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브리지스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3부 목사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비효과적 목회의 원인-강의안(3)

강대식 2016. 6. 23. 11:55

7장 영적 교만의 영향


사람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살펴본 자가 말하기를, 영적 교만은 사탄에게 그리스도인을 능가하는 이점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우리는 목회의 성공이 확대되기를 위해서 정말로 수고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이 놀랍게 잘 되어갈 때 아마도 우리 영혼에는 한 시간쯤의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교만은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원수이다. 이 교만의 유혹을 뿌리치려면 얼마나 많은 겸손과 얼마나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이 필요하겠는가.


헨리 마틴이 한 다음의 말을 자기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가.


사람들은 자주 나를 칭찬한다. 그리고 나는 기분이 좋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그 좋은 기분이 나는 혐오스럽다.


이기심은 이 죄의 독특한 특징이다. 우리는 혼자서만 다른 사람들보다 우뚝 서기 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훌륭한 재능을 칭찬하는 것이 마음 내키지 않는다. 우리의 가까이에서 빛나는 어느 것도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아무도 자신은 덫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인간 본성은 저명할 정도로 높아지게 되면 반드시 허영심의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미묘하게 유해한 영향력이, 강단에 올라가는 계단 주위에도, 거룩한 헌신의 순수한 대기 속에도 숨 쉬고 있다.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약하고 멸시받는 어리석은 자로 보이는 것에 만족하고(고전4:10),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위에 머물게 하기 위해 우리 연약함 속에 깃들여 있는 영광을 매우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기가(고후12:9), 결코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 사역이 겸손과 사랑의 맛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면, 임마누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고 또 그의 영의 나타나심으로 존귀함을 얻게 될 것이다.


8장 개인의 경건 신앙의 결여 또는 결핍


목사가 사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능력은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자기가 잘 알지도 못하는 구주를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로마의 한 웅변가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이 모르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진실로 힘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영구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록크(Locke)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를, “자기 자신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회심시키려 하는 일에 매우 부적격한 사람이다.”


청교도 백스터(Baxter)목사는 그의 특징인 엄숙함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에 거듭나지 아니하고 경험도 없는 목사들이 있는 것, 그리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전에 목사가 되는 것은 진실로 교회의 공통된 위험이고 재앙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께 마음을 다해 헌신함으로 거룩하게 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제사장들로서 제단에 바쳐짐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은 교회의 재앙이다.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와, 알지 못하는 성령과, 알지 못하는 성결의 상태를,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그리고 알지도 못하고 영원히 알 것 같지도 않은 영광을 전파하는 것, 이것은 교회의 재앙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에 전파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지고 있지 않는, 열의 없는 설교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침이라는 목회의 일반적 사역을 감당할 때 복음의 권능에 대한 체험은, 목회의 여러 다른 경우들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를 지시해주는데 필요하다. 구주에 대한 사랑, 그분의 말씀의 신실함과 거룩의 아름다움 그리고 영원을 바라봄은,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후4:13)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이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하면, 강단에서의 결실은 기대하기 어렵다.


죠지 허버트(George Herbert) 목사는 자신의 비머턴(Bemerton) 교회 취임식에서 말한다.


목사의 덕스러운 삶은, 목사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적어도 그와 같이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가장 강력한 말이 되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설득해서 거룩하게 만들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다. 레이턴은 말하기를,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이 강단의 가르침에서 유창한 열변 그 이상의 힘을 주기 위해서는, 이 ‘생활의 수사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 매우 바람직한 요건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말씀을 나눠주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그 말씀의 맛을 보아야 한다. 설교를 개인 경건시간의 성경 읽기와 조심스럽게 연결 지어야 한다. 아무리 잘 소화시켰다 해도 설교가 우리자신에게 먼저 적용되기 전까지는 결코 잘 전달될 수 없다.


이것은 우발적으로 성취하는 힘을 훨씬 넘어선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현재적 경험이며 자양분이고 열정과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 교인들에게 덕이 되도록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유익한 목사로 만든다. 우리 마음에 쓰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들의 깊고도 중대한 감동을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본 것으로 사물에 대한 보다 더 완전한 판단을 내리며, 따라서 목사의 실천은, 자신의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는 못하더라도, 그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다. 보통 대화에서는 아주 평범한 육적인 사람인데, 강단에서는 설교자가 거룩한 천사들을 닮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신앙심에 있어 믿음의 실재로 청중의 마음에 확실한 감동을 끼치거나 또는 그들의 영혼이 실제적으로 그 믿음의 실재와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천 마디의 공교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두 손으로 즉 우리의 가르침과 우리의 삶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내용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목사는 정기적으로 보여지는 인물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보여지는 인물이다. “거룩의 아름다움”은 단지 주일만의 부속물이 아니다. 거룩한 설교는 단지 한 시간이다. 하지만, 거룩한 생활은 그의 영원한 설교이다. 생활은 자기의 가르침에 대한 실제 주석이며, 감각에 호소하는 복음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입을 열지 않았을 때에도 자주 설교하셨다.


목사의 생활이 자기 사역의 생명이라고 옛 목사들이 바르게 말하였다. 혼(Horne) 감독은 말하기를, “세상을 책망하는 일을 떠맡은 사람은 세상이 책망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리겐(Origen)에게 “그는 가르치는 대로 살았다. 그는 살았던 대로 가르친다” 라고 말을 한 것 같이 우리도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목사가 자기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경건한 척 꾸며 보이고,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며, 경건한 신앙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 등은 매우 조심하고 경계하고 예민해야 할 것들이다! 우리의 개인적 인격과 공적 인격의 가장된 동일성으로 인해, 우리 양심이 찔릴 때가 자주 있지 않은가? 우리 중 가장 훌륭한 목사라도 사적인 골방에서보다는 강단에서 훨씬 더 신령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 하나를 죽이기보다는, 우리 교인들의 모든 죄를 비난하는 설교를 하기가 쉬울 것이다.


목사라는 직업적인 성격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잊기 쉽다. 그래서 그 의미의 정밀한 조사를 위한 시간을 내야 하고, 또 그 메시지를 목회에 적용할 시간뿐만 아니라 성경의 진리들을 영적으로 먹는 시간 또한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생기를 위한 양식으로서 공부하기보다 우리 교인들을 가르칠 재료를 찾기 위해서 더 많이 공부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주님의 발아래 놓기를 태만히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먹임으로써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개인의 인격이 우리 목회에 갖는 중대한 영향력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과연 인격이 힘이다. 인격의 결여는 우리 자신의 신앙심의 진실성과 복음의 실질적인 효과를 의심받게 함으로써, 우리의 성공을 망쳐놓는다.


또한 우리의 공적인 언행일치의 당연한 효과와는 별도로, 또한 우리 행동원칙들을 늘 실행에 옮김으로써 확산되는 은밀하지만 핵심을 관통하는 영향력이 있다. 그가 좀 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었더라면 그는 아마 좀 더 쓸모 있는 목사가 되었을 것임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은밀한 기도를 아주 열렬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하고, 자기 연구도 늘 계속하고 있으며, 자기 주님의 정신으로 흠뻑 젖어있으며, 뚜렷한 한 가지 목표가 분명하고, 인격이 곧고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인내하는 그가, 자기 사역에서도 존귀함을 받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은 특별한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겠는가? 자기 마음의 부요함을 많이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의 양떼는 그 목사가 자기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고 있다고 알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가 심방 왔을 때나 강단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자로서” 그를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9장 가족의 신앙 결여: 목사 가족과 사역 간의 연결 결여


가족 안에서의 목사의 존재는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퀘스넬(Quesnell)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듯이 “가족은 작은 교구이다. 이 교구에서의 첫 시금석들은 교회에 대한 열심, 경건, 그리고 신중함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오”(딤전3:5). 그 사람에게 집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교구에서 제대로 수행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리의 가족을 통해 주어진 증거는 규정의 필요성을 예증하고 있다.

 

우리 목회가 가족의 하위 영역에까지 두루 퍼지게 하라.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일을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집안의 각 식구들을 생각하라. 후퍼 감독의 목사관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우리가 “교회나 성전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곳의 모든 모서리에는 미덕과 선한 본보기와 정직한 대화와 성경 읽기의 냄새가 흐르고 있었다.” 청교도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가 집안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고 있을 때, 그는 일어나는 일 모든 것을 영적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주위에 있는 모든 이에게 꿀과 같은 무엇이 떨어졌다.”


필립 헨리의 가족 경영은 가정의 경건함과 단순함 그리고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 자녀와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창18:19) 했으며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이것이 가정의 목사 즉 자신의 집안을 잘 다스리는 목사의 좋은 모델이다. 목사는 산 위에 세운 성읍이라 숨길 수가 없다. 그는 자기 개인의 인격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자기 가족들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자기 아내의 행동, 자기 자녀들의 복장과 습관들, 자기 가구, 그리고 식탁 위의 음식 등이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찰 대상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우리 가정생활이 상당히 넓은 범위에까지 우리 교인들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목사의 가정생활이 자신의 가르침과 일관되지 않으면, 목사가 의무 태만이나 죄에 대한 적극적인 방치의 구실을 제공하게 된다.


이제 목사가 가르침뿐 아니라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는 권면들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조롱만 살 것이요, 그 사람들의 죄의 습관을 인정해주는 것이 될 뿐이다. 우리 식구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보이거나 또는 이 세상의 자식들로 보일 때, 그것이 교인들에게 끼칠 영향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목사 자신이 생활과 삶에 일관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가정의 경제생활에 세상적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면 신실한 목회의 능력은 완전히 마비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므로 비싼 것을 사들이는 모든 습관들과, 장식품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세상의 풍습을 좇는” 쾌락과 허영의 모든 모습을 억제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필립 헨리와 스콧트 목사의 덕스러운 실천처럼, 목사의 가정 예배는 매일 목회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 예배가 가르침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묵상의 영적인 습관이 필요하다. 이따금씩 교리문답식의 가르침을 섞는 것은 이 일에 유용한 다양성을 줄 것이다.


10장 믿음의 부족


우리의 모든 실패는 궁극적으로 믿음의 부족에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적은 것을 구하며, 너무나 적은 것을 기대하며, 적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은 것을 받으며, 적은 것을 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믿음은 목사의 사역의 생명력이자 그의 성공의 샘과 같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지 않은 자신감은 믿음이 아니라 공상일 뿐이다. 그러나 목사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며,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 비록 불확실할 때가 매우 자주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 단호하고 열렬한 말씀으로부터 많은 것이 기대될 것이다. 자신을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효과적인 사역에 커다란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사역의 주된 어려움은 우리 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있으며, 우리 자신의 불신앙과의 갈등에 있고, 게으름이나 자기의존의 형태에 있는 것이다. 믿음을 정말로 행동으로 옮길 때 어려움의 정도와 그 악화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제이다. 첩첩이 쌓인 어려운 일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약속 그 이상일 수는 없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한탄할 정도의 가슴 떨리는 염려거리를 헤쳐 나가기 위한 우리의 대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2:16-3:5).


우리의 사역이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보다 훨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약속은 그 일을 충분히 해낼 것만큼 신실하게 맹세된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해결되지 못할 어려움이란 없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함을 믿음의 원리에 투자하신다(막9:23). 가장 작은 밀알과 같은 믿음이라도 산을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 이렇게 제일 약한 믿음의 실행도 그렇게 힘이 있거늘, 믿음의 습관에서 기대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믿음은 사역의 모든 분야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행사를 영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행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할 때, 우리 손에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고 있다는 기억은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겠는가! 우리의 공적인 설교에 담력을 주는 것은 믿음이다(벧후2:5; 히11:27; 행4:24, 31). 하나님의 임재와 그 권능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믿음의 사람은 가장 성공적인 설교자이다. 반면에 믿음 없이 형식적인 설교를 했다면, 그것은 완전히 비생산적인 설교이다. 휫필드는 자기 메시지에 회심의 보증이 없이는 좀처럼 설교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우리 사역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할 재능도 없고 달란트도 없다”고 우리는 말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약속을 의지하면 분명히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완전한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약1:5). 만일 그 능력이 보류되었다면,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하였으니, 그렇게 겸손하게 만드는 믿음의 행사는 얼마나 유익하겠는가? 그러나 겸손한 척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며 투덜대는 것보다 더 믿음을 마비시키고, 실행의 바퀴들을 더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때로 낙심이 될 때 우리는 마치 이 일에 아무 소용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앞에 눈에 보이는 열매가 아무것도 맺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약속을 온전히 확신하면서 가장 큰 시도를 하라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보증하고 있지 않은가?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고후4:7) 우리는 잊고 있지 않는가?


우리의 사역을 믿음의 일로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불신앙은 어려운 일을 바라본다. 믿음은 약속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신앙은 우리의 일을 노예의 일로 만든다. 믿음은 우리의 일을 “사랑의 수고”로 생각한다. 불신앙은 우울한 낙담을 끌어들인다. 믿음은 성공을 기다림으로 충분한 인내, 즉 소망의 인내를 만든다(살전1:3). 모든 어려움이 불신의 열매였던 것처럼, 불신 또한 모두 믿음의 인내로 마침내 극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노력을 갱신하여 활동적이고 힘 있는 근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믿음의 토양 속으로 더 깊숙이 내려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느냐 인간의 팔을 의지하느냐에 따라, 사역이 성공하든지 쇠퇴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대한 비결은 습관적으로 우리 눈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구주를 바라보는 대신 파도를 바라보았던 베드로는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마14:30). 우리 사역의 어려운 면만 바라보고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우리 머리되신 주님의 팔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도 낙심이 되어 가라앉게 될 것이다. “믿으라, 앙망하라, 일하라”는 것이 우리 사역의 슬로건이다. 약속을 믿으면 앙망할 줄 아는 힘이 생긴다. 앙망하면 일할 힘이 생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다.


인격과 사역에 있어 목사의 믿음의 행사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역시 유념해야 한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현실을 마음에 구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위임받은 위대한 일들은 영원 세계와 직결되어 있다. 영혼이 귀한 것은 영혼이 영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마16:26).


이 세상의 고난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고후4:17-18) 늘 묵상함으로 버틸 수 있고, 또 우리 안에 계시될 보다 나은 영광을 생각함으로 견딜 수 있다(롬8:18). 오직 하늘나라의 영원히 지속되는 성격과 정확히 비교해보아야만, 우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이 세상을 실감하게 된다(요일2:15-17).


은혜로우시고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성품을 기억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신실한 목사라면 누구나 “교회의 감독이 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폴리캅(Polycarp)의 말의 기초위에 서 있어야 한다.


우리 주께서 우리가 연약함을 잘 알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 연약함 때문에 넘어지게 만드시지는 않을 것이다. 주님 한 분만으로 꽉 차있는 우리 창고에는 그분의 다함없는 충만이 저장되어 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받아주시는 그분이 우리의 부족함을 덮으실 것이다. 그분은 규칙들과 지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중대한 우리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과 은혜도 주신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의지하는 영과 단 한 개의 눈과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셔서 우리 자신과 우리 달란트를 그분을 섬기는 일에 남김없이 바치게 하신다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걱정 근심거리들도 물리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역을 할 때 기뻐하며 우리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신이 가진 힘과는 끝까지 매일 싸워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걸림돌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불신의 힘은 성공을 이루지 못하게 하여 맥이 빠지게 만들거나, 외형상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자만심을 부추겨 놓는다.


우리 각자는 버넷 감독의 탁월한 충고를 따르자.


특히 자기 자신을 검증해보자. 복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그 자애로움과 부드러움, 그 온유함과 겸손, 그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복음의 주가 되시는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하여 그렇게나 환하게 빛났던, 그리고 그 속에 그렇게나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던, 그것들이 있는지 점검해 보자. 이러한 것들은 단지 이 사랑스러운 미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칭찬할 뿐 아니라 우리 구주의 가르침을 자기 교인들에게 장려할 때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고 있다.

과연 이런 그리스도인다운 언행일치의 부족 때문에 우리가 위임받은 일의 신용장이 우리 교인들에게 무색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충실성과 겸손, 일관성, 자기부인 그리고 사랑을 빼놓고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그들이 생각하게 만들 수가 없다. 이제 교회는 소경과 절름발이들을 신임할 수가 없다. 교회 목사들의 삶은 거룩함의 도덕적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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