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3장 사죄보다 더한 것, 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6. 9. 30. 11:42

3장 사죄보다 더한 것

 

(3:21-31)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바울 사도는 이 구속이 이제야 나타났다는 사실을 감격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어떤 일이 최근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제는모든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이 정말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심이었다. 그로 인해서 우리들은 새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옛시대는 가고 새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철학이 아니요 단순히 하나의 교훈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단순히 교훈이지만 우리의 신앙에는 교훈에 앞서서 역사적인 사건과 사실이 있는 것이다. 독일의 불트만의 교훈은 복음의 비신화화에 대한 필요성을 말한다. 이런 교훈은 이제는이라는 말과는 상충되며 신약의 전체적 가르침과도 배치된다(고전15:)

 

- 주님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구원의 길을 위해서 오신 것이다. 사람들이 열심을 다하여 도달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만한 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성과 철학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제는전적으로 새로운 길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가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 그 자체로는 하늘에 들어가는 들어갈 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들어갈 허락을 얻을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필연코 의로 옷입어야 하는 것이다(22:1-14).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위대한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주님의 의로 우리를 옷입히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한 의는 이제 유효한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시고 다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 일을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 어떻게 이 의가 우리의 것이 될까? 어떻게 내가 그 의를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이 길은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키라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가 없기 때문이고”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아직도 건재하며 아직도 심판의 방편이다. 바울이 역설하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는 더 이상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리라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는 것은 :22에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그를 신뢰함으로 말미암아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는 진리에 대한 앎, 진리에 대한 동조,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신앙은 단순히 진리의 지적인 앎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인정이 아닌 것이다. 지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신앙은 없을 수 있다. 신앙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길이다.

 

-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다. 믿는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죄의 생활을 살아왔다. 나는 신성모독자였다. 그리고 행악자였고 비열한 사람이었다. 내가 범하지 않는 죄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내 자신의 의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의를 나의 것으로 간주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위대한 영성의 표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믿음에 대한 부정이며 확신을 가지지 못한 증거이다. 레위기에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죄를 위해 희생될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그들의 죄를 대신 희생될 동물에게 전가시켰다. 당신의 죄들을 인식하라. 부끄럽게 여기라. 더 나아가서 나는 그것들을 주께 맡긴다고 하라. 주님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하러 오셨다”. 율법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마귀에게 구원의 기쁨을 강탈 당하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한다고 하면 당신의 믿음은 공로가 되는 것이며 당신은 스스로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통해서) 구원 얻는 것이다. 믿음이란 단지 도구일 뿐, 원인은 아닌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는 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다. 아무것도 심지어 나의 믿음까지도 첨가해서는 안된다. . 3: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그리스도인의 생애에는 자랑할 것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가 나의 것으로 되는 데 있어서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 바울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고”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결핍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탕자의 비유).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리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영광에 대해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영광이 열려 나타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알고 그것이 그에게는 전부이고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 영광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일정하게 우리 가운데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의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은 계속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육신마저도 영화롭게 되는 더욱더 경탄스런 날이 올 것이다(3:21).

 

죄는 우리에게 의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해 가는 것이다. 구속이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가? 그것은 나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의까지 주는 것이다. 또한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전에 어떠하였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완전히 행하신 일을 믿으면 우리는 그의 의로 옷 입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이식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벧후1:4)가 되는 것이다.

 

 

4장 오직 값없는 은혜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구속 방법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개요를 계속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의 진술은 세 가지 항목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구속이란 무엇인가? 둘째 구속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셋째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속을 우리를 위해 주신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던가?

 

첫째, 구원이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즉 우리가 의인으로 판단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해 주시며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우리들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함에서 오는 열매가 아니고 우리들을 위해 행해진어떤 것이다. 믿음을 가지는 이 순간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말씀은 진정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5:1에 바울은 의롭다 하심은 얻었은 즉라는 말을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루터는 카톨릭 신자로 현세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러나 큰 빛이 루터에게 비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지금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둘째,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값없이와 은혜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전혀 그것을 받을 만한 어떤 자격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구원은 단순히 값없는 선물 만이 아니고 그와 정반대 되는 것(진노)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신 값없는 선물이다.

 

이 위대한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는 가장 휼륭한 지름길은 율법과 대조시켜 보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1:17). 율법은 주로 죄를 통제하며 또한 그것은 우리 죄됨을 나타내기만 하고 그것을 없앨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값없는 또는 은혜로운 일이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제는”(:21) 율법이 줄 수 없었던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전했으며 불순종했고 반역했으며 죄를 지었던 것이다. 우리를 그와 화해시킨 것은 그의 은혜이다. 이것은 분명하고 명백하게 구원에 대한 유일한 방편인 것이다.

 

셋째 무엇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이 말은 가장 중대한 말이다. 창조사역에서는 하나님께서 단순히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면 되었다. 그러나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말미암아(through)". "구속(redemption)”속전을 지불하고 해방하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하여 인도하여 내기 위해서 오셨고 또한 그는 값을 지불하셨다. 그런고로 우리가 마귀로 인하여 포로로 갇혀 있던 모든 감옥은 열리고 노예였던 우리는 자유롭게 된 것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죄와 정죄감과 죄의 노예인 것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바라볼 때 또한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을 알 때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화목과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해방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며 열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3:3, 고전1:30,31)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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