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 옥성호 ("초등학문들" 강의안7)
3. 심리학의 세 번째 가면: 성공의 법칙
“자연주의 종교에 따르면 당연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 즉 신의 일부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자신 속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그 신성을 활용하면서 신처럼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인간과, 자기 속에 있는 신성의 능력을 모른 채 비참하게 살아가는 인간으로 나뉠 수 있다. 즉, 자신이 백조인데도 오리인 줄 알고 미운 오리가 되어 사는 사람들과 백조가 되어 유유히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다.” p. 257
“자연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또는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법칙이다. 즉,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된다는 마음(mind)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안 된다는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 속에 어떤 현실을 품는 것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p.258
-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방법은 말과 상상이다.
1) 성공의 법칙 1: 말한 대로 된다.
성경은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예를 들면서 마치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능력이 있다는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이 인간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지키라는 의미이다. 성경이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 현실을 만들어 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p. 263
-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법칙 1: 주문
“현실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말의 첫 번째 종류는 힌두교에서 흔히 만트라(mantra)라고 부르는 무의미한 말의 반복, 우리말로 하면 주문이다.” p. 264 만트라를 통한 수행의 모습은 여덟 살 때에 이미 힌두교의 요기(요가의 달인을 일컫는 말)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안수를 하면서 스승으로 추앙받던 사람이 자신이 여덟 살 때 했던 전형적인 수행의 모습을 적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대부분의 정통 힌두교도와 마찬가지로 주문 그 자체 속에 어떤 신성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문은 그 자체로 그 주문이 요구하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다. 가야트리 만트라는 정확하게 반복함으로 또 매일 태양을 향해 바른 자세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주문은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 p. 265
- 기독교 안에 스며든 주문
저자는 오늘 우리에게 심각한 것은 인격체이신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 내에서도 이런 주문의 위력을 신봉하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몇 달 전 참석했던 한 새벽기도회에서 강단에 혼자 앉은 담임 목사가 30분이 넘도록 “인 치시옵소서.”라는 말만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꼭 “특별한 억양과 발음을 포함한 이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하는 것을 통해 주문 같은 기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 바른 기도인지 정확히 알려 주고 있다. 예수님이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것, 즉 기도를 의미 없는 반복, 주문처럼 하지 말라는 점이었다.” p. 269
- 현실을 만들어 내는 말의 법칙 2: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
“현실을 만들어 내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말의 두 번째 종류는 ‘긍정적인 말’이다. 단순한 긍정에서 한 걸을 더 나아가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적극적인 말의 사용이 이 법칙의 핵심이다.” p. 271 “‘이미 현실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의 사용은 교회 내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사용된다.……그 믿음이라는 말 속에 사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피조물의 믿음이 아닌 성공의 법칙을 알고 활용하는 지배자의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p. 271 조엘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억하라. 우리의 하는 말은 바로 예언이 되고 바로 성취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말로 우리는 무엇이 닥칠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고 미래를 만들 수 있다. 당신의 말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부르라. 승리를 부르라. 건강을 부르라. 행복이 넘치는 삶을 부르라. 그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 당신의 현실이 될 것이다.” p. 272 Lakewood Community, 2005. 6. 28
조엘 오스틴은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의 여부는 ‘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요 15:7) ‘하나님은 인간의 혀에 놀아나는 그런 신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말 또는 말하는 특권을 허락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을 망령되이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께 명령하듯이 하는 말을 기도와 믿음이라는 단어로 아무리 포장해서 사용한다고 해서 ‘말한 대로 된다고 하는 말의 법’이 결코 성경적으로 정당화 될 수도 없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될 수도 없다.” p.285
2) 성공의 법칙 2: 상상하는 대로 된다.
미국의 대표적인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저술가인 브라이언 트레이시(Brian Tracy)는 “우리 속에 작게는 우리 주변의 환경, 크게는 우주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p. 286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라! 그러면 그린 대로 된다.’, ‘꿈을 꾸라! 그러면 꿈대로 된다.’,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라. 그러면 목표한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식의 내용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성경적인 것처럼 설교되고 있다.” p. 296
저자는 한 실례로서 얼마 전 여호수아 18장 1~10절을 바탕으로 국민일보에 “축복 그림을 그려라.”는 제목으로 실린 설교 일부분을 소개한다.
“……중략……그녀가(오프라 윈프리) 오늘 최고의 성공자가 된 것은 성경을 통해 꿈을 갖게 됐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행복의 그림을 그리고,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공의 그림을 그리고,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중략……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며 자신 있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멋지게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살고 사업 계획을 그리고 꿈꾸며 이루었습니다.……중략……. 성도 여러분, 행복을 결단하십시오. 축복의 그림을 마음 속에 그리십시오. 하나님은 약속대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이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pp. 296-7 국민일보 2007년 3월 6일자 31면.
'축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축복의 그림을 그리면 됩니다‘라는 공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심리학의 상상기법의 공식일 뿐이다. 위대한 크리스천인 것처럼 소개되는 오프라 윈프리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쇼와 잡지를 통해 뉴 에이지 사상의 주요 사상가들을 미국인의 일상 삶 속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들도록 만들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인들이 기독교와 뉴 에이지가 무엇이 다른지 전혀 구별하지 못하도록 혼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이다. 우리는 윈프리가 한 말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귀울여야 한다. 왜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프로이트나 나폴레온 힐과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진리인양 떠드는 오프라 윈프리의 말을 성경보다 더 중요시하는가? 참으로 가슴 아프고 통탄할 일이다.
- 성경이 말하는 바른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상기법과 관련해서 가장 오용되거나 남용되고 있는 단어는 ‘비전’ 또는 ‘꿈’”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상상기법에서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라.’라는 내용이 요즘은 교회에서 ‘꿈을 가지라.’, ‘비전을 품으라.’라는 말로 많이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비전과 꿈을 좋아하는지 꿈과 비전이 들어가는 교회 이름이 많이 생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꿈과 비전이라는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꿈과 비전을 품는다는 것 자체도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교회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들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자신의 욕구와 욕망이다. 개인의 꿈은 불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성공’과 별로 다르지 않고, 교회 성장의 비전은 기업 확장의 비전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비전을 품기만 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자신의 비전대로 이루어 주시는 분인 것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참된 교회, 참된 크리스천도 비전과 꿈을 가진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비전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비전이다.” pp. 298-9
그렇다면 성도들이 가져야 할 참된 비전, 참된 꿈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드워즈를 통해 우리가 품어야 할 꿈과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비전이라고 말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무엇보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즉, 실존적인 하나님 체험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아는 것을 자기 신학의 핵심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의 절정이었습니다.” p. 299 백금산 편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살 수는 없을까』, 부흥과개혁사, 2003, p. 154.
“자신의 욕망을 꿈과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서 말과 상상이라는 기법을 통해 이 비전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말한 대로 된다.’ 혹은 ‘상상한 대로 된다.’는 성공의 법칙을 주장하면서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p. 300
- 성공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주의 종교에 깊게 물든 기독교
“말과 상상력이라는 성공의 법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앞에서 살펴본 힌두교 구루의 말처럼 이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병이 나은 사람에게 겉으로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병이 치료되는 성공의 법칙을 알고 적용한 사람에게 ‘병 고침’이란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연히 반응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즉, 믿음을 발휘하는 인간에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에 불과한 하나님을 부르는 이들에게 무슨 기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식들을 꺼내 쓰기만 하면 네가 신이 된다.’는 노골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가르침이나 ‘믿음을 발휘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식의 잘못된 기독교 가르침은 포장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p. 301
- 자연주의 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종교는 인류 전체에 퍼진 ‘신경증’‘인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만든 창작물이라고 말한 프로이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자연주의 종교야말로 인간이 ’창조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 심리학은 대표적인 자연주의 종교의 하나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이 원초적인 욕망에 이론적 토대를 놓은 것은 융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이다. 심리학은 자연주의 종교와 떼어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이제 인간과 자연 사이의(단절되었던) 균형이 정상적으로 복원되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심리학이 영적 깨달음에 필요한 공헌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융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심리학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들을 과학적으로 들리도록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뉴 에이지는 다가오는 시대의 가장 무서운 자연주의 종교가 될 것이다
그 이름을 ‘새로운 생각’이라고 부르든 ‘사이언탈러지(Scientology)’라고 부르든 관계 없이 이 뉴 에이지 사상들은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깨우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같이 이들은 겉으로 ‘사랑’을 내세운다. “나도 신, 너도 신, 그러니 우리 신끼리 서로 사랑해야지 어떻게 싸울 수가 있나?”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주는 미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 고작 200여년 전이다. 그러나 과학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비참하지 않았을 20세기의 전쟁들을 겪으면서 인간은 이제 과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또다시 비과학의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 비과학의 세계도 아주 그럴듯한 ‘과학적’용어들과 ‘종교적’용어들로 포장되어 인간을 안심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시킬 힘은 인간의 말과 상상에 있다고 가르친다. 과거 인간은 몸으로 돌을 날라서 바벭
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말과 상상만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바벨탑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바벨탑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할 우리 교회가 도리어 이 바벨탑을 세상과 함께 쌓고 있지는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