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 1 부 에드워즈의 출생과 형성

강대식 2016. 1. 28. 09:44

제 1 부 에드워즈의 출생과 형성

제 1 장 가계와 가정적 배경


에드워즈의 조상들

에드워즈의 조상들은 뉴잉글랜드에 가장 먼저 정착한 주민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토머스 후커 목사를 따라 뉴잉글랜드로 이주했던 사람들 중에 앤 코울즈 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본래 1620년대 런던에서 목사요 교장으로 일하던 리처드 에드워즈의 아내였는데, 남편 리처드가 1625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제임스 코울즈라는 남자와 재혼해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전 남편 리처드 에드워즈와의 사이에 태어났던 아들 윌리엄이 있었는데 아직 18세 밖에 되지 않은 관계로 그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이주했다. 바로 이 윌리엄 에드워즈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조부가 된다. 이 윌리엄으로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부가 되는 리처드가 1647년에 출생했다.


에드워즈의 부모

조나단의 아버지 디모데는 당시 뉴잉글랜드의 유일한 고등 교육 기관이었던 하버드 대학 출신이었고, 재학 중에 장차 그의 아내가 될 에스더 스타다드를 만났다. 스타다드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최고 명문가들 중 하나였다. 에스더의 부친 솔로몬 스타다드는 1669년에 매사추세츠의 노샘프턴에서 목회를 시작했는데 노샘프턴 교회 강단은 뉴잉글랜드 전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강단들 중 하나가 되었다. 조나단의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는 에스더와 결혼한 지 8일만에 이스트 윈저 교구 목사로 부임했는데(61년간 목회) 당시 디모데의 나이는 25세였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독자로 태어난 것은 1703년 10월 5일이었다. 위로 누나 4명, 아래로는 여동생 6명 있었다. 자매들은 모두 6척의 장신들이어서 사람들은 디모데 에드워즈의 “육십 척의 딸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유년기의 경건 훈련과 종교적 체험

조나단 에드워즈는 체험적 신앙인이었다. 그의 신학도 대부분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 체험은 성경의 말씀에 의해 지지를 받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지만 에드워즈도 자기 시대와 사회의 아들이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교회사에서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구원 문제 해결, 즉 “회심의 체험”을 자기 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드워즈는 어릴 적부터 구원의 확신을 획득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유년기에 두 번의 주목할 만한 각성을 경험했다. 그의 「개인적 진술」(37세 때 쓴 영적 회고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유년기부터 나의 영혼에 대해 이런저런 염려와 시도를 해 왔다.” 그의 첫 번째 각성 경험은 대학에 입학하기 몇 년 전(그는 13세에 대학에 입학했으므로 아마도 10세 전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의 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각성이 일어났을 때였다(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분위기나 환경이 어린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발견한다). 그 때 그는 여러 달 동안 크게 감동된 상태에서 종교적인 일들과 자기 구원 문제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종교적 의무를 행했다. 그는 하루에 무려 다섯 번씩 은밀한 기도 시간을 가졌고 다른 소년들과 종교적 대화를 나누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었으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제2장 예일 대학 시절


예일 대학

18세기의 처음 십 년 동안 뉴잉글랜드의 고등 교육은 중요한 변천을 겪게 된다. 본래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들의 비전은 “모든 이들이 자기 삶과 공부의 주된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 에드워즈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러한 비전은 대다수 학생들에게 공허한 구호로 들리고 있었다.

이에 하버드 대학이 과연 청교도적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한지를 의심하기 시작한 코네티컷의 지도적 목회자들은 1701년에 예일 대학을 설립했다. 그러나 일이십 년도 채 지나기 전에 과학, 논리학 및 윤리학 교과서들이 데카르트, 뉴턴 및 로크에 의해 창안된 새로운 사상 세계를 반영하기 시작함에 따라 신학은 그 빛이 바래지기 시작했다.


예일 대학에서의 교육

1716년, 예일 대학에 입학한 조나단은 문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고대사, 산수, 기하, 천문, 형이상학, 윤리학, 자연과학을 배웠다. 그 외에도 그는 성경을 원어로 읽기 위해 헬라어,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동시에 고대 헬라 문학과 철학서들을 읽기 위해 고전 희랍어를 배웠다. 1720년, 에드워드는 수석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낭독했다. 그가 아이작 뉴턴과 존 로크의 소위 “신학문” 저술들을 발견했던 것이 그 무렵이었다. 에드워즈에 대한 뉴턴의 영향은 “세상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같은 그의 다양한 과학적 논문들에 표현되고 있다. 또 이신론의 오류들을 폭로하는 글들에서 에드워즈는 뉴턴을 간접적으로 활용했다.


존 로크에 대한 에드워즈의 관계, 20세기에 들어와 청교도 연구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고 평가받는 페리 밀러 교수는 에드워즈가 1690년에 처음 출판된 로크의「인간 오성론」을 읽은 것이 그의 인생에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후일 그의 제자 새뮤얼 홉킨스는 에드워즈가 로크의 책을 읽으면서 얻었던 기쁨이 “가장 탐욕스런 광부가 한 줌의 금과 은을 발견하고 얻는 즐거움보다 더 컸었다”고 말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에드워즈의 관심은 대부분 지식에 대한 로크의 이론, 즉 경험주의 혹은 로크가 감각주의라고 즐겨 불렀던 것을 중심으로 맴돌고 있었다. 이 이론은 사람의 모든 지식이 감각들 혹은 경험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서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논의는 부분적으로 로크의 오성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석사 과정에서의 신학 수업

대학 졸업 후 에드워즈는 문학 석사 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2년간 예일 대학에 더 머물렀다. 그는 청교도와 개혁주의 학자들, 즉 존 칼빈, 존 오웬, 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에임즈, 존 플라벨, 밴 매스트리히트, 리처드 십스, 맨튼, 챠녹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책을 계속 읽었다. 취향과 기호에 있어 그는 철저한 청교도였다.


칼빈주의에 대한 공부와 헌신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알미니안주의를 경계하게 했다. 실상 그의 많은 글들과 설교문들은 알미니안주의의 오류에 초점을 맞추고 그 영향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쓰였다. “구속의 사역에서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이라는 설교와 “의지의 자유”는 특별히 그러한 의도로 집필된 것들이다.


대학 시절의 영적 상태

대학 시절, 에드워즈는 때때로 내적으로 아주 불편한 상태에 있었다. 대학 졸업반 때, 그는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 많이 불안해 했다. 그 무렵 늑막염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함으로 “지옥의 문턱까지 가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에서 회복되고 얼마 안 지나 그는 다시 과거의 죄악 된 삶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버려두시지 않았다. 그는 크고 격렬한 내적 투쟁을 겪으면서 사악한 성향들, 거듭되는 결심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맹세들과의 갈등을 거쳐 드디어 “과거의 모든 사악한 생활과 모든 알려진 외적 죄들을 버리고 구원의 추구에 착수해서 종교적 의무를 행하게 되었다.” 10대 후반에 에드워즈는 구도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나는 내 구원을 추구하는 것을 내 생애의 주된 과제로 삼았다.” 그는 드디어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얻기 위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결별하는 영”을 느꼈다. 에드워즈는 이 때 이미 세상의 매력 있는 것들에 대한 정욕을 극복하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 같다. 오직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진입했던 것이다. 에드워즈가 뉴잉글랜드 청교도식의 회심을 체험한 것은 예일 대학 석사 과정 2년차인 1721년이었다.


제3장 일기와 결심문들

에드워즈는 20세가 되기 직전 자신의 평생의 지침으로 70가지를 결심하고 기록해 두었다. 그것이 유명한「결심문들」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기록해 둔 그 결의들을 잊지 않고 “매주 한 번씩 읽기”로 다짐했다.

일기를 쓰는 것은 청교도들의 전형적 작업이었다. 일기장은 그들에게 마치 “영혼의 엑스레이” 같은 것이었다. 1723년 5월 19일에 에드워즈는 철저한 자기 성찰을 결심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는 내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루를 마칠 때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는가를 나의 질문에 추가하기로 결심하다”.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심문들의 내용은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도덕 및 생활에 대한 것이요, 둘째는 구원의 확신을 비롯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요, 셋째는 믿음과 경건에 관한 내용들이다.


도덕적 관심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의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다음과 같은 실천적 도덕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말조심에 대한 것. 에드워즈는 입으로 짓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악한 것인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든 그에게 불명예가 될 나쁜 말을 결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16번째 결의문). 결심문 70가지 중 마지막의 것도 언어생활에 대한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말 속에 어떤 선의가 포함되어 있게 하도록 결심했다”. 이 마지막 것과 꼭 같은 결심은 1723년 8월 17일자 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동년 5월 18일자 일기에도 유사한 결심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에드워즈가 말조심에의 중요성을 얼마나 절감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지난 수요일, 모든 방식의 험담을 피하기로 결심하고 일주일 동안 그것을 시험해 보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같은 달 22일자 일기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것들을 특별히 조심하기로 한다. 남에 대해 나쁜 말하기, 짜증, 먹고 마시는 것과 잠자는 것, 단지 진실만을 말하기.....”이다.


생활에 대한 결심들 중 에드워즈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시간을 아끼고 선용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1723년 9월 23일,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결심하고 있다. “나의 인생은 너무 짧다. 그러므로 모든 공부를 다 완벽하게 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이제 나는 결심한다.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공부들 외에는 모두 생략하고 미루어 두기로 말이다”. 그는 시간 활용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1728년 1월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아주 일찍 일어나심으로써 조기 기상을 추천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혼에 대한 관심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심문들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내용들 중 하나는 자신의 구원과 신앙 문제에 대한 언급들이다. 많은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에드워즈도 하나님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기본적 문제를 의심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그리고 계속적으로 검토하여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에 맞서기로 결심하다”(25번째 결심). 다음으로는 자신의 영적 상태 혹은 구원 여부에 대한 성찰이었다. 에드워즈의 내면 성찰의 가장 중요한 목적들 중 하나는 자기 영혼의 구원 여부에 대한 확실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젊은 청년으로서 무서울 만큼의 철저함을 보여 준다. “최대한의 엄밀함과 부지런함으로, 그리고 가장 엄격한 정밀성을 동원해서 내 영혼의 상태를 들여다봄으로 내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분깃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파악하기로 결심하다. 그리하여 내가 죽을 때 이 점에 대해 후회할 어떤 소홀함도 없게 되도록.....”(48번째 결심).


헌신의 각오와 경건 생활

에드워즈의 일기와 결심문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세 번째 범주는 경건과 헌신에 관한 것이다. 역사상, 에드워즈만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하고 완전한 헌신을 다짐했던 젊은이는 드물었을 것이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철저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결의를 자주 갱신함으로 자신을 위해 사는 대신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떤 식으로든 내가 나 자신의 것인 양 행동하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처신하기로 결심하다”(43번째 결심문).


에드워즈는 자신이 지구상에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타협적인 삶을 살아가더라도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지조와 신실함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지구상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그 진정한 광채를 발하게 한 사람, 즉 어느 모로 보든 탁월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식,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완전했던 그리스도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면 내가 바로 내 시대에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63번째 결심문). 이와 거의 꼭 같은 결의가 1723년 1월 14일과 7월 13일자 일기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참으로 영웅적인 결심이었다.


에드워즈가 성인이 되어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미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 철저히 자기 삶을 헌신하기를 기뻐했기 때문에 영적 거인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제4장 최초의 은혜 체험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읽을 때의 체험

에드워즈가 처음으로 하나님과 신적 일들에 대한 “내면의 달콤한 기쁨”을 발견했던 것은 1721년 즉 그가 18세 되던 해에 디모데전서 1장 17절,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을 읽고 있었던 중이었다.


“내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신적 존재의 영광에 대한 감각이 내 영혼 속으로 들어와 퍼져 나갔다. 그것은 그 전에 내가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이 말씀처럼 보였던 것은 없었다. 나는 혼자 그가 얼마나 탁월한 존재이며, 만일 내가 그 하나님을 즐길 수 있다면, 그리고 천국에서 그와 연합할 수 있다면, 그리고 사실상 그 분 안으로 삼켜진바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나는 혼자 이 성경 말씀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것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고는 기도하러 갔다. 기도하는 중에 그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즉 새로운 종류의 감정으로 기도했다.”


새로운 종류의 이해와 생각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에드워즈는 그리스도, 구속 사역, 그리고 그에 의한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이해와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러한 일들에 대한 “내면적이고 달콤한 감각”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그리고 그 분 안에 있는 값없는 은혜에 의한 구원의 “사랑스러운” 방법에 대해 읽고 묵상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신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묘사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단어는 “달콤한”이라는 형용사다.


구원의 확신과 묵상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더 큰 거룩에 대한 영혼의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그것들로 가득해 터질 것 같았으며 하나님의 일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거의 계속적으로 그것들을 묵상했다. 그는 당시 “몇 년이고 하나님의 일들을 생각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한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바탕은 이때 이미 터가 닦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명석한 두뇌로 신학적 주제들을 그처럼 깊이 있게 꾸준히 묵상한다는 것은 엄청난 신학적 역량의 축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적 탁월성에 대한 감각

여기서 에드워즈의 삶과 신학의 핵심에 도달한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하나님의 일들의 신적 탁월성에 대한 어떤 시력, 혹은 영혼을 만족시키고 생명을 주는 어떤 선에 대한 미각”이라 불렀다. 당시 그가 가졌던 체험은 바로 그러한 지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전의 경험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훗날 그의 주저인 「종교적 정서」에서 상술된다.


제5장 뉴욕 장로교회 설교자 시절


거룩에 대한 갈망

1722년 에드워즈는 신도시 뉴욕의 작은 장로교회에서 약 8개월간(1722년 8월-1723년 4월) 설교자로 봉사하게 되었다. 그때 훗날 설교와 저술들을 지배할 많은 주제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종교적 감각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그의 동경은 훨씬 증대되었다. 또한 모든 면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복음의 순수하고 달콤하며 축복된 규율들에 따라 살고자 하는 불타는 욕망을 느꼈다. 이런 영적 갈망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강도 높은 경건의 훈련을 쌓았다. 어떻게 하면 더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더 합당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그의 “밤낮 끊임없는 질문이요 투쟁”이었다.


거룩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에드워즈는 거룩을 “최상의 아름다움이자 사랑스러움”, 즉 “신적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그것은 그에게 “달콤하고 유쾌하며 매혹적이고 평온하며 고요한 성질”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순수함, 밝음, 평화스러움 그리고 황홀”을 영혼에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겸손, 상한 마음, 그리고 가난한 심령” 만큼 사랑스러워 보인 것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열심

참된 경건의 증거들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에 대한 순수한 갈망이다. “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커다란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는 지구상에 복음이 전파되고 영혼들이 구원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몇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발 아래 엎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코네티컷으로- 문학 석사 학위의 취득

1723년 4월에 코네티컷으로 돌아온 에드워즈는 담임 목사들이 잠시 강단을 비운 뉴잉글랜드 각처의 교회들에서 설교자로 봉사하면서 석사논문을 완성해 9월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6장 예일 대학 강사 시절


1724년 5월,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으로 돌아와 2년 동안의 강사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2년의 기간 동안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 1726년 초, 8월에 노샘프턴의 외조부의 솔로몬 스타다드의 교회로부터 부목사로 일해 달라는 부름이 왔던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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