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목회 사역의 시련과 어려운 점/ 찰스 브리지스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먼저 거기에 들어갈 비용이나 대가를 계산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우리 주님의 예화는 목회 사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기도하면서 진지하게 따져보고 계산하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중요한 일을 단념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리 숙고해 보지 않고서는, 전쟁터의 구경꾼이 실제전투의 막대한 불안감에 대해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목회 사역의 어려움을 깨닫지는 못하는 것이다. 오직 경험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노병이 젊은 병사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해주었다. “그러므로 내 아들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굳세어라.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어려움을 잘 견뎌내어라”(딤후2:1-3)
사역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신중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역이 쉽고 편안할 것이라는 기대는 잠시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사역은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역에는 심한 시련들이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때로는 어찌할 줄 모를 정도의 시련들이 있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시련들은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내부로부터 오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오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교회 일을 하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아주 많다는 것과, 구주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힘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외에, 낙심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 주님처럼 우리 또한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영원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실재하고 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 외에, 그 누가 이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죽도록 주께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주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가 사명을 수행하다 보면, 즉시로 잠재적인 편견 또는 뿌리 깊은 편견들을 만나게 된다. 세상의 교만한 사람들은 가장 혹독한 감정들 들어내어 우리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적한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원수가 된다. 우리가 참 말을 하기 때문이다(갈4:16).
복음 사역을 할 때 사람들의 비난을 견뎌내는 것은 우리가 받은 지상 명령 수행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들의 본성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본성을 다스려 복음을 수용하게 하려면, 우리 나름대로의 특별한 지혜와 인내, 그리고 충성심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의 친절은 세상의 적개심보다 훨씬 더 무섭다. 급류와도 같은 세상 사람들의 반대와 적대를 막아낼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을 무장 해제시키는 세상의 친절과 타협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굴복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쉬지 않고 교묘하게 활동하는 사탄으로부터도 어려움은 올 수 있다. 사탄은 파괴적인 영향을 끼쳐 사역의 전반적인 효과를 저해한다. 목사의 마음 상태에 악한 힘을 행사하는 사탄의 권세는 아주 골칫거리이다. 목사의 정신을 흐트러뜨려서 본질적인 임무에서 지엽적인 다른 것들로 주의를 돌리게 하거나, 목사의 마음에 의심의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하기도 한다. 칼빈, “목회는 쉬운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는 치열하고 어려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가 가진 모든 힘을 기울인다. 우리를 교란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쉬운 일만을 좋아하는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전폭적인 헌신까지 해야 하는 일을 하기가 주저되는 자연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쓰디쓰게 들리는 진리의 말씀들을 선포하기가 부끄러워서, 짐짓 조심성 있는 체하며 뒤로 미루고 싶은 자연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직분도 천사요 본질도 천사라면, 우리에게 생긴 문제쯤은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배반했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때로는 살을 깎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끔찍한 성향으로 말미암은 많은 상황들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고 나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한다.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강한 세력이 그 힘을 우리에게 사용하는데, 우리가 약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역에 대한 의욕을 점점 잃어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온갖 핑계를 찾아내고, 결국에는 열의까지 잃어버리고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배척할 때, 이기적이고 교만한 우리 마음이 충동질을 받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인기는 더욱 위험한 것이다. 인기가 가진 유혹의 힘에 피해를 입지 않고 도망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들도 사실은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이 불같은 시련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아니하는 습관으로 자기 삶이 조절되어 있지 않다면, 성공의 징후들은 자만심만을 부추길 따름이다. 반면에. 이런 특징이 보이지 아니하면, 즉 성공의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조급해하거나 낙담에 빠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때, 우리에게는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느혜미야와 그의 수하의 사람들처럼 우리는 한 손에는 흙손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느4:17). 흙손을 놓으면, 사역의 진행은 중단될 것이다. 칼을 칼집에 꽂으면, 원수가 일시적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우신 건축가이시며 우리 구원의 사령관이신 우리 주를 의지하면서 저항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려고, 그리고 우리에게 본향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근거없는 지나친 자신감을 억누르는 데에는 십자가의 가르침만큼 좋은 약이 없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끊임없는 자신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믿음의 능력과 기도의 특권과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입증을 갖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이 필요하다. ‘학자들의 혀’를 자기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어려움을 겪어보고 신앙의 전투를 겪어본 우리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주님의 본을 따라 우리는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아야 한다”(사50:4).
목회 사역 현장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믿음의 시각을 되살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무력감을 의식하고 있으면,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겠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출4:10-12,렘1;6-10.마28:20,고후12:9). 그리고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이라는 산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그래서 잘 참고 견디고 부족한 점을 고치기만 하면, 낙심은 결국 열매를 풍성히 맺는 자원이 되어 우리의 힘을 더욱 붇돋아 주는 것이 된다.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사랑하면, 모든 어려운일들을 극복하게 되어 있다.
-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pp 4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