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7/31,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강대식 2016. 8. 1. 21:12

2016-07-31 주일설교

본문: 10:45

제목: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10:45)(20:28)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딤전2:6)

 

대속한다는 것은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대속물은 율법을 어겨 죽게 된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는 제물이다.

 

구약 율법에 의하면, 죄 값은 사망이다.

그리고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9:22)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대속물을 허락하셨다.

양이나 소의 머리에다 안수하여 죄를 전가시키고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 뜻을 정확히 모른 채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래 이 피의 제사를 드려 왔다.

 

그것은 때가 되면, 우리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죄를 사하시는 구원 계획을 미리 보여주시고 준비케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구약 피의 제사를 모르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오늘날 교인들 중에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의미를 모른 채

십자가를 차고 다니는 악세사리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에서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십자가 교리를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1:29)

구약 제사에서 어린 양이 주로 피의 제물로 드려졌다.

 

피의 제물인 어린 양은 어린 양인데,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세상 죄, 곧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는 것이다.

계시록 5장에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어린 양이 보좌 앞에서 일곱 인을 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물 되신 우리 주님을 가리킨다.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지고 갈려면 죄 없는 사람이어야 했고, 하나님이어야 했다.

하나님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실 때,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것이다.

모든 인류가 물려 받는 아담의 죄를 물려 받지 않는, 죄 없는 제물이 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면 이미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되는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는 구세주, 만왕의 왕이신 것이다.

 

죄의 값인 사망을 대신 죽음으로 감당하시고,

죄 사함을 위한 피 흘림을 몸소 자기 피로 대신 감당하셨다.

하나님의 공의는 충족 되었고, 아들의 피로 우리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대속물로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이루어진 곳이다.

그분이 대속물이 되어 우리 죄를 대속하였기에 이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 편에서 보면, 믿음도 구원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에 복음인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믿음도 구원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행위가 좋아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은 이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성령에 의하여 믿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은혜로 믿게 되니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거듭 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믿어지며 회심의 놀라운 변화가 없다면,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인데

성품이나 생활에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아직 믿을려고 하는 자신의 노력일 뿐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소리는 들을 수 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어디서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믿음의 열매로 변화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죽으셨기에 죄를 회개하게 되고 그것이 변화로 나타난다.

그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는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맘놓고 지은 죄를 회개하고 그 열매를 맺고 복음 곧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되니까, 죄를 회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과 회개는 쌍으로 오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기 위한 대속물로 피를 흘리시고 대신 죽으신 어린 양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가 없다면 그 믿음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믿음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요한은 말씀하였는데,

죄의 대속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죄에 대한 애통과 상한 심령이 없다면 그 영접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영접기도 같은 지적인 동의나 감정어린 결단이 아닌 것이다.

믿음은 성령에 의한 선물이요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죄의 대속물인 어린 양을 믿으면서 죄에 대한 애통과 의에 대한 목마름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내 마음에 오셔야,

주님의 대속물이 나의 죄로 인한 대속물로 여겨지며, 나의 죄를 애통하고,

이제는 의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6:10-11)

 

전에 너희가 너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6:19)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가 성령으로 은혜로 믿어지게 되면,

이런 변화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는 살고,

우리 지체를 죄에게 주지 않고, 이제는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를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은 우리가 죄 사함 받는 수준에서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고 더욱 성화 성숙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의 성품과 삶을 닮아가기를 원하신다.

 

또 고난과 형통을 통해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

그 성장이, 곧 그릇을 갖춤이, 축복을 가져오고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난의 본을 보이신 후 우리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다.

주님이 대속물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신다.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앞으로 가지 않으면 뒤로 간다.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힘들고 낙심될 때마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을 묵상하면 떨치고 일어날 수 있다.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위해 오늘 우리가 잠시 가벼운 고난의 연단을 받는 것이다.

믿음과 인내는 어려운 때일수록, 쉬운 길로의 유혹이 올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 변화된 사도 바울을 본 받아야 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2: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3:7-9)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는 일이 없다면 변화는 없는 것이다.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것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유익한 것은 모두 다 끼고 여전히 살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겠는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그리스도를 만났으면,

우리 인생의 목표와 목적도 달라져야만 한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갈 시간이 가까웠을 때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다.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다.

죽으면 끝이 아니고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을지라도,

저 세상에 가서 그것이 해가 되고 그리고 받을 아무 상이 없다면,

그처럼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는데,

화려했던 부자는 지옥에서 자기 혀를 서늘케 해줄 물 한방울을 구걸하며 고난을 받고 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인생 목표와 목적이 달라지지 않으면 겪게 될 운명이다.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를 가지고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하신다.

사탄의 멍에, 사람의 멍에, 세상의 멍에, 돈의 멍에, 죄의 멍에를 다시 메지 말라는 것이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하신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하신다.

대속물 되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의 대속물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가지고 다투고 있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세상의 집권자들과 고관들은 임으로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도 세상 권세자들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오셨다고 하셨다.

그 섬김이 바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이었다.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마음 가운데 영접하였다면,

우리도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하셨다.

 

이 역설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 왔다.

영광과 축복은 바라면서도 주님을 본 받아 자기 목숨을 거는 자가 없기에 변화가 없다.

목숨으로 생명으로 변하지 않으면, 오염되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9:23)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행세하고 있다.

 

날마다 자기 욕망과 야망을 지고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7-39)

 

예수 믿는 것을 한가한 소일거리 정도로, 악세사리 차는 정도로 알았던 사람들은

기절초풍할 말씀일 것이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건다는 뜻이다.

주를 위해 자기 목숨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고서는

변화되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주님의 자취를 따라갔다.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건 결과, 교회는 세워지고 복음은 세계로 뻗어나갔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주님과 그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내 신앙과 삶의 자세를 돌아보고, 새롭게 결단하고 변화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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