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존스 목사와 설교 제4장 설교형식
강대식
2016. 10. 10. 16:57
제4장 설교형식
설교의 세 가지 유형의 상호관계성
설교자가 준비해야 할 메시지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질 수 있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 와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 교훈을 주는 설교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세 가지 유형들간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길은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해 둔다.
우리가 한 본문을 두고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다른 본문과 전체적인 진리에 관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본문을 취급하게 될 때 첫 번째 설교에 말한 바와 모순되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설교 사이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언제나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흔하게 비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설교유형은 전도설교이다. 수년 전 런던에서 전도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그 대회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적 주간 종교지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한다.
“이 대회가 열리는 동안은 신학적인 것은 건드리지 말자.” 그 사상은 복음전도는 신학적인 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마당에서 신학을 도입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전도설교야말로 더욱더 신학적이어야함을 역설할 용의가 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여러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짓는가? 인간의 교리, 타락과,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다루지 않고서 회개를 정당하게 다룰 수가 없다. 달리말하면, 그것은 모두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설교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2 동시에 설교가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설교란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그것은 신학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설교와 신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설교자란 전체적인 성경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는 물론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고!
어느 특정한 본문에다가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을 무모하게 부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 본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교리와 진리체계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함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완고하게 고집하는 어느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조직신학을 특정본문에다 그릇되게 가미시켜 그 본문들을 곡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가미하는 교리 자체는 진리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특정 본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본문 중심적이어야 한다.
3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복음에 관한 것만을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점이 발트주의자(Barthians)들의 독특한 특징이며, 정말 그들의 함정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해서 부단히 말하면서 말씀에 관한 것들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여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들이대라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며 운반도구인 것이다.
또한 복음 전체를 나타내야 한다. 복음을 다루고 복음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회적 측면이 있고, 우주적(보편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전구원계획을 나타내야 된다. 우리는 반드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10에서 표현한 것처럼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을 언급하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그것 때문에 설교와 말씀의 사역을 세 가지구분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요소가 드러나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의 설교이다. 그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도하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사람들의 제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큰 전체의 지체인 것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
4 바울 서신의 설교특징
바울서신이 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편지의 서두를 인사말로 시작한 다음에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믿고 있는 위대한 교리들을 상기하게 한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의 위대한 말투인 “그러므로”라는 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교리를 응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언제나 아주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이미 교리를 말해 놓고도 실천적인 대목에 와서도 교리를 다시 언급하는 바울의 태도이다. 하지만 구분이 되기는 하지만 너무 엄격하게 구분해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교의 형식
1 설교란 수필이 아니다
문체가 다르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이도한 것이다. 수필에는 문학적인 격조와 독특한 형식이 있긴 하지만 설교에 제일 절실한 요구가 하나도 없다.
수필은 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설교는 반복하는 것이 좋음을 힘주어 말씀드린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가 되는 점이다. 반복은 요점을 강화하고 뚜렷하게 해 준다. 더구나 수필은 주로 특정 사상이나 생각, 또는 특정 개념을 취급한다.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설교자의 위험은 그가 한 가지 사상만을 얻기 위해서만 본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얻으려는 사상을 얻은 뒤에는 성경본문이나 문맥을 떠나서 그 절이나 구절을 읽음으로 떠오른 생각에 대한 하나의 수필을 써나가는 것이다.
2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된다. 설교의 호소는 거의 전부 마음을 향한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는 도전의 요소, 즉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설교의 기능을 결핍하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강의와 설교의 큰 차이는 설교는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해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설교 제목과 그 안에 있는 교리는 본문과 그 문맥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본문과 문맥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그처럼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한다.
3 설교란 주석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한 절이 한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나 강해설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들은 설교가 일련의 주해를 덧붙이거나 한 절이나 한 구절, 문단에 대해 주석을 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한 절 한 절씩 주석해 간다. 그러나 그들은 설교한 것이 아니다. 일련의 주석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설교는 강해를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는 메시지로 변환을 시킨다.
이 점을 설명해 주는 데 도움이 될 성구는 “주의 말씀”에 관해 언급된 주의 선지자들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된다. 메시지가 선지자에게 하나의 말씀으로 임하는데 그 메시지는 완전한 메시지로 임하며, 선지자는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한편의 설교란 하나의 교향곡이 형식을 갖춘 것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란 단지 여러 구절을 여기저기 두서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수집이나 일련의 훌륭하고 참된 진술이나 강조가 아니다.
그러면 설교를 특징짓는 형식은 어떠한가?
1 설교준비를 시작할 때 택한 본문이나 구절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점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설교는 반드시 강해식이어야 한다. 한 사상으로부터 출발하면 안된다. 비록 그것이 바르고 훌륭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한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매시간 똑같은 것을 말할 경향성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그 메시지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언제나 그렇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얘기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바로 그 성경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원본이요 메시지를 받는 원천이기도 하다.
2 본문에 대해 질문하라
본문을 택했다면, 과연 그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본문에 해당하는 교리는 무엇이며, 이 본문에서 말하는 특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져야 한다. 설교준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3 본문에 대한 교리와 메시지를 밝히 드러내라
설교자는 강좌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생활영역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설교자는 오늘날 생존하여 생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대해 무언가를 말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걸고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사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4 명제들(propositions). 대지(headings). 소제목정하기-어떻게 부르든 관계없음
대지, 소제목으로 나누는 목적은 바로 중심적인 원리나 명제를 뚜렷하게 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에 일정한 형식이 있다. 작곡가는 그 교향곡의 도입부분이나 오페라의 서곡에서 보편적으로 그가 다루려는 여러 개의 주제들(motifs)을 암시적으로 던져준다. 그렇듯이 설교자도 그의 개관적인 서론(Introdution)에서 테마와 그 테마의 요지들을 지적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반드시 그 설교에서 이것들을 상세하고 질서있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개의 부속적인 소지들로 나누어져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개의 명제들이나 소제목들을 잘 배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결단코 설교자는 자기가 뽑은 소제목들이나 대지들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앞뒤가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문제는 다음 문제로 이끌려가고 그 다음 문제로 자연스럽게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특정 원리(교리)의 급소, 또는 핵심을 찌르게끔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설교의 절정(絶頂 climax)
이처럼 설교의 형식문제에 있어서 논증과 주장의 진전이나 전진, 또는 논증의 발전은 절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이다. 설교자는 절정(絶頂)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그 절정을 향해 이끌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위대한 진리가 이제까지 말해진 모든 것을 압도하고 뛰어나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진행하는 방법은 여라 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할 수 있고, 일련의 간결한 진술 형식을 취할 수 있고, 권고 형식으로, 또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반드시 그가 계속 전하여 왔던 메시지를 응용(적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강의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또는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적용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적용이나 권고하는 바의 핵심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죽고 사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설교가 완전성과 형식을 지녀야 하는 이유
모든 단편적인 설교는 그것으로 완전하고 그 안에 이러한 전체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 번 설교에서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면, 시작할 때 반드시 전의 설교에서 이미 언급했던 몇 문장으로 요약해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설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1 그 이유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다른 주일에 출석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실망해서 여러분들이 다음에 더 말하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2 또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그 전 주일에는 출석치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은 ‘나는 지난 주일에 참석치 않았으니 지금 말하는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네“라고 느낄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설교가 반드시 하나의 완전체여야 하며, 이런 형식을 늘 갖추고 있어야 함은 중대한 일이다.
질문 “ 그러나 거의 한 편의 설교도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크게 쓰셨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는가?”
그것은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이다. 몇몇 드물게 일어나는 경우를 위하여 법칙을 제정하지는 않는다. 몇몇 예외를 기초로 해서 어떤 이론을 설정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떤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자(말씀 증거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의 의도는 만일 여러분이 과거의 위대한 설교나 설교문을 읽으면 이것들이 성령께서 가장 높여주셨고 죄인들을 중생시키고 성도들을 정립시켜주고 고양하는 데 사용하신 것들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
설교준비는 땀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성경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이 특정 형식에 집어넣기가 극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드는 일이나 대장장이가 말에 신길 말발굽을 만드는 것이나 같다. 재료를 불 속에 집어넣은 다음 꺼내서 해머로 그것을 몇 번이고 단련해야 한다. 매번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지만 똑바르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에 맞을 때까지 계속 그 일을 되풀이한다. 그럼으로써 더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형식에 맞추는 일은 설교 준비중에서 가장 어려운 고역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작업이다. 때로 그것은 너무 힘들고, 기진해서 어렵다고 포기할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마침내 설교했을 때가 이 땅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겪는 것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설교의 세 가지 유형의 상호관계성
설교자가 준비해야 할 메시지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질 수 있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 와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 교훈을 주는 설교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 세 가지 유형들간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길은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1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제해 둔다.
우리가 한 본문을 두고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다른 본문과 전체적인 진리에 관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본문을 취급하게 될 때 첫 번째 설교에 말한 바와 모순되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설교 사이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언제나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흔하게 비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설교유형은 전도설교이다. 수년 전 런던에서 전도대회가 열리고 있을 때 그 대회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적 주간 종교지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한다.
“이 대회가 열리는 동안은 신학적인 것은 건드리지 말자.” 그 사상은 복음전도는 신학적인 것이며, 복음을 전하는 마당에서 신학을 도입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사상이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며 전도설교야말로 더욱더 신학적이어야함을 역설할 용의가 있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여러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짓는가? 인간의 교리, 타락과,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다루지 않고서 회개를 정당하게 다룰 수가 없다. 달리말하면, 그것은 모두 신학적이라는 것이다.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설교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2 동시에 설교가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설교란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그것은 신학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설교와 신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설교자란 전체적인 성경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는 물론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경고!
어느 특정한 본문에다가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을 무모하게 부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 본문에 대한 자기 나름의 해석이 성경에서 발견되는 교리와 진리체계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함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완고하게 고집하는 어느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조직신학을 특정본문에다 그릇되게 가미시켜 그 본문들을 곡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가미하는 교리 자체는 진리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 특정 본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본문 중심적이어야 한다.
3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복음에 관한 것만을 말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복음을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점이 발트주의자(Barthians)들의 독특한 특징이며, 정말 그들의 함정이라는 것을 의식했다. 그들은 말씀에 관해서 부단히 말하면서 말씀에 관한 것들을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여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들이대라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며 운반도구인 것이다.
또한 복음 전체를 나타내야 한다. 복음을 다루고 복음으로부터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에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회적 측면이 있고, 우주적(보편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전구원계획을 나타내야 된다. 우리는 반드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10에서 표현한 것처럼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을 언급하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그것 때문에 설교와 말씀의 사역을 세 가지구분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요소가 드러나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의 설교이다. 그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도하는 식으로 설교하거나 사람들의 제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큰 전체의 지체인 것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
4 바울 서신의 설교특징
바울서신이 주로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편지의 서두를 인사말로 시작한 다음에 수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믿고 있는 위대한 교리들을 상기하게 한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바울의 위대한 말투인 “그러므로”라는 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교리를 응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언제나 아주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이미 교리를 말해 놓고도 실천적인 대목에 와서도 교리를 다시 언급하는 바울의 태도이다. 하지만 구분이 되기는 하지만 너무 엄격하게 구분해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설교의 형식
1 설교란 수필이 아니다
문체가 다르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이도한 것이다. 수필에는 문학적인 격조와 독특한 형식이 있긴 하지만 설교에 제일 절실한 요구가 하나도 없다.
수필은 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설교는 반복하는 것이 좋음을 힘주어 말씀드린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가 되는 점이다. 반복은 요점을 강화하고 뚜렷하게 해 준다. 더구나 수필은 주로 특정 사상이나 생각, 또는 특정 개념을 취급한다.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설교자의 위험은 그가 한 가지 사상만을 얻기 위해서만 본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얻으려는 사상을 얻은 뒤에는 성경본문이나 문맥을 떠나서 그 절이나 구절을 읽음으로 떠오른 생각에 대한 하나의 수필을 써나가는 것이다.
2 설교는 강의가 아니다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된다. 설교의 호소는 거의 전부 마음을 향한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의는 도전의 요소, 즉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설교의 기능을 결핍하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강의와 설교의 큰 차이는 설교는 하나의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해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설교 제목과 그 안에 있는 교리는 본문과 그 문맥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본문과 문맥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그처럼 설교는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 않아야 한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한다.
3 설교란 주석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한 절이 한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해설교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나 강해설교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하여 말한다. 그들은 설교가 일련의 주해를 덧붙이거나 한 절이나 한 구절, 문단에 대해 주석을 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한 절 한 절씩 주석해 간다. 그러나 그들은 설교한 것이 아니다. 일련의 주석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설교는 강해를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는 메시지로 변환을 시킨다.
이 점을 설명해 주는 데 도움이 될 성구는 “주의 말씀”에 관해 언급된 주의 선지자들의 말씀 가운데서 발견된다. 메시지가 선지자에게 하나의 말씀으로 임하는데 그 메시지는 완전한 메시지로 임하며, 선지자는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한편의 설교란 하나의 교향곡이 형식을 갖춘 것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란 단지 여러 구절을 여기저기 두서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수집이나 일련의 훌륭하고 참된 진술이나 강조가 아니다.
그러면 설교를 특징짓는 형식은 어떠한가?
1 설교준비를 시작할 때 택한 본문이나 구절구절들을 해석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점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설교는 반드시 강해식이어야 한다. 한 사상으로부터 출발하면 안된다. 비록 그것이 바르고 훌륭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한 사상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매시간 똑같은 것을 말할 경향성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과 그 메시지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언제나 그렇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얘기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바로 그 성경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원본이요 메시지를 받는 원천이기도 하다.
2 본문에 대해 질문하라
본문을 택했다면, 과연 그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본문에 해당하는 교리는 무엇이며, 이 본문에서 말하는 특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져야 한다. 설교준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3 본문에 대한 교리와 메시지를 밝히 드러내라
설교자는 강좌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켜 생활영역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설교자는 오늘날 생존하여 생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대해 무언가를 말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걸고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사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4 명제들(propositions). 대지(headings). 소제목정하기-어떻게 부르든 관계없음
대지, 소제목으로 나누는 목적은 바로 중심적인 원리나 명제를 뚜렷하게 하는 데 있다. 이 모든 것에 일정한 형식이 있다. 작곡가는 그 교향곡의 도입부분이나 오페라의 서곡에서 보편적으로 그가 다루려는 여러 개의 주제들(motifs)을 암시적으로 던져준다. 그렇듯이 설교자도 그의 개관적인 서론(Introdution)에서 테마와 그 테마의 요지들을 지적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반드시 그 설교에서 이것들을 상세하고 질서있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여러 개의 부속적인 소지들로 나누어져야 한다.
이러한 여러 개의 명제들이나 소제목들을 잘 배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결단코 설교자는 자기가 뽑은 소제목들이나 대지들을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 반드시 앞뒤가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문제는 다음 문제로 이끌려가고 그 다음 문제로 자연스럽게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설교자가 전하려는 특정 원리(교리)의 급소, 또는 핵심을 찌르게끔 유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설교의 절정(絶頂 climax)
이처럼 설교의 형식문제에 있어서 논증과 주장의 진전이나 전진, 또는 논증의 발전은 절대적으로 중차대한 문제이다. 설교자는 절정(絶頂)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그 절정을 향해 이끌려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위대한 진리가 이제까지 말해진 모든 것을 압도하고 뛰어나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진행하는 방법은 여라 가지가 있다. 그것들을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할 수 있고, 일련의 간결한 진술 형식을 취할 수 있고, 권고 형식으로, 또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반드시 그가 계속 전하여 왔던 메시지를 응용(적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강의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또는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적용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적용이나 권고하는 바의 핵심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죽고 사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설교가 완전성과 형식을 지녀야 하는 이유
모든 단편적인 설교는 그것으로 완전하고 그 안에 이러한 전체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 번 설교에서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면, 시작할 때 반드시 전의 설교에서 이미 언급했던 몇 문장으로 요약해 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설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1 그 이유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다른 주일에 출석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실망해서 여러분들이 다음에 더 말하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2 또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그 전 주일에는 출석치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들은 ‘나는 지난 주일에 참석치 않았으니 지금 말하는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네“라고 느낄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모든 설교가 반드시 하나의 완전체여야 하며, 이런 형식을 늘 갖추고 있어야 함은 중대한 일이다.
질문 “ 그러나 거의 한 편의 설교도 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인데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크게 쓰셨던 사람들이 있었지 않는가?”
그것은 법칙을 벗어나는 예외이다. 몇몇 드물게 일어나는 경우를 위하여 법칙을 제정하지는 않는다. 몇몇 예외를 기초로 해서 어떤 이론을 설정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떤 누구든지 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침묵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전달하는 설교자(말씀 증거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의 의도는 만일 여러분이 과거의 위대한 설교나 설교문을 읽으면 이것들이 성령께서 가장 높여주셨고 죄인들을 중생시키고 성도들을 정립시켜주고 고양하는 데 사용하신 것들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론
설교준비는 땀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성경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이 특정 형식에 집어넣기가 극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무엇을 만드는 일이나 대장장이가 말에 신길 말발굽을 만드는 것이나 같다. 재료를 불 속에 집어넣은 다음 꺼내서 해머로 그것을 몇 번이고 단련해야 한다. 매번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지만 똑바르지 못한다. 그래서 마음에 맞을 때까지 계속 그 일을 되풀이한다. 그럼으로써 더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형식에 맞추는 일은 설교 준비중에서 가장 어려운 고역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작업이다. 때로 그것은 너무 힘들고, 기진해서 어렵다고 포기할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마침내 설교했을 때가 이 땅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겪는 것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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