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비판

[스크랩] 만유 안에 있는 신? / 레이 윤겐(강의안)

강대식 2016. 10. 18. 21:18


어떤 서점의 종교 부문 서가는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왼쪽에는 영성: 뉴에이지라고 돼 있었다. 오른쪽에는 유대-기독교라는 분류표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양쪽 서가에는 모두 뉴에이지 운동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는 책들이 진열돼 있었다. 카톨릭 저자 윌리엄 존스톤의 글이다.

무엇인가 강력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전반에서 엄청난 영적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새로운 신비주의 유파가 발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매년 확대되고 있다.

 

만유 안에 있는 신?

 

뉴에이지라는 말을 만든 유명한 신비주의 여선지자인 엘리스 베일리의 말이다.

기독교인 지자들의 수행과 동양의 형제들의 명상을 연결해 주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하기란 물론 쉽다. 이 양자는 방법에 있어 똑같은 효능을 증거한다.

 

모든 것 안에 있는 신을 보도록 하는 것. 힌두교에서는 이를 사마디 혹은 정신적 개화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이 요가 명상의 최종적인 목표다. , 신은 모든 것 안에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해 힘 혹은 능력이 흘러나온다.

윌리엄 존스톤은 이러한 경험이 기독교 안에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내가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서구의 영성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늘 차지해 온 하나의 기독교적인 사마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기독교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명한 심리학자인 칼 융은 이 체계가 서양의 요가일 수 있으리라고 예견했다. 기독교적 선 운동을 볼 때 유사한 술어 하나를 발견한다. 실용적인 목적 전체를 놓고 볼 때는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바로 만유 내재신론, 즉 신이 모든 것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신뢰할만한 <복음주의 신학 사전>은 내재신론을 일종의 세계관으로 정의 내린다. “이 신론은 고전적인 유신론의 강점을 고전적인 범신론의 강점과 결합하고 있다. 내재신론은 인격적인 신을 모든 창조세계 안에 있는 신의 임재와 합쳐 놓는다. 달리 말해서 내재신론에서 신은 인격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포섭하는 실재다.

 

이 책의 신뢰성은 내재신론이 정통 기독교에서 합법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생사를 가르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내재신론은 신비주의적인 기도에 전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영국성공회의 사제이며 신비 기도를 가르치는 교사인 켄 카이쉬는 자신의 저서 하나님을 발견함에서 이점을 선명하게 언급해 놓았다.

명상은 마음과 감정을 안정시켜 신적 존재를 곧장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 사이에는 깊은 연계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신비가들은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이 신적 동력을 경험한다. 모든 창조세계는 신적 동력 안에 살아 있고 활성한 임재로서의 신을 품고 있다. 단지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 세계관이 지닌 신학적인 의미는 몇 가지 이유에서 성경적인 기독교와 정면으로 맞선다. 오로지 한 분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시되, 그분의 정체는 모든 사람 안에 있지 않다. 하나님 정체의 충만함은 그 육체적인 형태로는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에게만 나타나 있다!

 

성경은 사람 안에 신성이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선명하게 가르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거듭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을 모시지는 않는다’(32)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그러나 내재신론자들은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이 자신 안에 신적 정체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2:9~10)

 

윌리엄 존스톤은 강조한다. “신은 내 존재의 중심이고 모든 존재의 중심이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길인 복음 신앙을 근본적으로 제거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9)

 

성경은 하나님이 권능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붙들고 계시나, 온 세상의 실재가 되심으로써 이렇게 하지는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17:28). 이 말씀은 그분이 우리와는 따로 떨어져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임재하여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온 세상에 계시다는 이론은 이단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인격적 본질을 삼위일체 밖의 누구 혹은 어떤 것과도 나누지 않으실 것이고, 나누실 수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지 그것을 애초부터 소유한 자들은 아니다(벧후1:3~4).

 

베드로는 신자가 성령님의 일하심에 참여함을 인정한다. ‘참여하는 자들이라는 단어는 지분 획득자 동료 혹은 파트너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독교인은 성령의 정결하게 하시는 약속에 참여하고, 타락한 악한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 불러냄을 받고 있다. 게다가 참여자는 믿음을 통해 거듭난다. 반면 소지자는 무엇인가를 이미 소지한 자다. 내재신론과 범신론의 경우, 소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이다. 내재신론과 범신론자들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이미 와 있는 것에 대한 각성만이 있다.

 

윌리기스 제이거의 말이다.

물리적인 세계, 인간 존재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인 실재의 이런저런 형상들이다. 신의 이런저런 표현들이다. 모두가 아버지와 함께 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제이거는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이것은 힌두의 사마디에 기독교적인 스프레이를 뿌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수 신비가들의 명상은 고차원적인 신비가들의 기도와 똑같다.”


-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2장 서양의 요가 중에서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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