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5부 종교적 정서(신앙적 감정)-표지들(1)
제4장 참으로 은혜롭고 거룩한 정서들의 표지들
참된 종교적 정서의 특징들을 묘사하기 전에 에드워즈는 몇 가지 단서를 붙인다.
전제 1.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님
에드워즈의 의도는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종교적 정서를 진짜와 가짜로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즉, 누구는 참된 신앙고백자며 누구는 위선자인가를 가리는 작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목사들이 자기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영적상태에 관한 일들을 지도하고 상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규칙들은 성경에 얼마든지 있음을 인정한다. 단지 누가 참 신자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다고 그는 선을 긋는다. 말하자면, 대략적인 기준은 성경에 있지만 단정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양과 염소를 분명히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남겨 두신 특권이다. 그리하여 초두에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작업은 단지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 데 개략적인 참고가 될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제공하면서 누군가가 이 기준들을 사용하여 주위 교인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려는 시도를 할 위험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전제 2. 영적으로 저조한 자들이 확신 얻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 됨
둘째, 에드워즈는 이 기준들이 불신자는 아니지만 은혜로운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 즉 영적으로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 결함들 때문임을 지적한다. 첫째, 대상에 결함이 있다. 그 결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에 관련된 것이다. 말하자면 “은혜가 너무 적어서 명백하고 확실하게 식별되고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결함은 부패가 그것에 너무 많이 혼합된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부패는 은혜를 흐릿하게 만들고 감추어 버림으로써 은혜를 분명히 알아 낼 수 없게 만든다.
두 번째 결함은 신자의 시력에 관련되어 있다. 미약한 은혜와 지배적인 부패는 대상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처럼 또한 그것은 시력을 약화시킨다. 에드워즈는 죄가 눈의 질병과 같다고 생각했다. 부패하고 육신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사물들을 식별하고 판단하기에는 그들의 영적 감각이 무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에드워즈는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표지는 아무 것도 제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죄를 처리하는 것이다.
전제 3. 구제불능의 위선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
에드워즈는 자기가 제시하는 기준들이, 스스로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했다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거짓 체험과 소망을 가진 위선자들에게는 별 격려가 되지 않는다고 선을 긋는다. 그런 사람들은 눈이 멀고 자기 의로 인해 마음이 강퍅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확실하게 그들의 위선의 증거들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다.
본론으로〈참된 은혜가 있는 영혼의 정서적 표지-12가지〉를 열거한다. 그러나 첫 번째 표지라고 그가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표지가 아니라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오는 원천이다.
1. 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그 작용
첫째로, 에드워즈는 은혜롭고 신령한 감정의 원천이 인간의 마음에 가해진 영적, 초자연적, 신적 영향과 작용, 즉 성령의 영향이야말로 은혜로운 종교적 정서의 원천이라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영적”이라는 말을 “덕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사람이 “영적”이 되는 것은 “비범한 은사”가 아니라 “덕”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갈6장 1절 “사람이 무슨 범과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라는 본문을 제시한다. 즉 갈라디아의 어떤 교인들이 “온유”라는 덕을 소유했기 때문에 “신령한” 자들이라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비범한 은사를 자연인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연인이 어떠한 은사를 가졌든 그러한 사람을 신약성경이 일반적으로 “영적인 사람”이라 부르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원리와 감각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령을 신자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목적은 그들 속에 새로운 신적 성품을 이루기 위해서다. 모든 참 성도에게 주어지는 성령은 그들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면서 그들 마음에 영향을 준다. 그리하여 “새로운 성품의 원리” 즉 “삶과 행위의 신적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성령의 고유한 성품은 거룩함이다. 성도 안에 생명의 원리로 거주하는 성령은 성도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발휘해서 그에게 전달한다. 성도들은 바로 그 거룩한 성품을 전달받기 때문에 “영적”이라고 불린다.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저 은혜로운 움직임들과 감정들 속에 “새로운 내적 지각 내지 감각”이 있다. 그것은 그 본질과 종류에 있어 자연인이 느끼는 모든 것들과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은 ‘새로운 감각’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 눈에 시력을 주며, 귀에 청력을 주어 귀머거리의 귀를 뚫고 장님의 눈을 열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란 말이다. 그것은 죽은 지각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그 새로운 감각이 자연인들에게 있는 모든 원리들을 합한 것보다 더 고상하고 탁월하기 때문에 그것이 없이는 모든 다른 지각과 능력들은 헛되고 무용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영혼에 일으키는 결과들과 열매들이 너무나 복되기 때문에 “새로운 창조”에 비유된다. 그것은 새로운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미 있는 이해의 능력을 새로이 작동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새로운 감각은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새로운 영적 감각을 종교에 대한 이해 내지 인식과 대비시킨다.
에드워즈는 은혜가 전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원리’라고 주장한다. 성령은 성도의 마음에 영적 영향을 행사할 때 이 새로운 영적, 신적, 초자연적 원리들을 주입 혹은 발휘 함으로써 역사한다. 그래서 신령하고 은혜로운 정서들은 새로운 마음의 감각에서 생긴다. 즉 어떤 신적, 영적인 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데서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므로 정서는 이해의 결과요 열매다.
상상력과 참된 은혜 체험
에드워즈는 영적인 것과 공상적인 것을 철저히 구분한다. “상상력에 새겨진 인상”이나 “공상적 관념들”은 그것이 “하나님, 그리스도, 혹은 천국, 혹은 종교에 관련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참된 은혜나 영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상상력의 산물은 아무리 그 내용이 종교적이고 은혜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 은혜의 역사는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차원의 것이지 영적 차원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마음에 떠오르는 체험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성경 말씀이 갑자기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체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하거나 판단한다. 그러나 그것도 에드워즈에 의하면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도 단지 상상력이 자극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어떤 글자들이나 소리들을 마음에 제시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혹은 은혜로운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역사일 수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구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경우가 한 가지 더 있다. 만일 어떤 구도자들이나 교인들의 마음속에 어떤 ‘위로가 되는 달콤한 약속의 말씀’이 갑자기 그리고 경이롭게 마음에 떠오른다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신 틀림없는 증거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왜 구원의 약속에 관한 은혜로운 말씀이 그처럼 갑자기 놀라운 방식으로 자기 마음에 떠올랐겠는가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며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러한 경험을 자기들 신앙과 소망과 위로의 근거로 삼은 것은 구원에 대한 잘못된 확신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를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령께서,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 혹은 미각”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성령의 증거
구원의 확신 문제와 관련해서 에드워즈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증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먼저 그는 그것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지적한다. 소위 성령의 증거라는 것은 자주 어떤 이가 회심되었다거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직접적 시사” 내지 “인상”으로 오해된다. “너는 나의 자녀야”라고 모종의 은밀한 음성이나 인상으로 하나님이 내면에 말씀하시는 것이 성령의 증거라고 종종 혼동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증거가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인”과 같은 것이라 믿는다. 성령의 인은 성령의 어떤 “역사” 혹은 “영향”인데 그것은 영혼 위에 “신적 표”로 남아 하나님의 자녀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 결국 성령의 “증거” 혹은 “인”은, 어떤 이가 구원받았다는 “직접적 시사나 계시”가 아니라, 성령의 “거룩한 도장, 혹은 인상 지워진 이미지로서 양심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2.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사랑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두 번째 표지는 “신적 일들의 초월적으로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성격” 즉, 하나님의 일 자체 속에 있는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야기된 감정들이 참된 기독교적 정서들의 객관적 근거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정서들의 출처를 두 가지로 대별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이기심이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역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들 등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이야말로 참된 성도가 그것들을 사랑하는 일차적 이유이다.
만일 “그가 신적인 것들로부터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익이나 그가 그것들에서 받았다고, 혹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혜택이 그것들을 사랑하는 일차적 이유라면 그가 그것들을 사랑하는 최초의 근거는 “자기 사랑”이며 그러한 근거에서 출발하는 종교적 정서는 거짓이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견해였다. 하나님에 대한 혹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의 이러한 에드워즈 식 구별은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 아니 현대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의 신앙에 중대한 도전을 제공한다. 오늘 많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쉽게 그리고 흔히 표현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어디서 우러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과연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기독교적 덕들 안에 있는 “거룩함의 아름다움” 혹은 “도덕적 탁월함”을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어떤 “이익” 때문인가?
에드워즈는 자연인들이 죄를 미워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죄의 도덕적 악이나 가증함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 원리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뱀을 미워하는 것이 그것의 독과 유해성 때문이며, 맹수를 싫어하는 것이 사납고 위험하기 때문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복적인 동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거나 기복적인 동기를 강조함으로 많은 회심자들을 생산했다는 한국의 기독교를 에드워즈가 평가한다면 엄청난 부분이 거짓 회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한번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지금은 내가 주로 어떤 동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설교자들과 전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심각히 자신들의 메시지의 강조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점검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수용을 역설했을 때 그들은 무엇에 호소했던가? 그들이 왜 회심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는가? 예수 믿으면 여러 가지 덕을 보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 복락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축복을 받아 지상에서 잘 살 수 있기 때문에? 만일 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이러한 동기에 호소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였다면, 과연 그것이 순수하고 참된 복음전도일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호소에 마음이 끌려 교회로 오고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정 자신이 참된 회심자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인지 심각하게 평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잘못된 순서
에드워즈는 “마음의 미각”이 바뀌어 하나님의 성품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영광, 지고선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끌리고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 참된 회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다음에” 그리고 그것의 열매로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이익이나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영혼의 구원이든 지상적 축복이든 이기적 욕심이 신앙의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거짓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적 동기에서 비롯된 종교적 감정도 다 거짓이다. 그는 종교의 최우선 순위에 인간의 만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두고 있다.
참된 종교적 정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본 후, 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보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이 사랑스러우며 그리스도가 탁월하고 영광스럽다는 것을 본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이 먼저 이러한 관점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사랑은 수시로 여기서 시작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다음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은혜를 본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들 중 하나에 접근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영적 기쁨의 원천이다. 영적 기쁨의 최초의 근거는 “신성한 일들” 속에 있는 어떤 자기 이익에 대한 고려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들의 “신적이고 거룩한 아름다움”에 대한 “조망 내지 묵상” 중에 그들이 누리는 “달콤한 재미”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적 체험과 관련된 중요한 위험성을 지적한다. 흔히, 어떤 은혜 체험을 하고 나면 그것을 자랑하고 그로 인해 교만해지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잘못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한 자들, 즉 위선자들은 “그리스도, 그의 아름다움 및 충만함을 자기들의 체험으로 대체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대신 자신들의 놀라운 체험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기들 “체험의 아름다움”이다. “발견된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발견들”에서 더 큰 위로를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체험을 먹고 사는 것(living upon experiences)”이다.
에드워즈는 사람이 주로 무엇에 대해 많이 말하는가에 의해 성도와 위선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주로 하나님에 대해 많이 말한다. 그의 영광스러운 완전, 그의 사역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 복음의 영광스러운 일들을 많이 말한다. 반면, 위선자들은 자기들 자신에 대해 아주 많은 말을 한다. 자기들이 체험한 일들,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이 얼마나 확신하는지 등에 대해 주로 말한다.
3.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
참된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근거한다. 혹은 하나님의 일들을 그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최초의 시작이요 원천이다. 거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도덕적 완전의 아름다움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
도덕적 탁월성
그러면 에드워즈가 말하는 “도덕적 탁월성”이란 무엇인가? 그는 여기서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도덕성” 혹은 “도덕적 행위”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도덕적 탁월성”은 도덕적 완전과 같은 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덕”과 동의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이 도덕적 탁월성이 거룩이다. 고로 거룩은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포함한다. .....진정한 거룩 외에 다른 참된 덕은 없다.”
거룩
그러면 “거룩”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그것을 “선한 사람이 가진 모든 참된 덕,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들에 대한 은혜로운 사랑, 정의, 자비, 동정심, 온유함과 유순함을 망라한다”고 본다. 기타 “모든 기독교적 미덕들이 거룩에 속한다.”
현대 기독교는 거룩에 대한 강조를 상실한 지 오래다. 아니, 거룩이라는 단어를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대착오적이거나 좀 모자라는 사람, 혹은 잘난 척하는 위선자, 기껏해야 고리타분한 경건주의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게 있어 “거룩”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다. 참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에 의하면, 그의 거룩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사랑에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다”.
거룩의 아름다움
조금 더 좁혀서 말하자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직면한다. 그에 의하면, “거룩”은 그리스도의 모든 아름다움을 집약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모든 영적 아름다움-온유, 겸손, 인내, 천상적 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비천한 자들에 대한 겸양, 불쌍한 자들에 대한 동정 등-은 모두 그의 ‘거룩’으로 요약된다.” 이 “거룩”의 아름다움을 우리가 영적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 새로운 영적 감각은 회심 시에 주어진다.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을 다른 말로 “달콤함”이라고 표현한다.
아름다움과 성화
에드워즈는 종종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이라는 단어 대신 ‘거룩의 영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는 사람이 이 거룩의 아름다움 내지 영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된다고 주장한다. 거룩의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이 영적 감각은 성화의 비결이다. 영적 감각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마음에 새로운 ‘거룩한 성향’ 혹은 어떤 ‘마음의 습관’을 가져다 줌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킨다.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의 거룩(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그것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변화될 뿐더러 거기서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요지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가?
4. 신령한 지식
참된 종교적 정서의 네 번째 표지로 에드워즈는 어떤 종류의 “앎”을 제시한다. 즉, “신령한 지식”으로부터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은혜로운 감정은 정신이 “조명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바로 그리고 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거룩한 정서는 “빛 없는 열”이 아니다. “빛”을 받아 지식이 생겨야 거룩한 감정이 일어난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에 제시된 영광스러운 것들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것들에 대한 더 낫고 뚜렷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지식이 감정을 낳는다면 그것은 어떤 지식인가? 에드워즈는 지식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지적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지식이다. 전자는 사변적인 것이요, 후자는 초자연적이다. 에드워즈가 이해로부터 감정이 생긴다고 말할 때 그 이해는 후자의 것이다. 영적 초자연적 이해는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것을 전혀 가질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신학의 대주제에 도달했다. 진정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신적인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지식”, 혹은 “이해”이다.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참된 종교적 정서가 우러나온다. 그러나 이 지식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 인간의 구원과 성화 여부는 모두 이 영적 지식을 획득 혹은 체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영적 이해
실로, 우리는 지금 에드워즈의 <종교적 정서>의 절정 부분에 도달했다. 아니 사실상 그의 신학 전체에서 최고봉에 도달해 있다. 그가 말하는 영적 이해는 영안이 열려 영적 실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영안이 닫혀 보지 못하던 신령한 사실들을 이제 마음의 눈이 열려 보게 되는 것이다(시119:18). 그것은 “마음이 영적으로 조명을 받아 성경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이해는 영적 감각 혹은 미각에 의해 가능하다.
마음의 감각
이러한 영적 이해력, 혹은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즈는 “마음의 감각”이 생긴 것이라 표현한다. 에드워즈 신학에 있어 결정적인 열쇠인 “영적 이해”는 “하나님의 일들의 거룩성, 혹은 도덕적 완전성의 지고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에 대한 마음의 감각”이다. 첫째, 영적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다. ‘마음’은 우리의 중심, 그리고 전 인격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인격적 이해이다. 단지 머리의 이해는 ‘마음의 감각’이 아니다. 영적 이해는 일차적으로 “신적 일들”의 “도덕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혹은 “미각”이다. 둘째, 그 이해의 대상은 “신적 일들” 즉 하나님에 관한 일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 그리스도, 복음, 구원, 십자가의 도 등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적 계시에 관한 이해다. 셋째, “마음”이 그러한 대상들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감각은 “아름다움”과 “달콤함”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서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맛보고 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감각은 육체의 감각 기관을 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 혹은 “영혼의 감각”이다. 넷째, 그 마음의 감각에 동반되는 것은 “종교의 일들”에 대한 “분별력과 지식”이다. 그것은 구체적 내용이 없이 단지 막연한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맛보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한 교리적 실체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다섯째, 그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은 “마음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영적 지식
영적 이해 혹은 마음의 감각에 의해 우리는 영적 지식을 얻게 된다. 영적 지식이란 참으로 선하고 거룩한 것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미각”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지식을 미각이라는 감각과 연결시킨다. 감각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에드워즈는 “거룩의 아름다움”을 보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것”을 본다고 주장한다. “성결의 미” 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에드워즈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없는 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하다.” 신령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모든 참된 체험적 지식이 비롯된다. 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