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권, 23장, "최후의 운명"
제 23 장 최후의 운명
사람들이 이 마지막 심판에 대한 진리를 깨닫기만 한다면, 세례 요한, 우리 주님, 모든 사도들이 권면한 대로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마3:7) 할 것이다.
1. 최후의 심판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
어떤 사람들(자유주의 신학)은 심판이라는 개념 전체를 싫어하고 혐오한다. “심판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맞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 오늘날 인기 있는 개념은 소위 보편주의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유일한 심판은 이생에서 만나는 교정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속적인 영역에서 나온 개념으로 비성경적이다. 벌을 줌으로써 사람들을 개선시킬 수는 없으며 사람들은 은혜로 인해 변화되며, 형벌은 형벌일 뿐이다.
2. 성경이 말하는 최후의 심판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운명은 최후의 심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단지 우리의 운명이 선포되고 판결이 공표되는 중요한 순간일 뿐이다. 이 사실에 대한 오해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의문과 의심의 원인인 것 같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 이해해야 할 것은 그것이 커다란 공개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이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최후의 심판은 아니다.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주님이 재림하시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 우리 몸이 부활할 때 일어날 것이다. 온 세상이 모인 자리에서 모든 개개인의 운명이 공포되는 엄청난 공개적 사건일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목적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아 온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최종적으로 단언하는 것이다. 구속과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한번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확증되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구원에서 나타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한 자들이 형벌을 받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날 것이다.
누가 재판관 역할을 하여 그 엄청난 선언을 할 것인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심판하는 일을 아들에게 위임하셨다. 그 아들이 중보자이시며 인자이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자신들은 공정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불평할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신다.(마25:31-32, 요5:21-23, 26-27, 행10:42)
누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므로 심판을 받지 않으며, 불신자들만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활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일어나고 두 집단의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다.
“책들이 펴 있고 또다른 책들이 퍼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그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과 저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0)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 보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칭찬을 듣고 대단히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언제 이 일을 하였나이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한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 역시 그 심판의 날에 심판받을 것이라고 가르친다.(벧후2:4)
누가복음 12장, 고린도전서 3장,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심판에 대해 의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매를 많이 맞을 종과 적게 맞을 종에 대해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 날이 각 사람의 공적을 밝힌다고 말한다. 바울은 신자들 사이에 구분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공력이 불로 시험받을 것이다. 사람의 공력은 완전히 타 버릴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의 공력은 실제로 계수되어 차이를 만들어 낸다.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1) 그것은 우리의 칭의가 아니라 상급과 관련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전도자로서의 청지기직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처럼 꾸준히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상급을 위한 심판이 위대한 심판의 날과 함께 있을지, 아니면 그 후에 있을 것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는 모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이신칭의라는 위대한 교리를 위해 싸워야 하지만, 만일 이신칭의를 주장하느라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주님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며,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일이 내세에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폄하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하늘나라에는 슬픔이나 한숨이나 불행이나 비참함이나 우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완벽하게 행복하고 지극한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보게 될 것이지만 가장 신실했던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심판으로 인해 최후의 영원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최종적 운명을 알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21장에서는 신자의 운명이 완벽하게 드러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얼마나 멋지게 묘사되어 있는가? 우리는 슬픔이나 탄식이 없는 완벽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이사야가 11장과 65장에서 예언한 일이 성취될 것이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 모든 것 심지어 자연 자체도 영화롭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된 세상에서 영화된 몸을 입고 살 것이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상태이자 영원한 운명이 될 것이다.
오, 복된 날이로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이 일들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 빛 안에서 삶으로써 장차 멸망할 운명인 이 정죄받은 세상에서 잠시 살 때 수월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보게 되어 함께 거하며 주님의 영원한 영광을 함께 나눌 자들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교리강좌 3권의 요약에서 누락된 22장, 23장을
한가족교회 김영희 사모께서 요약하여 보완하여 주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