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강좌·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교리강해1 제8-9장

강대식 2016. 3. 22. 17:28
제8장 하나님의 이름과 성삼위일체

우리는 매우 고귀한 교리에 관심을 갖는 것도 동시에 매우 실제적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위해,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과 교제를 갖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교회사는 사람들이 이 중대한 교리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또는 계시의 어떤 부분을 무시했기에 오류들과 이단들과 재앙들이 개인들의 삶과 교회 생활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Ⅰ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속성들에 대한 진리를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이름들을 적용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들의 목적 역시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측면들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1 이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

이름은 언제나 그의 성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름은 어떤 사람이 진정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주어진 경우를 보게 될 때마다 그 이름들이 정확히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인물들은 하나님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브니엘에서 운명적인 밤을 보내는 중에 홀로 남았을 때, 어떤 사람과 더불어 싸우기 시작했는데, 야곱은 뭔가 신적인 것이 있음을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창 32:29)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하는 경우를 시편 22편 22절에서도 볼 수 있고, 신약에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사람들이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이름들과 그 의미

엘-첫 번엘, 첫 번째, 최고라는 의미이다. 힘과 능력, 즉 강력함이라는 개념을 전달합니다.
엘로힘(복수형태). 하나님이 강력한 분일 뿐 아니라 두려워해야 하는 분이라는 개념을 전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와 관련하여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시는 이름입니다.
엘룐. 높고 고귀한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도나이. 전능하신 주, 만물이 복종하며 모든 사람이 섬기는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위는 초월적인 하나님.
샤다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의 권능만이 아니라, 특별히 그분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사람들과 맺으시는 관계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통제권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먹을 식량이 있도록 바람과 비와 눈을 통제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는 분 혹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언약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이 전능자께서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또한 계약을 맺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사바오트-‘만군의 여호와(삼상1:3)’. ‘만군’은 천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여호와 이래-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창22:14).
여호와 로페- 치료하시는 여호와(출15:26).
여호와 닛시- 여호와 나의 깃발이라는 의미. 그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자손은 정복과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 기드온에게 계시한 이름(삿6:24)으로 사사기의 무법의 시대에도 자신을 평강의 주님으로 계시하심.
여호와 로에- 여호와 나의 목자(시 23) 여호와 치드케누- 여호와 우리의 의(렘23:6).
여호와 삼마- 여호와가 계시다의 의미(겔48:35).
이렇게 해서 이 모든 이름이 위로와 위안으로 가득한 위대하고 놀라운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복되신 주님이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하나님의 이 모든 특징을 계시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을 막연한 에너지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하나의 인격으로서 행동하시며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러한 이름들을 통해 우리는 믿음 안에서 평강과 위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임마누엘
아들은 시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권능의 통치자,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Ⅱ 삼위일체

1 삼위일체 교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주의하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가장 신비롭고 어려운 교리로서, 성경의 계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이 교리를 생각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가장 독특하고 영광스러운 교리.
그럼에도 이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현상은 편안하고자 하는 바람, 경험에 안주하는 경향, 지적인 수고를 요구하는 일은 무엇이나 회피하려는 경향으로 등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게으름의 또 다른 예가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교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해와 해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하며, 씨와 땅과 꽃에 비유할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비유가 단일함과 동시에 구분 됨, 즉 셋인 하나와 하나인 셋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시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성경에 계시된 신비 앞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신비를 이해하거나 파악할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기에 경이와 경외감과 예배함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놀랄 뿐입니다. 성경은 삼위일체 안의 세 복된 위격이 영원무궁토록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해 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는 교리다
성경에는 이 교리에 대한 명백한 진술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교리가 성경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는 세 하나님이 있다는 의미-이것을 삼신론(tritheism)이라고 부른다-가 아닙니다. 이는 유니테리언(Unitarian)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교파. 기원은 고대이지만, 종교개혁시 이탈리아 신학자 세르베투스와 소치니에서 연유되는데, 소치니주의(Socinianism)가 그 대표적인 유파이다
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유일한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6;4). 이것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계속 반복되던 메시지였으며, 분명히 절대적으로 필요한 메시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양한 신들-바알, 아세라, 쥬피터, 마르스, 머큐리, 등-을 믿는 민족들에 둘러싸여 있었기때문에 이스라엘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유일성과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하신 것도 같은 내용을 말씀하신 것이로 둘이 아닙니다. 야고보 역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약2:19)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십니다.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위격으로 존재하십니다. 문제제기.
‘본질상 다른 세 위격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세 하나님이 있음이 분명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번에도 용어의 부적절성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더 고등한 범주의 말을 생각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위격들(persons)’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개체들을 생각하여 각각을 분리시키지만, 그것은 분명 뭔가 다른 의미입니다. 수십 세기에 걸쳐 교회의 위대한 지성들이 이 문제로 씨름했고 설명해 내려 노력했지만, 역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소개합니다, ‘신성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계시다. 이 셋은 한 하나님으로서, 본질상 동일하시고, 능력과 영광이 동등하시다.’ 즉 성부는 하나님이시며, 성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두 하나님이 아니라 본질상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근거

성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성부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신성만이 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롬9:5).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9).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딛2:13)을 기다리라.
또한 복음서들을 읽어 보면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속성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려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5;26)-하나님의 영원성.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불변성. 전능하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편재성. 예수님은 전지하시기에 모든 것을 아셨고 아무것도 그에게서 숨지 못했습니다(요2:25).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에 의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심판할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시며(요5:27),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의 증거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1).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또한 우리 주님이 자신과 성부께서 보내실 ‘또다른 보혜사’(요14:16)를 언급하셨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의 주장- ‘세 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위격만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 계시다. 하지만 그 한 하나님이 자신을 성부로 계시하시고, 다른 때는 자신을 성자로 계시하신다. 그리고 또 다른 때는 자신을 성령으로 계시하신다.’

위격은 양태의 변화가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양태 양식론/양태론 [樣式論, modalism]. 3세기 초 사벨리우스(Sabellius, ?-260?년)가 처음 주장했는데, 이 지지자들은 정통파의 견해인 '삼위일체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하나님의 완전하고 분리할 수 없는 주권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별하는 것을 거부했다.

들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세 위격을 함께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세 위격의 존재는 확고하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의 탄생을 고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 태어나실 성자의 능력이라는 말로 세 위격이 언급되었고(눅1:26-38), 세례 때에도, 성자가 물속에 계실 때 성령이 비둘기의 형태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으며 성부 하나님의 음성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3:13-17). 요한복음 14, 15, 16장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증거
성자가 성육신하시고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완벽하고 분명한 형태로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약에는 이 교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로힘은 복수형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3:2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창11;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이 용어들 자체가 삼위일체를 시사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언약의 사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현현이었습다. 창세기 처음 부분에 ‘성령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에게 말하도록 하신 분은 성령이셨고. 성막을 지을 때 브살렐에게 임하셔서 정교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도 성령이셨습니다(출31:2-5). 성삼위일체라는 위대한 교리에 대해 신약뿐 아니라 구약 성경도 풍성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4 세 위격의 관계
성경 도처에 나와 있는 대답은 그들이 영원히 공존하신다는 것과 종속의 관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자라는 사실은 그분이 성부와 대등하시다는 의미이고, 성부부에게 종속되거나 성부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다.

삼위일체는 영원 전부터 신성 안에 존재해 오셨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성부는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 역시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 성부는 주님이시고, 성자도 주님이시며, 성령 역시 주님이시다. 그러나 세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주님만 계신다. 기독교의 진리에 의해 각각의 위격 자체가 하나님이시며 주님이시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듯이, 그 동일한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세 하나님과 세 주님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으로, 세 위격 간에 구분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구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 위격 사이에 일종의 주종관계가 발생합니다. 성부께서는 창조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는 성부께 보내심을 받아 이 구원을 이루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가장 고귀하고도 가장 장엄한 진리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겸손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세로 이 진리를 계시된 그대로 받아들여서 경배와 놀라움으로 예배하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진리이며, 특별히 우리를 위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입니다.

9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Ⅰ 작정의 교리를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바 하나님의 존재, 본성, 성품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 및 자신과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한 이 계시의 일환으로 자신에게 부여하셨던 이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로 삼위일체의 위대하고, 능력 있고, 불가해한 교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항목으로 하나님의 역사들, 하나님의 활동,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성경의 순서상 그리고 논리 전개상 다음에 어떤 주제가 다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가는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즉시 창조의 교리를 다루어야 한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몇몇 책이 그렇게 내용전개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잘못된 것이고,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특성이 무엇이냐의 문제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근저를 이루며 그것을 특징짓는 몇몇 위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들을 생각하시고, 결심하셨으며,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혹은 방법에 대한 성경의 묘사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eternal decrees of God)의 교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 행하시기 이전에 결심하시고 정하신 일들입니다. 이 교리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영원하신 분의 마음, 즉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우리의 보잘것없고 왜소한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에 집중하는 이유는 첫 번째 이유는
1 성경이 작정의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3 작정의 교리는 우리를 많은 오류로부터 구해 줍니다.
4 작정의 교리는 커다란 위로를 주기 때문입니다.

Ⅱ 작정의 교리를 접근하는 자세

1 편견들과 모든 당파심을 버려야 한다. ‘당파심’이란 말은 모든 사람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이미 믿어 왔다고 생각하는 일을 고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2 철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큰 저주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는 것, 그것이 철학의 목표입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성경의 계시를 넘어서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와야 하며, 믿음은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즉각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그 외 성경에서 발견되는 다른 모든 것에 비추어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말하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해야 합니다.

Ⅲ 작정의 교리의 기본적인 명제들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피조물에 대해 변치 않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성경은 “창세전에”(엡1:4)와 같은 문구를 계속해 사용합니다. “때가 차매”(갈4:4)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는 불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고, 그 어떤 것도 우연이거나 우발적이거나 불확실하거나 뜻밖에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모든 삶에 대해, 이 모든 것의 마지막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그 분이 일어나게 하신 모든 일은 그분 자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이며, 그 계획은 고정되어 있고, 확실하고, 변하지 않으며, 절대적입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일과 사건들을 포괄하고 결정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결과를 계획하셨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의 교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고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들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0-11). 우리에게는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통제하시고, 결정하신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었나니”(마10:29-30).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주목하십시오-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행4:27-2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8). 형들의 악한 행동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작정 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도 그리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을 유발하시지 않으시며, 그분은 악을 승인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며, 그분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하십니다. 죄를 금하고 벌하는 도덕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이 또한 죄의 발생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악에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악이 벗어나지 못할 정확한 궤도와 이루게 될 결과를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도록 지배하십니다.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도 자유롭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악한 행동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그분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에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원인과 결과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연과 인생에는 원인과 결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교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원인과 결과, 자유로운 행동들은 하나님 자신의 작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이 교리가 가장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는 곳은 로마서 9장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절). “

질문: ‘왜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9:14).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5-18).

4 하나님의 작정은 효력있는 작정이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능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하시고 뜻하시는 것은 틀림없이 일어나야만 하고, 아무것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5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성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 자신의 최고로 지혜롭고, 자비하시고, 거룩한 본성과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죄를 허용하시기로 결정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 존재하는데, ‘우리는 모른다’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우리의 책임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항상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코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합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둘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의 본성 및 행동 양식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지배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작정하시고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3).

‘하지만 그 둘을 어떻게 조화시킵니까?’ 저로서는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유로운 행위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 하나님은 창세 전에 구원을 작정하셨다.
사람들과 천사들의 구원, 특별히 그들 중 일부의 구원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을 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영생을 주시리고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7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사도바울은 영원하신 작정이라는 교리를 선포하면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함을 말합니다. 롬 9:20-23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역사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고 정해져 있다면 왜 그분은 우리를 벌하시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된 존재가 되었는지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궁극적인 이해를 보류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이곳, 시간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일관성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대해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결정하신 일들은 확실하고, 안전하고,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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