리의 재위 때 대륙으로 도피해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비테베르크에서 교회를 조직했었다. 그리고 영국에 남아 있던 어떤 개신교도들은 비밀 교회를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만나 설교를 듣고 성찬을 받았었다.
분리파 교회의 등장
1580년경에 로버트 브라운의 지도 하에 노리치에서 또 한 그룹이 형성되었다. 브라운은 영국 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공공연히 주장한 최초의 인물로 ‘지체 없는 개혁’이라는 책자에서 그는 정부가 교회를 개혁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을 비난했다. 비록 후에 자기 생각을 취소함으로써 분리주의자들의 배척을 받았지만 그의 이름이 분리주의 대명사로 남았다.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분리의 형제들(Brothers of separation) 이라 불렀지만 당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들을 브라운 파로 불렀다.
청교도 교회론
비록 수는 적었지만 분리주의자들은 청교도들의 교회론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분리파들은 자신들의 두 가지 근거에서 자신들의 결정을 변호했다. 첫째, 영국 국교회는 그들이 교회의 본질적 요소라고 생각하는 사항인 권징, 즉 무자격자들을 교회로부터 제거하는 권한을 결하고 있었다. 영국 교회가 권징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은 청교도의 대적들조차도 대부분 시인하는 바였다. 청교도들이 증명해야 했던 것은 권징이 참 교회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분리파들은 자기들의 사상의 공급자인 대륙의 종교개혁자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예를 들어, 존 칼빈은 비록 권징에 대해 언급은 했지만 교회의 본질적 표지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라고 강조했었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비록 권징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존재하며 분리는 교회를 찢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가 권징의 시행에 너무 심하게 실패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권징에 더 많은 강세를 두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청교도들은 권징이 아주 바람직한 것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분리파들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리의 설교나 성례의 거행 이상의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교회가 권징에 의해 그 자신의 과오를 시정할 권한이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스스로를 완전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견 교회가 흠이 없을 수는 없음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어떤 심각한 죄를 시정할 수 없거나 그것을 시정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둘째, 영국 국교회는 합당한 사람들에 의해 합당한 방식으로 설립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진정한 교회였던 적이 없었다. 배로나 브라운이나 모든 다른 분리파들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으로 시작되어야 했다. 그것은 믿겠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며 교회의 권징에 복종하겠다는 사람들만을 포함해야 했다. 정부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선량한 자들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서만 교회는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메리가 죽은 후 가톨릭이고 개신교도고 할 것 없이 도매금으로 몽땅 교회에 쓸어 넣었다고, 엘리자베스 때는 모든 영국인들이 정부의 반포에 의해 자동적으로 새 영국 국교회의 회원이 되었다는 것). 이런 영국 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분리파들의 주장의 두 번째 근거였다.
그러므로 아래로부터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것 외에는 영국 교회를 분리파들이 성경적이라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교회로 개혁할 길은 없었다.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사악한 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만든 자발적 계약에 의해 진정한 교회를 수립해야만 했다.
제임스 1세의 종교 정책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영국 왕으로 등극하여 제임스 1세가 되었다. 그는 본래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였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기대를 가지고 그의 즉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의 억압적인 조처들에 의해 박살나고 말았다. 제임스는 800 내지 900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청원서를 한 장 받았다. 내용은 감독제를 폐지하고 교회의 가톨릭적 의식들의 잔재를 청산하며 권징에 있어 경건한 개혁을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왕은 국교회에 대한 자신의 애착과 집착을 선언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청교도들은 재판을 받고 정죄 당했다. 그리고 국교회의 교리들과 권징을 왕국 내에서 용인되는 형태로 선포하면서 모든 백성은 그것에 순응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감독 없이 국왕 없다”고 외치면서 청교도들에게 더 이상의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하여 1605년 약 300명의 목사들이 서명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설교 금지를 당하고 자기들의 교구에서 쫓겨나거나 처벌을 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출교 및 투옥을 당했고 일부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교회의 철저한 개혁을 기대하던 청교도들은 이러한 불관용의 조처들하에서 두 파로 나뉘어졌다. 한 파는 레이놀드 박사를 비롯한 순응주의자들이요, 다른 한 파는 뒷날 뉴잉글랜드로 떠났던 사람들을 비롯한 비순응주의자들 혹은 비국교도들이었다. 1608년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대로 예배할 자유를 찾기 위해 영국으로부터 도피해 화란으로 이주했다.
제 2장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교회원 자격 요건
가견적 성도
영국 청교도 분리파들의 불평의 이유 중 일부는 부적절한 의식들과 직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끈질기게 비난했던 것은 영국 국교회가 적합지 않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영국 교회는 국가의 모든 시민이 곧 교회의 회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참 교회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들의 불만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영국 교회의 소위 신자라고 하는 이들 중 다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헌신한 적이 없었다. 즉 복음에 자발적으로 순복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계명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교구 안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구교회의 회원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행위나 신앙이 아무리 불경건해도 교구 교회는 그들을 축출할 힘이 없었다.
분리주의자들은 오직 공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이 인식되는 사람들로만 교회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탈퇴해서 자기들 자신의 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누가 거기 속할 자격이 있고 누구는 그것이 없는가를 정하지 않고서는 교회를 설립도 유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회원 자격의 표준을 설정했다. 회중교도들의 첫째 전제는 인간의 공로는 무시해야 하며 구원은 오직 믿음에 달려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에서 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가견 교회를 불가견 교회에 근접시키려 했기 때문에 가견 교회가 그 회원을 받을 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표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표시가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이 구원한 자를 아신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평가를 내리려 해야 하며 교회가 받아들이는 모든 후보들에게서 믿음의 개연성을 확실히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초의 분리파 교회들에서 회원 후보자들에게 분명히 요구하던 유일한 조건은 계약에 대한 동의였다. 즉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그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에 다른 회원들과 함께 참여하기로 동의하는 것이었다. 어떤 교회들은 이 동의에 영국 교회와의 관계를 분명히 끊겠다는 선언을 포함시켰다. 1554년 여왕 메리의 통치로부터 도피한 청교도 망명자들에 의해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교회는 입교의 조건으로 교회에 대한 복종과 선한 행실의 약속뿐 아니라 신앙 고백을 요구했다. 이 때의 신앙 고백은 이단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교회의 교리에 대한 동의에 관한 진술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회원이 될 수 있는 조건
신앙이나 신조의 고백은 영국 교회와 가톨릭 교회에서 예배 순서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그러나 분리파 교회들에서 요구한 고백은 단지 의식이나 주어진 본문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었고, 기독교 교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강조했다. 즉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후보자의 진술뿐 아니라, 그것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포함했다. 따라서 목사들, 장로들 그리고 회원들은 후보자가 신앙 고백을 할 때 그가 자기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다.
신앙 고백에 필요한 이해는 목사의 설교를 들음으로써 누구나 획득할 수 있었다. 1606년에 암스테르담에 설립된 분리파 교회의 목사인 존 스미스는 교회원 자격을 다음의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순종에 의해 증명된 믿음, 둘째, 여기서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교리적 지식을 말함, 셋째, 순종이란 경건하고 의롭고 근신하는 삶을 의미함. 요컨대 분리파들이 요구했던 것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지식과 그것의 수용, 선한 행실, 그리고 교회의 권징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었다. 이것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떠났던 필그림들의 생각과 실천이었다.
1630년대의 어느 시점에 뉴잉글랜드의 새 교회들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테스트함으로써 교회 회원에 제한을 가하는 방식을 계발했다. 남자들은 신앙 고백을 하고 전 교인이 모인 자리에서 은혜의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을 진술했고 여자들은 사적인 글로 증언을 기록하여 목사가 그것을 공중 석상에서 낭독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받았음을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지를 묘사해야 했다. 입교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장로들을 찾아가서 자신의 지식과 종교적 체험에 대해 면접을 했다. 지식이 없음이 명백하고, 은혜가 없거나 행실이 나쁜 사람은 즉시 그 자리에서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면접이 만족스러우면 장로는 그를 교회에 천거해서 회원들로 하여금 그에게 질문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러한 심사가 끝나면 몇 사람의 회원들이 집회 중에 그의 선한 행실에 대해 증언한다. 그 다음, 그는 자기 영혼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보통 그는 15분 동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자신에게 임한 방식에 대해 진술해야 했다. 이 체험에 대해 회원들은 그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체험이 진짜임을 모두가 확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대다수가 이 진술에 만족하면 후보는 신앙 고백을 해야 했다. 그것은 그가 믿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의 발표였다. 그 뒤 회원들이 후보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투표했고 거기서 통과되면 장로가 그에게 교회 계약을 제시했고 그는 그것에 동의함으로써 회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