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가 가는 길 전체는 죄의 힘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투쟁이다/ 찰스 브리지스
지상 명령에 의해 “만민에게 복음”(막16:15)이 전파된다. 그러나 결과는 이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만일 우리가 그 말씀을 요건들을 세상적인 표준으로 낮추었다면, 또는 부패한 마음에 맞게 낮추었다면, 사람들의 칭찬을 받음으로 보상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했다면”(고후2:17),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였다면,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되풀이해서 듣는다고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왕상22:8). 세상 뿐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진리 전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의 실천을 거부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저항의 원칙은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 전체는 죄의 힘센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투쟁이다. 이 죄는 육적인 사람의 마음에 자리잡은 그칠 줄 모르는 편견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가장 높은 권위에 의거해서 이 죄는 “하나님과 원수”(롬8:7)가 된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목사가 책임질 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목사의 무지함, 일탈, 일관성 결여, 그리고 화목과 친절한 영접의 부족은 이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일 것이다.
십자가의 정신을 불완전하게 보여주면 십자가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악화시켜 놓는다.
그렇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사자의 입에서 나온 복음의 사역은 타락한 인간의 육적인 원리를 흔들어 놓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을 특징짓는 위엄, 겸손, 인내, 그리고 사랑의 결합보다 더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주님의 사역은 전우주적으로 멸시를 받고 거부를 당하였다.
청중의 양심에 개별적으로 적용한 것, 그분의 십자가의 치욕,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그분의 사역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는 것,
그분의 진리를 수용하는데 반드시 부복(俯伏)의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합해서 그들 사이에 수군거림을 일으켰다. 그분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평하며,
자기들의 일시적인 신앙고백마저 버리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요6:24-66).
그러므로 우리의 사역의 본질과 우리의 사역의 대상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내재적인 반대는 우리 성공에 중대한 장애물이 된다. 이미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그들에게, 정서가 기울어진지 이미 오래된 그들에게, 그리고 죄의 속임수로 말미암아 마음이 굳어진 그들에게, 우리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진지하고 정직한 마음과 접촉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적개심은 인간 타락성의 농축된 본질이며, 도덕적 흑암 또는 영적 흑암의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 이 흑암은 빛의 입구를 닫아버려 이해의 눈을 밝히는 과정에 어려움을 초래한다. 하늘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 그 어떤 힘으로도 이 흑암은 정복할 수 없다.
적개심을 죽이는 힘이 있어야, 마음을 열어서 보게 하고, 순종하게 하며 진리를 사랑하게 하고
우리 직분의 측량할 수 없는 축복들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다.
-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pp 153-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