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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라일, "거룩", (2016 수정 강의안)

강대식 2016. 1. 2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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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일, 거룩, 장호준역, 생명의말씀사, 복있는사람, 2009

 

로이드 존스의 추천의 글

 

거룩을 주제로 한 이 위대한 책을 새롭게 출간한 것에 대해 누구나 고마워할 것이다. 20여년전 헌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읽으면서 누렸던 영적 정신적 만족감을 저는 도무지 잊을 수 없다. 그의 설교는 항상 성경 말씀과 더불어 시작하고 말씀을 풀어간다. 라일 주교는 17세기의 위대한 청교도들이 파 놓은 샘물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의 독자가 아주 쉽게 읽은 수 있는 현대적 형태로 주어진, 참된 청교도 신학의 정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머리말

 

이 설교들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거룩의 원천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가 얼마나 풍성한지알기를 바란다.

 

이 땅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처참할 정도로 낮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실천적 거룩에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간이 갈수록 더 분명히 깨닫는다. 미국의 천막 집회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종교적 감정이라는 현상을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여자들이나 생소한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연설, 큰소리로 부르는 노래, 열기에 찬 방, 사람들로 꼭 찬 천막,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에서 받는 강렬한 반(semi)종교적 느낌들,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모임, 공개적인 신앙 간증 등 이 모든 것이 당시에는 매우 흥미롭고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정말 분명한 근거와 실체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집회에 참여했던 사람이, 가정에서도 이전보다 더 거룩하고, 온유하고, 욕심이 없고, 애정이 넘치고, 친절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었는가?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들에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는가? 요란스럽고 흥분을 일으킬 만한 것이 없이도 고요한 은혜의 방편을 누리고 차분한 주일을 보내고 있는가?

 

가정이나 혼자만의 은밀한 곳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일관되게 남아있는 것보다 공적인 모임과 장소에서 서로 마음이 맞는 그리스도인끼리 노래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후자는 은혜가 없어도 본성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전자는 은혜가 없이는 될 수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5:12)조차 알지 못하면서 성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87910. 스트래드브로크에서 J. C. 라일

 

서 론

 

성화는 칭의만큼이나 중요하다. 개신교가 아무리 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해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가르침을 거짓되고 공허하다고 멸시하고, 급기야 기독교 신앙 자체를 싫어한다. 우리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거룩이라는 주제는 바른 기초 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미숙하고 부당하고 편향된 주장으로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지침을 이 시대를 향해 던지는 거룩에 관한 경고라고 생각하시기 바란다.

1. 성화 교리를 다루는 많은 사람들이 회심한 사람의 거룩은 개인적인 노력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대담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데, 과연 이런 주장이 지혜로운 것인가?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거룩의 뿌리이다. 거룩한 삶의 첫걸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갖기 까지는 한 톨의 거룩도 거둘 수 없다.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거룩한 삶의 시작일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이어가는 비밀이다. 하지만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거룩을 위해서는 믿음뿐 아니라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고 말했던 사도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자신이 싸운다”, “달음박질한다”,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고전9:26,27)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도 하고(고후7:1), “힘쓸지니라고도 하고(4:11),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리자고도 한다(12:1).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거룩하게도 할 것이라는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은혜이다(4:5). 하지만 성결하게 하는 믿음은 삶으로 역사하는 은혜이다. 이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고”(5:6), 시계태엽과 같이 속사람 전체를 움직인다.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는 말은 지극히 바르고 성경적이지만, “믿음만이 거룩하게 한다는 말은 그렇게 바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의롭게 되었음을 사람 앞에 가시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은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2:17).

 

2. 산상수훈이나 사도 바울이 쓴 대부분의 서신들 후반부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에서의 거룩함에 대한 많은 실천적인 권고를 약화시키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스스로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날마다 자기를 구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에 힘써야 한다. 신약성경은, 양심을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감정을 상하게 하지도 못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 이상의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일상에서 거룩함을 빚어내는 특정한 요소와 세부적인 권고를 신자에게 분명하고 온전하게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참된 거룩은 단지 믿음과 느낌의 문제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함과 수동적인 은혜가 우리의 행함과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참된 거룩은 우리의 말과 성품, 본성적 필요와 성향을 통해 그리고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 통치자와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오래전 경건한 저자들은 이 모든 문제를 원론적인 언급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고, 더 깊이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사람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3. 모호하고 막연한 말로 완전을 이야기하고, 전혀 근거 없는 거룩의 표준을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양 그리스도인을 다그치는 것이 지혜로운가? -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가고(고후7:1),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6:2), “온전하게 되라”(고후13:11)고 권면하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생각이나 말, 행실, 태도로 짓는 죄로부터 완전하고 흠없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문자적인 완전을 가르치는 구절은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후손 가운데 이 세상에서 그것을 얻은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신령한 빛을 더 누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와 불완전을 항상 절감했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일수록, 더 큰 겸손으로 허리를 동였다”(벧전5:5).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많이 사용하고 있는 완전과 관계된 말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죄의 본질이나 하나님의 성품, 자신의 마음, 성경, 용어의 정의 등에 무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있지도 않는 이런 가르침은 한 마디로 위험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4. 로마서 7장의 내용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아직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나 연약한 초신자의 경험이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이 문제는 사도 바울이 서신을 기록한 이래로 1,800(2,000)년 동안 논란거리였다. 존 웨슬리나 찰스 웨슬리, 존 플레처까지도 사도 바울 자신의 현재 경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로마서 7장 기록은, 모든 시대의 성숙한 성도들이 자기 경험을 기록해 놓은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히려 이 기록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연약한 신자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사의 탁월한 주석가들 대부분이 한결같이 로마서 7장을 성숙한 신자의 고백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5.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교리를 말하는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과연 지혜로운가? 이 교리가 성경에서 의도한 것 이상으로 높아져 있지는 않은가? -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하나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로운 연합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이 다섯 군데 있다(8:9-10,2:20,4:19,3:17,3:11). 우리는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일을 해 가신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명확하고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의미를 넘어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내주하심을 말할 때는 그 의미를 더욱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게 된다(요즘 내재 신론이나 우주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뉴에이지적 신비사상은 같은 류이다-요약자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천국에도 계시고, 두세 사람이 그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머리와 대제사장 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재림 때까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고, 그분이 떠나시면서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을 통해 지금도 그분의 백성 마음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5:2^). 로마서 8:9-10을 보면 확연하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사도 요한의 말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3:24).

 

새뮤얼 러더퍼드의 <영적인 적그리스도>를 보라.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두 세기 전에 극단적 이단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반율법주의와 광신주의의 가장 악독한 형태로 변해갔다. 이 끔찍한 오류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같은 말씀을 무리하게 푸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든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자는 죽어서 이미 장사되었고 그리스도만이 그들 안에 살면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육신의 안락함만을 구가하고, 아무 거리낌 없이 죄를 짓기 시작했다! 왜곡되고 과장된 진리는 가장 위험한 이단들의 어미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회심과 성별 또는 회심과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본다.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죄인, 회심자, 성도의 세 부류로 나눈다. 오늘날 현대 교사들도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회심하지 않은 자, 회심한 자, 완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더 높은 수준의 삶에 도달한 자의 세 부류로 나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성경은 항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산 자와 죄 가운데 죽은 자, 신자와 불신자. 회심한 자와 회심하지 않은 자, 좁은 길로 가는 자와 넓은 길로 가는 자,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만 나눈다. 그러나 각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와 은혜의 정도는 다르고 다양하다. 그러나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한 승강기인데 서 있는 높이가 다른 것에 불과하다.

은혜는 정도마다 큰 차이가 있고 영적인 삶은 항상 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은혜 안에서 자라기 위해 항상 힘써야 한다. 성별이 없는 회심이 있는가!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신자에게 촉구하는 사람은, 성경이 새 생명, 새 창조, 영적인 부활이라고 일컫는 위대한 처음 변화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주장을 듣다 보면, 이들이 말하는 성별되는 때가 바로 이들이 처음 실제로 회심하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옛길을 따르겠다(6:16). 몸과 마음과 영혼을 그리스도께 성별하고 더욱 헌신함으로 은혜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할 가능성과 앞으로 전진해야 할 절대적 필요를,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역설하는 편이 더 지혜롭고 안전하게 보인다. 대부분의 신자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거룩과 하늘의 기쁨을 이 땅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두 번째 회심을 가르치는 것은, 겸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짓누를 뿐 아니라, 경박하고 무지하고 자기를 속이는 사람을 부추겨 아주 위험한 상태에 이르게 한다.

7. 신자에게 죄와 씨름하고 싸우기보다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가? -

신자의 의무로서 너희 자신을 드리라고 하는 표현은 신약성경 단 한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6:13-19, 6절에 걸쳐 총 다섯 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 자신을 타자에게 수동적으로 맡기라는 의미는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섬김과 유익과 소용이 되게 하라는 것을 알 수 있다(12:1).

더구나 신약성경의 서신서 전체를 통틀어 서른 군데 정도에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할 책임이 있고, 이 일을 위해 개인적인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거룩한 침노, 갈등, 전쟁, 싸움, 군사의 삶, 씨름 등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언급한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사실인 칭의와 성화를 계속해서 혼동한다. 칭의를 통해 사람에게 요구할 말은 믿으라, 그저 믿기만 하라는 것이고, 성화를 통해 요구할 말은 깨어 기도하고 싸우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성경에 무지하고, 따라서 신앙도 견고하지 못하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닐 수밖에 없다(4:14). 아테네 사람들과 같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우리 조상들을 통해 다져진 것에는 병적인 염증을 느낀다. 현대적인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자신이 듣는 것이 과연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선정적이고,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가르침을 끊임없이 열망한다.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벧전3:4)과는 전혀 상관없고 영적으로 술 취해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과장된 찬양으로 쉴 새 없이 감정을 자극해 주고, 감정에 격해 큰소리로 울 수 있는 군중집회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다. 교리의 차이를 전혀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무지가 팽배해 있다. 설교자가 똑똑하고” “열정적이기만 하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런 것에 문제라도 삼으면 이내 여러분은 편협하고 관대하지 못한사람으로 여겨질 뿐이다!

 

거룩에 자라기 위해 힘쓰는 모든 사람은 성경을 더욱 균형 있게 읽고, 교리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분발해야 할 것이다(16:19).

 

 

 

 

 

 

 

 

 

1

 

죄는 불법이라”(요일3:4).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교회를 통틀어 가장 부족한 것이 죄에 대한 분명하고 온전한 가르침이다.

 

1. 죄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계층과 지위, 이름과 나라, 백성과 방언을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드리워진 엄청난 도덕적 질병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법에 완벽히 합치하지 않는 모든 상상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이다. 죄에는 행함으로 짓는 죄와 행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간과함으로 죄를 짓는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25:41-42). 어셔 대주교는 숨을 거두며 기도했다. 주여,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되, 특별히 내가 하지 않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 하소서”.

 

2. “는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이다.

인간의 죄악됨은 밖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비롯되었다. 어렸을 때 교육을 잘못 받아서가 아니다. 나쁜 친구들이나 그릇된 본보기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죄는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과도 같다. 우리 모두는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5:1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3:6),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8:7),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도 천사같다고 하지만, 어린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 키와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그 속에 속임과 악한 성향, 이기심, 방자함, 완고함, 탐욕, 시기, 질투, 정욕의 싹과 조짐을 보게 될 것이다.

 

3. “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이다(6:5). 우리의 모든 사고와 정서, 추론의 능력과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죄로 오염되었다. 양심조차도 확실한 안내자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워져 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역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요컨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1:6). 공손함과 예의 바름, 점잖은 매너, 단정한 몸가짐,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게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많은 고상한 기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예술과 과학과 문학 등에서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서”,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 지식과 사랑과 경외함이 없다. 인간은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다.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그러나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지만 육체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는다.

 

4. 죄책과 죄의 악독함과 무례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수 없다.

본질상 유한한 인간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거룩하고 온전하신 분의 목전에서 죄의 악독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시며(4:18) 행실뿐 아니라 중심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시고,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는분이다(51:6). 죄 가운데 태어나 끊임없는 불완전과 우둔함으로 죄인들과 더불어 살다가 이내 사라질 피조물인 우리가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이해해 본들 그것은 너무나 불완전할 뿐이다. 우리는 죄를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대속과 속죄에 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됨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만 온전히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죄책은 끔찍하리만큼 사악한 것임에 틀림없다.

 

5. 우리는 죄의 기만성을 간과하기 쉽다.

죄를 대할 때, 우리는 실제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난 죄의 모습보다 한사코 덜 심각하고 덜 위험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죄를 과소평가하여 변명하고, 죄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죄는 가롯 유다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찾아온다. 요압과 같이 두 팔을 벌리며 아첨하는 말로 다가온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는 하와의 눈에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했지만, 이 실과 때문에 그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다. 궁전 지붕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 다윗에게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로 간음과 살인이 따라 들어왔다.

처음부터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사악함에 세련된 이름을 붙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나는 그 본질과 성향까지 바꿀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3:13).

빛에 이를수록 더 많은 죄악을 보게 되고, 천국에 가까울수록 더욱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교회사의 위인들을 보면, 브래드퍼드나 러더퍼드, 맥체인 같은 탁월한 성도들은 항상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 아무리 죄가 넘쳐 난다 해도, 은혜는 더욱더 넘쳐 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을 통해서 은혜가 넘쳐 난다.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언약의 중보자를 통해서 넘쳐 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 넘쳐 난다. 자기 백성의 마음에 보내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시고, 옛것은 다 지나가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넘쳐 난다. 죄를 죄대로 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누구도 낙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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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 교리에서 오늘날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한다.

1)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우리 시대에 만연하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막연하고 몽롱한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에 대해 가르치기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그릇된 신앙을 고치고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은, 죄의 죄악됨에 대한 성경의 옛 가르침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옥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는 결코 천국을 향해 결연히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순례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이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이며(딤전1:8),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3:20, 7:7). 율법의 요구들을 앞세워 사람이 귀 기울이게 해야 한분명히 밝혀서 그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나타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이 취하셨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잠시 예수께로 나아와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내 그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2)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요즘 유행하는 터무니 없이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교리와 신조를 거부하고 신앙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현대 사조의 경향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진리이고,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옳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멸망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구원에 이를 것 같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속죄, 마귀의 인격성, 성경의 기적, 미래에 있을 심판의 영원성과 실재성 같이 중요한 신앙의 주춧돌이, 현대 과학과 보조를 같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겨져, 기독교라는 배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편들기라도 하면, 여러분은 이내 편협하고, 교양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적 골동품 정도로 취급받을 것이다!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인용해 보라. 그들은 유대인의 책 한 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도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되어 왔다고 반박할 것이다! 죄의 본질, 죄의 실재성, 죄의 악독함, 죄의 권세, 그리고 죄책에 대해 쉬지 않고 언급하는 것만이, 현대의 이런 역병에 대한 처방이다.

 

3) 영국 전역을 홍수처럼 휩쓸며 많은 것들을 쓸어가 버린 감각적이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 또한 죄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양심이 온전히 일깨워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 체계가 다소 매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양심에 각성이 일어나면, 우리는 오감에 호소하는 의식적인 기독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허망한 종교적 행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이 죄의 본질과 악독함과 죄악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고 분명히 알았다면,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생겨난 반()가톨릭적 교회들의 5분의 4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 요즘 회자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이론들에 대한 해결책도 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다. 우리의 가장 탁월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우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땅히 경외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 기도할 때조차도 불완전한 것 투성이다. 마귀와 세상과 육체에 대해도 싸워야 할 만큼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솔직히 고백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5)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개인의 거룩에 대한 저급한 견해에 대한 좋은 해결책은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수준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좁고 깊었던 길이 넓고 얕은 길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많은 사람을 얻었지만, 질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엄청난 부의 증가로 세속성과 방종, 안락함에 대한 추구가 만연하게 되었다. 한때 사치로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기부인과 고난 받는것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딤후2:3). 우리의 관심이 분산되고 영적인 삶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정통 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매일의 경건생활을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겸손과 성찰이다.

 

이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죄의 본질과 죄악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적인 의식을 빌려 오지 않아도 되고, 참회 제도를 다시 회복시킬 필요도 없고, 수도원주의나 금욕주의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순수하게 회개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첫 번째 원리인 옛길로 돌이켜야 한다(6:16).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리하고, 하나님 목전에서 죄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부주의하고 안이하게 세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동시에 복음주의 교인이라 자처하며 복음주의 원리들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단 죄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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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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