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4부 목회사역의 공적 임무(강의안 3)
5장 성경적인 설교 방법
1. 주제 설교와 강해 설교
우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은 주제 설교이거나 강해 설교이다. 주제 설교는 본문 즉 성경에서 떼어낸 작은 부분으로부터 설교하는 것이며, 강해 설교는 성경의 큰 부분 그리고 연결된 부분에서 설교하는 것이다.
주제 설교의 목표는 이중적이다.
첫째, 문맥과 연결시켜서, 본문 안에 있는 단 하나의 뚜렷한 명제로 만드는 것이다.
둘째, 그 명제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진리에 대해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진리의 적용을 그 장소와 때에 따라 다양하게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똑같은 일반적 진술의 지루한 반복을 예방해 준다.
강해 설교는 주제 설교와 신중하게 혼합을 하면 매우 중요한 설교 방법이 된다. 진리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서로 연결된 견해들은, 그리스도인의 지성과 특권과 확고부동함에 똑같이 도움을 주면서,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이 방법은 문맥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내용을 본문 위에 세우는 습관을 피한다. 그리고 더 많은 이해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를 따로 따로 보는 것에서 오는 위험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우리 교인들이 좀 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리하여 고립된 본문의 부분적인 인용에서보다는, 거룩한 논쟁의 일반적인 일련의 흐름으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은 더 확실히 확인된다.
강해 설교는 초대 교회 설교의 두드러진 부분을 형성하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강해 설교의 최고 모델이었으며 고대 교회의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강해의 과정은 너무 길어서는 아니 된다. 주제 설교에서 주제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과 우리 교인들의 상황을 특별히 고려해서 선정해야 한다. 설교를 할 때, 청중의 흥미가 쇠퇴하고 있는지 잘 지켜보아야 하며, 두 방법을 서로 바꿔가면서 매우 다양하게 설교하고 있는지, 그리고 두 방법의 장점을 다 이용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2. 즉흥 설교와 원고 설교
즉흥 설교란 우리는 원고로 쓰지 않은 설교라는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준비 묵상으로 소화되어 배열된 설교, 따라서 그 아웃라인을 언어로 채우는 일만 설교 전달 시간에 되도록 남겨진 그런 설교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흥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느껴야 한다. 그리고 글로 쓰인 매개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것보다, 설교자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전달은 좀 더 직접적이며 그 교감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즉석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설교 표정, 자세와 제스처 등은 좀 더 가깝고, 개인적이며 시선을 끈다. 그리고 즉흥 설교는 전달의 순간에 설교자의 눈앞에 펼쳐진 청중들의 얼굴 표정들을 볼 수 있기에 대충 듣고 있는 청중을 일깨우기 쉽다. 사람들은 논쟁으로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로빈슨 목사는 반대로 매우 조심스러운 단계들을 권하였다. “7년 동안 자기 설교 전부를 인내를 가지고 모두 다 글로 쓰기 까지는, 아무도 원고 없이는 설교할 시도조차 하지 말라. 그 다음에, 조심스럽게 이따금 그리고 점차적으로 즉흥 설교를 시작하라.” 그는 긴박하게 꼭 필요할 때만 이 방법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정신의 준비 훈련이 얼마나 되어 있느냐, 타고난 장애물들이나 영적인 방해물들을 얼마나 극복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설교자의 특성 안에서 형성된 정신이 그 준비가 정확하고 질서 있게 되어 있으며 넓고 확실한 자료들로 채워져 있고 많은 목회 실천 훈련이 되어 있다면, 훨씬 더 짧은 기간 안에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버넷 감독은 광범위한 주제들에 대해 묵상하는 습관을 일정하게 가지고, 연구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때마다 자기 생각들을 소리 내어 말함으로써, 이 은사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달성이 쉽다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 퍼져있다. 우리가 다룰 주제가 이해되고, 소화되며, 느껴질 때까지, 주제를 연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충동이나 유창함이 아니라, 좋은 습관이다. 단순한 스타일과 결합된 확실한 지식의 체계이며, 활기 있고 분명한 태도이며, 성경의 무한한 보물로 가득 채워진 정신인 것이다.
설교의 유창함은 서재에서 열심히 연구한 결과이므로, 원고로 쓰는 설교의 장점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루한 반복과 결점 있는 표현 방식, 중요한 생각들의 흐름의 배열의 혼동을 피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가진 자료를 좀 더 간결하고 확실하고 그리고 명료하고 정확한 스타일로 구체화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한 로마의 웅변가는 “연설을 잘 하려면 많이 써 보는 것이 최선의 준비”라고 추천하였던 것이다. 말이 유창하기는 하지만 내용을 갖추고 있지 못한 설교자는 말이 말아지고 미사여구를 늘어놓게 되며, 알맹이가 없고 재미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고대의 기록에는 즉석 설교 형태뿐만 아니라, 원고 설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오리겐은 완전히 즉흥적인 방법으로 설교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시에 교부들은 설교를 썼다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버넷은 종교 개혁 시대에 설교 낭독 관습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세커(Secker)대감독은 원고 설교와 즉흥 설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나서, 간략하게 노트를 써서 즉흥적으로 전당하는 방법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잘만 하면, 이 방법이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연구를 많이 하지 않고 경험을 많이 쌓지 않고서는, 사람은 설교의 좋은 습관을 기대할 수 없다. 젊은 초보자들은 좀 더 정확하고 공을 들이는 일에 자기 자신을 익숙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스타일과 표현을 먼저 획득하고 나면, 나중에 설교할 때에는 훨씬 쉬워질 것이다.” 성경을 현명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머릿속에 든 것이 없이 잘못 행해지는 즉흥 설교보다 낫다. 즉흥 설교는 방법이지 내용이 아니다. 전달 수단이지,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다.
루터는 말하기를, “다른 방법으로는 설교를 할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꼭 원고 설교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노트를 가지고 설교하였다.” 홀 감독은 말하기를, “목사에게 원고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사역에 대한 존중이며 청중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6장 성경적인 설교 정신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잘 공부해보면, 이 주제에 대한 최고의 예증들을 얻을 것이다. 우리 주님의 사역은 완벽한 본보기가 되며, 사도들의 사역은 이와 아주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 담대하게 하라
사도들이나 바울은 담대하였다. 목사도 담대해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더 담대해야 한다.
죄의 책망은 목사가 담대해야 할 중요한 한 부분이다. 경우가 꼭 그렇게 해야 할 것을 요구할 때, 책망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가 되게끔 여러 사람 앞에서 해야 하며(딤전5:20), 잘못한 사람에게 죄의 자각의 수단이 되도록 날카롭게 하여야 하며(딛1:13),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권위를 가지고 해야 하며(딛2:15; 고전5:4), 궁극적으로는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딤전5:1-2; 딤후2:24-25), 목회 서신에서의 성경적인 규칙들과 권면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항상 죄인이 아닌, 죄를 겨냥해서 책망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우리 메시지를 싫어하는 자들을 놀라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리스도의 참 양떼의 신뢰와 우리 양심의 인정을 확보하게 만든다.
2. 지혜롭게 하라
사람들을 가르칠 때의 지혜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지혜로운 왕은 말하기를, “지혜는 인도하기에 유익하니라”(전10:10; 12:10)고 하였다. 지혜는 우리 주님의 필요 도구였다(사11:2-3; 50:4). 이것은 무리들과 심지어 그분의 원수들도 많이 증거하는 바이다(눅4:22; 요7:46). 그분의 설교는 엄숙하고도 중대하며 혼합되지 않은 진리로 차 있으며, 신중하게 성경 구절에 호소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우연발생적인 일들을 자기 사명의 위대한 목적에 잘 적용시키는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어느 모로 보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나타남이었다.
우리의 공적 목회의 지혜는 우리 설교 원고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다. 설교 원고가 지혜로울 때, 가장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고 지식 있는 자라 할지라도 불평할 아무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청중의 마음이 산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주제의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주제의 모든 부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배열의 명쾌함이 있어야 하며, 말의 어떤 부분도 인간이 만든 언어에 의해 숨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말의 단순함이 있어야 한다. 본문 그 자체에 있는 성령의 마음을 정확히 보면 자연히 주제의 통일성이 생긴다. 주제의 분명한 성격을 분별해내면, 배열이 용이해진다. 배열에 활기를 주입하면, 저절로 적절한 “설교의 명료함”이 확보된다.
그리하여 판단력은 주제에 대한 명확한 인지에 도달하게 된다. 의지는 동의할 준비된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정서는 현명하면서 실제적인 자극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기억은 잘 보유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게 될 것이며, 양심은 일깨워져 실천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여러 가지 다른 요점들의 혼합 때문에 통일성이 흐트러지고 여러 부분들의 연결이 깨어졌을 때, 다루고 있는 주요 대지들의 설명이 없이 배열이 일반적인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 생각이 핵심 주제로 형성되어 들어가지 않을 때, 명확함과 교감, 그리고 적용의 힘의 부족이 그 결과로서 나타난다.
“지혜롭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해 바르게 연결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지혜롭게 집을 짓는 자는 기초를 올바르게 놓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어떤 식으로 지을 것인지 주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재료들의 서로 다른 질들을 구별하고(고전3:10-15), 교리를 기초에 놓으며, 그 위에 산돌들의 상부구조물인 의무들을 세워서, 거룩한 건물이 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분명하게 해놓으신 것을 혼잡스럽게 만들지 않고, 하나님이 서로 연결시켜 놓으신 것을 따로 떨어뜨려 놓지 않으려고 마찬가지로 경계한다. 빈틈없는 소심함 속에 진리의 가장자리에서 멈춰 서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주제넘게 성스러운 장벽을 뛰어넘으려하지도 않는다. 전체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딤후3:16) 더 좋게 만들 것이다.
복음을 이렇게 지혜롭게 나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일은 복음을 만들어 내거나 복음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그리고 온전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일에 있어 진리의 뚜렷한 기준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이 기준은 단지(중생, 믿음, 회개와 같은) 어떤 자격요건들을 구원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천 해석자 가운데 하나”(욥33:23) 같이 그 자격요건들의 참 성격과 속성들을 설명하고, 그것에 도달하고 굳게 서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메시지의 정확한 적용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한다. 특정 진리와 그 논증, 그 방법, 그 언어, 그리고 말의 분별력에 있어, 가르침과 덕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것을 사용하여야 한다. 우리 주민이 개인들의 경우를 사사로이 다룰 때는 물론이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무리들에게 가르친 말씀,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씀 간의 차이는 얼마나 달랐던가! 사도 바울은 자기 사람들의 기질에 맞게 목회상의 적용 방법을 얼마나 정확하게 조절하였던가! 경우에 따라 자기 목소리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들의 상황이 요구할 때에는 그들에게 회초리를 가지고 가든지, 사랑으로 가든지, 온유한 마음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목사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진술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사명을 자기 교인들의 각기 다른 기질에 맞게 조절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가르침을 각기 다른 단계의 그리스도인의 진보에 맞추는 것은, 설교 사역의 성경적인 지혜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복음은, 더 이상의 가르침이 불필요할 만큼 한 두 번의 설교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초보적인 진리를 ‘젖’에 비교하며 어린아이들에게 적합하고 필요한 자양분이라고 한다. 보다 더 깊고 신비한 가르침들은 ‘단단한 식물’에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좀 더 성숙한 영적으로 성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좀 더 간단한 진리로부터 더 높은 것으로 이끄셨다. 이렇게 다양하게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진실로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우리는 “이미 있는 진리”(벧후1:12)를 다루어야 한다. 현재의 긴급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진리를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비록 진리 그 자체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전달 방식은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 교리나 교훈, 경고, 격려, 특권 등의 형태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은 진술이나 비유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비유로 예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에서 똑같이 단순함과 충실함으로 전해야 한다(복음의 질을 떨어뜨리면 안 됨).
바울의 서신을 보면 서로 다른 진리 체계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체계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 어떤 진리의 요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각각의 교회의 상황에 맞게 그 반포 방식을 달리 하고 있다. 모든 경우에서 그에게 주어진 지혜를 따라, 그리고 그의 모든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인의 기질이 우리 목회의 성격에 끼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 개선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자기 방식을 잘 알고, 조심하며, 균형을 갖추도록 하자. 자기 방식은 그 자체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교리적인, 체험적인, 실천적인 설교자).
3. 명료하게 하라
설교의 진수는 그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어떻게 각색을 하느냐에 있다. 그 진술은 성경적이요, 그 성격은 체험적이며, 그 실행은 영적일 수 있다. 설교 방법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그 설교는 목표로 하는 대상들에게 적용이 되지 못한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인위적인 수사법의 과시가 없고, 풍부한 비유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 주님의 강화는 단순성의 완벽한 모델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모든 설교를 가장 알기 쉽게 하라. 군주를 쳐다보지 말고, 평범하고 단순하며 학식이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라. 이 사람들의 옷으로 군주에게 입히라. 나는 성경에 대해서 서투른 사람들에게 매우 단순한 종류의 설교를 한다. 그 같이 단순한 설교가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이다.
선지자 중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명령를 받았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합2:2). 이 명령이 그 정당한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문체, 주제, 그리고 전달 방법에 주목하여야 한다.
평범한 문체가 명료한 생각들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적합하다. 세커 대감독은 우리 교인들의 주목을 사로잡는 수단으로서 신중하게 추천한다.
설교를 매우 분명하게 하라. 당신이 쓰고 있는 용어와 어법들은 당신에게는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못 알아 듣는 말일 수도 있다. 이해 못할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주 낮은 수준의 말을 쓰라.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자주 하는 실수이다. 피넬론(Fenelon)의 말은 많은 개신교 회중에게 적용할 수 있다. “항상 3/4의 보통 회중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을 모르고 있다. 설교자는 이 원리들을 모든 사람이 완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것들을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들을 설명하는 데까지 뻗쳐져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의미는 그 말 속에 숨어 있어서, 말의 설명 없이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말을 설명해주지 않으면 교육에 큰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마13:51)는 질문을 적절히 해야 할 것이다.
“천사의 말”(고전13:1)로는 서로에게 우리 생각들을 알아듣게 소통할 수가 없다. 이 소통의 연습에는 상당한 수고와 부지런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많은 설교자들이 알아내었다. 평범한 말을 하기 위해 우리가 수고한다고 해서,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위엄을 갖춘 간결함과 아름다운 비유와 하늘의 고상함을 빼앗는 것은 아니다.
주제의 선택에 있어 평범함 또한 성경적 설교 정신의 특징이다. 여기서 고대 윌슨 감독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자.
마음에 가르쳐주는 것도 없이, 마음을 즐겁게만 해주는 그런 설교와 주제들을 피하라. 나는 청중을 즐겁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청중이 자기 가슴을 치면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당신이 그들의 능력 이상의 내용을 말하거나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나 용어로 말할 때, ‘양은 네 목소리를 듣는다’는 말씀을 어떤 진리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교자들이 자기들이 가르쳐야 할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은 너무도 흔히 있는 일이다.
멸망해가는 죄인들로 이루어진 무지한 회중에게, 의사소통의 중대한 매개체로서 “이해하기 쉬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그들이 설교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은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4:6). 왜냐하면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평이함으로 모든 다양한 예화와 논지와 호소와 간청을 품어 안으라. 평이함으로, 두려움과 사랑, 경고와 격려의 모든 동기의 수행을 설교하라. 그러나 저속한 꾸밈으로부터는 조심스럽게 분리시키라. 미숙함의 성실하지 못한 꼼꼼함으로부터 자유하라. 그리고 사역의 위대한 목적을 위해 남김없이 헌신하라. 항상 분명하고 타협하지 않는 용어로 복음의 메시지를 적용시켜라. 그들이 자기의 모든 성채를 빼앗기고 모든 생각이 포로가 되어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전투에서 죄와 사탄을 쫓아내라.
4. 뜨겁게 하라
머리를 깨우치고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목회사역의 주요한 두 가지 목적이다. 성경적인 설교의 정신으로서, 전자는 지혜와 명료함을 요구하고, 후자는 뜨거운 열정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의 결합은, 목사가 ‘불타고 있으면서 동시에 환한 빛’이 되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또 ‘자기 분야의 태양’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열심의 신령한 열을 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의 신령한 빛’을 비춰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뜨거움에 관해서 말해보자. 만일 심오하고 인정받는 관심 주제에 대해 뜨겁게 우리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면, 우리의 대 사명을 전달할 때에는 더욱 더 뜨거워야 할 것이다. 생사가 달린,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의 문제로서 뜨거운 설교는,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원리들에 따라 움직이는 매우 강력한 동기 및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찰스 5세는 독일 종교 개혁자 중의 한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대단한 활기와 헌신으로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돌들이라도 울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정신이었고(요2:17), 그분이 택하신 사도들의 정신이기도 했다(행17:16). 그 동일한 정신은 휫필드 사역의 주된 능력이 되었다. 그의 말의 엄숙함과 안으로부터 나오는 내면의 깊은 감정이 한 마디, 한 마디 그의 말에서 터져나왔고,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사랑의 에너지로 발산되었다. 청중은 그가 타고난 설득력과 더불어 그가 가진 연민을 보았던 것이다. 수천 명이 ‘그 부싯돌의 번쩍이는 불은 강물의 근원으로 변하였다.’ 세커 대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렇게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 능력은 매우 귀한 축복이다. 이 능력을 조금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자기가 설교할 말씀으로 더 깊은 영향을 받도록 수고를 하면, 설교를 상당히 개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훨씬 더 설득력이 많을지를 생각해 보는 노력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에게 졸면서 설교를 듣는 그들의 상태를 깨워줄 만한 것이 거의 없고, 그들이 구원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료하고 적중하게 그들에게 강권하는 것이 거의 없는 부드러운 설교는, 청중을 그 어느 때와 다름없이 달라진 것 없이 무지한 채로 버려두어, 자장가를 불러 그들의 영원한 안전이 치명적인 상태로 들어가게 만든다.
심지어 워버튼(Warburton) 감독까지도 말하였다.
참회하는 청중의 격정과 감동을 목표로 감동적으로 설교하는 것이, 모든 다양한 가르침의 설교 중에서 아마도 가장 효과가 클 것이다.
죠지 허버트의 교구목사는 말하였다.
설교할 때 뜨거운 설교로, 청중의 집중을 확보한다. 뜨거운 열정이 많이 있는 곳에는 뭔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는 법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뽐내는 열변이나 극장식의 전시효과를 시도하거나 감정에 사로잡힌 설교는, 우리 직분의 깔끔한 품위를 떨어뜨린다. 불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 불이 빛나게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은 열을 주지는 못한다. 설교는 폐활량에 의해 좌우되는 사역이 아니다. 제스처의 모방도 아니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자극도 아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함을 받는 마음의 신령한 능력이며,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는 마음의 에너지인 것이다.
우리 목회에 뜨거움이 부족한 것은, 그 효율성에 심각한 장애물이다. 왜냐하면 비록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뜨겁게 전달하면, 벌거벗은 진리에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느낄 수 있는 표현이 더해지며, 이것은 확신을 가장 생명력있게 하는 원천중의 하나이다.
우리 성도들은 자기들의 이해를 바라기도 하지만, 자기들의 마음도 언급해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원한다. 관통하는 뜨거움과 침투하는 능력과 사랑에 찬 간절한 부탁으로 논지에 힘이 실린 말을 원한다. 확신에 깊이 감동된 마음의 표현만이, 신앙이 일차적이고 즉각적이며 보편적인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백스터의 열정적인 변론은, 우리 설교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복음에 불순종 하고 있다고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외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 도시를 파괴시키는 불로 죄를 다루고 있는가? 그리고 억지로라도 그 불에서 사람들을 끌어당겨내고 있는가? 사도 바울처럼, 그들의 육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에 대해 울면서 그들에게 말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계절을 가리지 않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들에게 많은 눈물로써 가르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영혼의 구원에 관해 그들에게 간청하고 있는가? 세상적인 신중함이 우리의 열정을 통제하고 있어서, 청중의 폐부를 꿰뚫어야 할 설교를 생명력이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인들의 영혼을 가차없이 공격하는 그 죄들을, 우리는 얼마나 부드럽게 다루고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늘의 것들에 대한 진지함의 부족 때문에 사람들의 영혼이 형식주의로 흐르고, 습관적으로 말씀을 부주의하게 듣게 되어 그들은 파멸하는 것이다.
5. 부지런히 하라
온 마음과 온 시간을 자기 아버지의 사역에 바쳤던 우리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면 얼마나 배울 점이 많은가! 그분의 대단한 근면함은 자신의 공적 사역에 집중되었다. 예루살렘 계실 때, 그분은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눅19:47; 21:37; 22:53).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어느 곳이든, 그분은 권면이나 교훈 또는 예화로 가르치기 위해 입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요7:37; 마5:13). 복음의 첫 일꾼들과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주님의 본을 바짝 따랐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과도하게 전하는 데에서 생기는 위험성보다는, 나태함에서 훨씬 더 큰 위험성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앞에서 회계할 그 날을 엄숙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1-2) 즉시 말씀을 전하라고 그의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엄하게 명령하고 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이 회개하지 않은 많은 청중은 초대 교회때만큼 많지 아니한가? 그들 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어린 양이 설교자없이 어떻게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요10:16, 27; 롬10:14) 그 어떤 수단도 하나님의 의사소통의 이 지정된 통로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의 부지런함이 있어야 한다. “감독은 설교하면서 죽어야 한다”는 주얼 감독의 말은 그의 죽음에서 놀랍게도 그대로 확인되었다. 그의 열심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그의 죽음을 재촉했던 것 같았다. 그림셔(Grimshaw) 목사는 한가한 주간에는 열두 번 또는 열네 번의 설교 약속이 잡혀 있었다.
땅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소낙비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오면, 아무리 단단한 물체라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의 가르침은 비처럼 내려야 한다(신32:2; 히6:7). 그 가르침은 사랑의 온유함으로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성실함으로 자주 내려야 한다(사28:10). 근본적인 진리들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깊고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치는데 필수적이다. 우리 목회가 끝나는 날까지 설교하여야 할 건전한 교리다. 게을러서 우리가 전에 설교하였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발밑에 앉아 신선한 가르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배우고, 또 우리가 배운 것을 항상 가르쳐야 한다.
6. 전심으로 하라
사역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모든 것들을 즐겁고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한결같이 이 목적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목적이 우리의 본보기이신 주님으로 마음을 충만케 하고 진행과정을 인도한다(요8:50; 5:41).
전심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고 있다. 설교 원고 작성만 해도 그렇다. 성경 연구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이기적인 생각에서 흘러나와, 동일하게 부패한 통로로 흘러가고 있는가! 우리 주님이 임재하시는 강단에서, 우리의 설교 전달에, 우리의 목소리 어조에, 말의 강조에, 활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주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그 형태와 행위 속에, 우리 자신을 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또 설교가 유익하게 적용이 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욕구보다는, 설교가 칭찬을 들었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은 욕구가 더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가? 테일러 감독이 자기의 목사들에게 했던 다음의 충고를 들어보자.
아무도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려고 설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칭찬을 듣게 되었다면, 즉시로 경계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의 허영심을 막아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인정과 감사의 즉각적인 행위를 취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헤롯은 이것을 게을리하다가 천사를 통해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사람들에게 대한 선고가 아닌 다른 것이 될까 두려워 떠십시오.
리치몬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 어떤 의미로도 인기 있는 설교자가 되고 싶은 바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에 설교하는 설교자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복음은 결코 과시하려는 의도가 없다. 오히려 세상의 유익을 위하여 보물처럼 나누어 주어야 한다.
“우리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달변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훌륭한 언어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영원한 유익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경건한 전심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에서 최고의 위치를 갖게 되기를 바라고, 그 마음의 상응하는 표현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이다. 이것이 “신랑의 친구들”(요3:29)이 가지고 있는 참 성격이다. 신랑의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 구애하며,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구하고, 우리가 존경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그분에게 데리고 오려고 열렬한 어조의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특권은 복음의 시중을 드는 것이다. 그리고 전심을 통해 우리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다. 이 유익함은 인기와는 상당히 구별된다.
7. 사랑으로 하라
사랑은 우리 직분을 아주 크게 구별해주는 특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흘러나오는 구원을 나타내준다. 모든 설교의 정신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엡4:15)은 아마 우리 직분을 몇 마디의 적은 말로 가장 완전하게 묘사한 것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 사역의 전체 분위기에 퍼져있어야 한다. 사랑의 정신을 정확하게 나타내지 못하면 진리의 대의명분이 약화된다. 예를 들어, 한 사도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기를, 만일 그가 “사람의 방언과 천상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보다 더 나을 바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고전13:1). 사랑에 찬 어조로 그리고 활기에 찬 어조로 설교를 하면서, 강단에서 회중에 앉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머니와 자매와 형제”로 내려다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심지어 회심하지 않은 자들도 그렇다. 회심의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때는 잃어버린 죄인들을 우리가 몹시 사모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정신이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건전한 표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교인들과 사랑으로 접촉하게 하는 그런 교감과 관심과 친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그들 앞에 이따금 알려주어도 좋을 것이다.
이 사랑의 정신은 책망의 언어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훈계해야 한다. 그러나 “오래 참음으로”(딤후4:2) 훈계해야 한다. 흔히 가장 애정 어린 간청이라도 저항할 그 완고함까지도 우리는 참아내야 한다. 온유와 부드러움과 그리고 인내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을 가르치는 우리의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2:24-25). 죄인된 그들의 양심을 우리는 상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아니 된다. 불필요한 적대감 자극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열어 보여 그 죄가 “한 친구의 상처”가 됨을 충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며(잠27:6), 책망은 아버지의 책망처럼 하여야 한다(고후2:4; 12:14-21).
이렇게 하면, 그 적용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을 대단히 부드럽게 만들어 책망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같은 지혜로운 자의 책망이 될 것이다(잠25:12). 부드럽지만 진지한 태도가 사랑의 하나님의 대사인 우리 직분의 특징이다.
사랑의 강권은 강력히 작용하는 지렛대이다. 심지어 이교도 궤변철학가들도 친절을 연설가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주장했다. 설교자가 청중들의 최선의 유익을 위한다는 확신을 그 설교자의 가르침의 어조가 청중들에게 주지 못한다면, 기독교 설교자에게 자기 마음을 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강단 설득력의 생명이요 능력이며 진수이고 영혼이다. 그것은 우리 직분의 성격을 비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간청하게 한다(고후5:20). 그리고 사랑은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그분의 부드러움의 언어와 표정을 가지고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발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겨 그들의 마음을 사게 하기 때문이다. 에베소에서 그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읽을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성공에 놀라지 않는다. 존경을 많이 받는 목사들은 그 훌륭한 달란트 때문에 출중했던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것으로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기독교 사역자는 특별히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설교할 때, 그 마음은 길을 잃은 양을 찾고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잃어버린 자기 아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목사의 뜨거운 사랑은 싫어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얻을 수 있고, “우리 교인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하나님께 계속 가까이 있게 만든다”는 것은 맞는 생각이다. 도드리지 박사는 이것을 우리 사역의 큰 목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탄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적어도 자기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발견하였다. 오! “누가 이 일을 하기에 적합하리요”(고후11:16)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목회자는 지혜와 명철의 마음을 가지고, 그가 성경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정확한 균형과 비례로 자기의 설교에 반영해서 명확하고 명료한 진리들을 제시할 것이다. 그 자신의 정신은 자기 메시지의 정신(담대함, 지혜, 명료, 근면, 전심, 사랑)속으로 적절하게 형성되어 배어 들어갈 것이다. 모든 복음의 사역자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엄중한 부탁을 깊은 존경심과 겸손한 마음으로 듣기를 바란다. 그 말은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