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존 오웬 4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함과 그 영광
4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겸비함과 그 영광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의 직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신 것은 참으로 자신을 무한히 낮추신 것이다. 신자들은 바로 그 일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심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첫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위대함’을 살펴보고, 둘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본질’에 대해서 선언하고, 셋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볼 수 있는 관점’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위대함
하나님의 신성이 지니는 말할 수 없이 우월한 탁월성에 대해 시편 기자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라고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탁월하심으로 높은 곳에서 위의 하늘에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을 내려다보시며 주목하시고 이 땅에 있는 가장 큰 것들을 바라보시기 위헤서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야 한다. 비록 피조물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보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무한히 낮추셔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는 본질과 존재와 본체와 관련된 무한한 차이가 있다
(사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는 하나님 안에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에 비할 때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에게는 그분이 관심을 두고 바라보실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본질에 비해서 무한하게 탁월하신 하나님은 본질의 무한한 위대하심 때문에 그 피조물의 대해 관계하실 때에 자신을 낮추시고 낮아지셔야만한다. 이사야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사 57:15, 개정)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너무 높고 고상하시며, 자신의 영원한 존재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하기에 그분이 땅 아래 있는 존재들을 내려다보시기만 해도 그것은 은혜의 행동이 된다. 특히 세상이 다 멸시하는 자들을 바라보실 때는 정말 특별한 방식으로 그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서 행동하고 목적하는 바를 이루시는데 스스로 무한히 충분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자신을 낮추신 것은 위대한 일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을 만족시키거나 복되게 하기 위한 일에 조금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본성 속에서 무한한 완전하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함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 이웃을 유익하게 하듯이 하나님을 유익하게 할 수는 없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7]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 35:6-7).
그처럼 스스로 영원히 복될 만큼 충분하셔서 그 어떤 것도 그분에게 더하거나 뺄 것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가 어떤 피조물에게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그것은 마땅히 자신을 낮추시는 행동이요, 자신의 존재와 그 보좌의 특권에서 내려오시는 행동이다.
Ⅱ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본질
그리스도의 영광의 이러한 측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알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특별한 성질과 내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인하거나 오해하는 모든 시대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 잘못을 불식하고 난 다음에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그가 가진 신성을 벗어 버렸거나 신성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낮아지셨다는 것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으로 존재하시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신성의 측면에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인격과 동등되심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함께 신성에 참여한 바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권위와 존엄과 능력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셔야만 한다. 물론 신적 격위들 간에 순서가 있다. 그러나 신적 존재에는 차별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요 5:17-18).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신성을 지니신 채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한다(빌 2:7).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것을 멈추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여전히 지속되면서, 다만 ‘인성 속에서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바꾸신 것이 아니며, 자기 존재의 본질을 버리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분이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듯이, 하나님이신 분은 결코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
소시니안(Socinin) '소시니안‘이란 16세기 후반의 이탈리아 신학자인 레리우스 소시너스(Laellus Socinus)의 추종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적적으로 태어나 이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사람 이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속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도 부인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감화를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사람으로서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낮아지심 가우데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의 기초이며, 먼 하늘에 속한 진리와 신비와 생명이요 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때가 되매 인자가 되었고, 인자가 되었음에도 이전의 자기 존재를 그래도 유지하셨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옛 아리우스파(Arians)가 상상했던 것처럼 신성이 인성으로 바뀐 것을 뜻하지 않는다
아리우스파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56년 - 336년)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지만 성부와 유사한 본질(유사본질), 곧 신성을 가진 존재로써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지만 '참 하나님'은 오직 성부이시며,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인간도 하나님(참 하나님)도 아닌 인간과 하나님(성부)의 중간 존재라고 하였으며(천사라는 것도 아님)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폭넓게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주재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사람들은 만물을 지으시고 그 자체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의 발현이었던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때가 차매 육체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우리 구주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말미암아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 같이 그 ‘말씀’의 본질이 그렇게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선성이 인성으로 바뀌는 본체론적인 변화를 상상하였다. 이것은 마치 교황주의자들이 화체설(化體設)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하나님의 본체가 사람의 본질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이가봇(삼상 4:21), 즉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는 아무런 영광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식의 낮아지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모두 파괴하고, 그리스도를 우리와 아무 관계없는 인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신성은 조금도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 유두개(Eutyches) 유두개는 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장로로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후에 취하신 인성이 신적 성질로 변화되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인간의 몸과 같은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와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양성, 즉 신성과 인성이 함께 혼합되어 하나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하나의 본성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본질적으로 전과 다른 어떤 것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시게 되었지만, 그분의 신성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분의 신성에는 ‘어둠이나 회전하는 그림자“(약 1:17)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안에 여전히 동일하게 존재하였다. 그 신성의 본질적 속성들과 작용들과 복됨이 영원 전과 똑같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격 속에서, 인성으로 삶과 죽음 속에서 많은 것을 행하고 겪으셨다. 그때 신성은 아무것도 담당하지 않으셨다. 물론 삶과 죽음에서 많은 일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성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성경에 나오기는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라고 표현기도 한다.
4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그 인성으로 신성의 영광을 가리셨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실 때 자신의 선성에 대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
사도는 그분이 ‘자기를 비워....자기를 낮추셨다’고 말한다(빌 2:6-7).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인성으로 가리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신성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나타나지 못하게 하셨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보기는커녕 선한 사람으로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나타내는 표증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격분하여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요 8:59)하였다. 사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보는 인성과는 다른 본성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한 인격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일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논리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연 속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예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시니안들은 오늘날까지 그것을 중요한 구실로 삼아 무슬림과 유대인들의 노선을 따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영광으로 인해 그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적 격위이시고 영원토록 찬미를 받으실 하나님이셨지만,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되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까지 낮추사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신적 영광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믿지도 못하며, 어떤 방식으로도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보지 못하므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부인한다. 그리스도를 사람 이상으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진 하나님의 영광과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 등을 배척한다. 모든 피조계를 통틀어서 생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무한하신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에 대하여 그리스도보다 더 많이 관련되신 분이 없는데 말이다. 모든 복음의 진리가 바로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인데도 그들은 모든 복음 진리의 뿌리를 캐내어 잘라 버린다.
이런 면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대하여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롬 9:33)이심에 틀림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한 분의 선지자로서만 고백하고,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믿 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비난이나 반대가 가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정도로만 인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소시니안들의 죄악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눈멂과 불신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신비를 믿지도 않고, 앞으로도 믿지 않을 것이며, 믿을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을 떼어내 버리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도 그것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 기독교의 신비와 영광과 진리와 효력이 모두 상실되어 아무 의미도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면 그 자리에 정교하고도 세련되어 보이는 이방종교가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믿음이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는 그 반석을 이길 수 없다(마 16:18).
5 그리스도께서 환영(幻影)이나 허깨비의 방식으로 낮아지신 것이다
사도들이 죽은 뒤에 교회를 더럽힌 첫 번째 이단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곧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가 행하고 당한 모든 일들은 정말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고 당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구약시대에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 먹고 마시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단은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인 육체적인 몸을 입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몸으로 나타나 보였을 뿐이라고 가르치기에 ‘가현주의(Docetism)’라고 불린다. 이 이단이 흔히 ‘기독교 최초의 이단’이라고 칭해진다.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어떤 철학자들의 개념에서 이단이 생성되었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실제성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적 낮아지심의 참된 본질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격위, 또는 아들의 격위 안에 있는 신성이 형언할 수 없는 그분의 신적 능력과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인성을 자신의 개인적인 실체를 취하셨다’. 신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의 요소이듯이, 인성을 자신의 인격의 요소로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기초이다. 이런 신적 신비에 대해서 아주 조금밖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믿음의 확실한 기초가 된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자신의 인격의 요소로 취하셨다고 믿을 수 있고, 또한 믿고 있다.
사람이 맨 처음 지음 받았을 때에는 인성이 아담 안에서만 존재하였다. 그때 아담은 지금 각 사람이 그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존재하는 것과 똑같이 개별적인 사람이었다. 그렇듯이 그리스도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그 인성을 자신의 인격 속에 고유한 요소로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그 인성이 그의 것이 되고, 그분이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예수가 되신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행하고 당하신 여러 가지 고난 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발견되셨으며, 그분의 신적 격위의 영광은 가려져 있었다. 그분은 친히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이 또한 낮아지심에 속한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실 때 그 인성을 신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으로 바꾸지 않으셨다는 점을 관찰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 인성의 본질적 속성과 활동을 그대로 보존하셨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성이 고통을 당하였으며, 시련과 시험을 받았고, 버림당했다. 다른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인성과 동일하게 말이다. 그 인성은 모든 사람이 가진 인성이 당하는 세상의 모든 악에 노출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도가 묘사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측량할 수 없는 낮아지심을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특별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다.
Ⅲ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관점
우리가 사람들과 천사들이 방언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이 낮아지심의 영광을 합당하게 표현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신적 지혜의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이며, 성자의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광이요, 모든 복음 진리의 살아 있는 혼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과 천사들의 이해나 추론보다 훨씬 더 높은 하나님의 지혜의 신비를 믿음과 감탄의 유일한 대상이 되게 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나되, 모든 피조물보다 무한히 더 위대하심이 드러난다. 바로 이 신비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방식과 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게 된다.
(욥 11:7-9, 개정) 『[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롬 11:33-36, 개정)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가련하고 수준 낮고 불완전한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말한다. 그저 성경에 계시된 대로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의 본질을 직접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 마음이 떨리고 우리의 생각이 움츠러들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거룩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진리의 확실한 열매들과 효력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약속, “그가 곧 성소가 되시리라”(사 8:14)라는 약속이 교회에 주어졌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전서 2장 8절에서 해석되는 대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벧전 2:8, 개정)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리스도는 자기에게로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소가 되시며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 곤고한 사람이 성소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부족한 모든 것이 채워지고, 모든 두려움에서 건짐을 받으며,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모든 위험에서 보호를 받는 것이다. 죄롤 말미암아 곤고해하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영적인 질고와 고통 속에서 있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히 6:18, 개정)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시험으로 말미암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어떤 영적인 압박을 받으면서 침체되어 있는가? 이러한 어느 한 가지 경우에 해당되어 빛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채로 어둠 안에서 행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소생할 것이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에게로 피하려 할 때에는 그 사람의 뜻과 능력 이외에는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뜻과 능력을 다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처럼 자신을 비워 낮아지신 분,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충족하시는 자신의 영광의 특권을 사양하시고는 우리를 위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신 그분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곤고함 속에서 우리를 구출해 내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영원히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곤고한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성소가 되시지 않겠는가?
그분의 능력을 의심할 만한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무한이 낮아져 고난받는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전능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상실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와 영광스러운 은혜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서 하셨던 모든 일을 여전히 하실 수 있다. 한없이 낮아지셨음에도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곤고한 죄인들을 위한 성소가 되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믿음의 빛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낮아지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은 곤고한 자에게 안식을 준다. 이것이야말로 새 힘을 북돋아 주는 요소이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언하거나 입증하고 있다기보다, 믿음의 길에서 그 영광을 실질적으로 묵상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너무나 게으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제 믿음의 순례 길을 다 끝마쳐 가고 있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무서운 악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중요한 비밀들을 공공연하게 멸시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그 생명의 원리와는 관계없이 고백한다. 그들은 참되고도 핵심이 되는 사실을 약화시킨 채로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것이 겉으로 쾌활하고 용기 있어 보이면 되는 것인 듯이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부지런히 묵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는 일에 부지런하지 못하다면 믿음의 중요한 행사들이 일관성 있게 나타나지 못할 것이며, 중요한 순종의 의무들을 기꺼이 감당하지도 못할 것이다.’
믿음의 행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신저 격위에 관해 아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속에 나타난 영광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신적 격위에 관한 진리를 바르게 지킬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관한 개념을 체험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려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믿음이 바로 서는지 넘어지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의지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면서 가장 중요한 복음적인 동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행한 자기 부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마땅한 방식으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