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뷰캐넌

[스크랩] 제임스 뷰캐넌, "성령의 사역, 회심과 부흥", 8장 어린 아이들의 중생(강의안)

강대식 2016. 11. 3. 04:47

8장 어린아이들의 중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린아이들의 중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택함을 받은 어린아이들은 유아 때에 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에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받고 구원함을 얻는다.”

 

신앙고백은 계속해서 세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신양의 성례로서 세례 받는 자들을 유형교회 안으로 엄숙하게 받아들이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세례 받는 사람에게 은혜 언약과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짐과 중생과 죄의 용서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 것을 표하고 인쳐 준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친히 제정된 이 성례는 세상 끝날까지 그분의 교회 안에서 계속되어야 한다”(28.1).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것을 실제적으로 고백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 부모나 부모 중 한 사람만 믿는 가정의 자녀들도 세례를 받는다”(28.4). “이 예식을 정죄하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큰 죄이기는 하지만 은혜나 구원이 이 예식과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예식 없이 중생이나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없거나, 세례를 받으면 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28.5). “세례의 효력은 세례가 거행되는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식의 정당한 거행을 통해서 약속된 은혜가 제공될 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정하신 때에 임하는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나타나고 부어진다”(28.6).

 

위의 내용들은 유아들의 중생에 대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교리이자 모든 일반적인 개혁교회의 교리이다.

 

오늘날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영적 생명과 영원한 복지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본 주제에 대한 교리적이고 실제적인 오류가 통탄할 만한 수준으로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유아들의 영적 복지를 위해 무엇인가가 준비되어 있고 그것이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면, 유아들의 중생은 다른 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에서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유아들의 중생에는 독특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더욱 특별히 고찰해야 할 가치가 있다.

 

우선 성인(成人)들의 중생과 유아들의 중생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과 다양성을 살펴보자. 성인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타락했고 죄를 범했으며 부패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유사하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이러한 사실은 할례와 세례에 암시되어 있다. 전혀 구별하거나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면 어린아이들은 왜 태어난 지 8일만에 타락하고 부패한 대중으로부터 구별됨을 의미하는 할례를 받는가? 만일 그들이 이미 자연적으로 더러워진 죄인이 아니라면 왜 영적 정화를 의미하는 세례를 받는가? 만일 어린아이들의 오염의 근원이 되는 성인들의 부패한 본성을 본받아 실제적인 죄를 저지른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저주 앞에 노출된 자들이며 구원이 필요한 자들임이 판명되는 것이다.

 

성인들과 어린아이들 사이에 또 다른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유아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 또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방법의 구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혜 언약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중생을 통하여 구원 받아야만 한다. 예수 이름 외에는 하늘 아래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말씀은 유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 교리가 명백히 선포하고 있는 것이며, 교회의 의식에도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아가 세례를 받을 때,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아들의 구원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으며, 이는 성인의 구원과 유아의 구원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점으로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곧 유아들의 경우 실제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하여 저지른 자범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아들에게는 성인들의 경우와 달리 성령 하나님께서 그 마음 안에서 당신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진리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은혜가 진리에 대한 이해와 믿음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며 과연 유아들이 중생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유아들의 미래를 하나님의 일반적 자비에 맡기기도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의식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을 내쫓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저 무관심하게 방치해도 되는 성질의 주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구원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성령의 은혜를 받을 능력이 없다면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유아들이 아직 성인들과 같이 진리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할 능력도 없으며, 그것을 수단으로 계몽되거나 거룩하게 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유아들이 정말 성령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겸손하고도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1. 신적 은혜의 대상인 유아들

 

어린아이들은 그들이 얼마나 어린지에 관계없이, 심지어 엄마 품에 안긴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신적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미 여러 가지 고찰을 통하여 증명되었다. 이러한 고찰 가운데 일부는 그들을 위한 은혜의 계획 안에서 어떠한 것이 준비되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이러한 가정적(假定的) 증명들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구성 조직을 생각해 볼 때 천사의 조직과 다르다는 것이다. 천사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각각 독립적이고 독특하게 창조되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적으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 서 있다. 반면에 인간의 경우에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채택되었다. 이 가족제도는 모든 인류가 다른 세상 사람들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기관이며, 유아기에는 이러한 가족들의 보호 속에 남겨지게 된다.

 

유아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없다. 그들은 점차 개인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상태로 자라갈 뿐이다. 바로 여기에 계시된 진리의 계획이 그 자체로 인간 본성의 실제적 구성에 적합한 것이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유전적 조직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5:9-10 참고).

 

가정이라는 기관과는 전혀 다르지만 매우 훌륭하게 적용되는 또 다른 본질이 바로 대표성이라는 체계인데, 이는 사람이 아담이라는 법적인 대표와 그리스도라는 복음 시대의 대표하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담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배반이라는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은 구속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께서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이라는 독특한 대표를 만드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사실을 시사한다. 그것은 유아들이 그들의 부모인 첫째 아담에 속해 있어서 타락이라는 참혹하고도 파괴적인 결과를 공유해야 한다면, 또한 둘째 아담에 속하므로 구속의 축복스러운 결과들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추정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것들은 단지 추정일 뿐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이 질문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빠지는 사실무근의 중상모독적인 선입견들을 제거하는 한편 냉정하고도 공정한 고찰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익을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추정이 위에 언급된 목적에 충분히 부합된다면 그것들은 가장 제일 되는 목적을 성취하는 셈이 된다.

 

그러면, 기독교회 안에서 유아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증명들 네 가지.

첫째, 이 주제에 대한 명확한 교리적 진술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에 대해 직접 진술하신 이 구절은 유아세례에 대한 문제보다 더욱 우선적이며 중대한 문제로서 유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해 주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18:15). 다른 복음서의 병행 구절은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19:13).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을 보고 꾸짖기 시작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부르시여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8:16)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단지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이 유약한 아이들을 향해 당연히 느끼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친절과 부드러움의 표현이 아니다. 구세주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은 구속자이신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이며, 교회의 선지자로서의 공적인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언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식적인 말씀은 지상에 있든지 천국에 있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그 기질과 나이를 초월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영접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또한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행동은 그들이 구세주의 사랑을 받은 대상이며 구세주의 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의 대상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안수하셨다는 것은 성령의 교통하심의 전조가 되는 일반적인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어린지에 관계없이 아담 안에서 타락한 유아들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축복이 어떻게 역사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을 향해 축복의 말씀을 하시는 구세주의 말씀이 아무런 쓸데없는 의식에 불과하며 텅 빈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부모가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성령 은혜의 대상이 되었던 유아의 구원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거룩한 아이였던 아기 예수 자신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전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몸은 예비되었고 예수님의 인간적 영혼은 성령으로 충만했다.

 

천사에 의해 예언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신 탁월한 선구자 세례 요한 역시 그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였다.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1:5).

 

셋째, 전형적이며 특별한 시대로부터의 유추는 또 다른 증명을 제공한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할례 의식은 은혜의 계획 안에서 그 시대에 필요한 성례로 간주되었다. 이 할례는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 계속되었는데, 이것은 신자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 섭리는 성령의 직무아래 있는 교회를 위해 예비된 것으로서 더 나은 것을 예표하고 예시하기 위해 계획된 특별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이 논증은 은혜와 구속의 계획 안에서 유아들의 구원에 관한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증명이 될 것이다.

 

마지막 넷째로, 이 증명은 기독교회의 세례 의식에 의해 완성되고 종결된다. 단 이 세례식이 어린 아이들에게 적용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가 어린 아이들에게도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례식은 유아들을 위한 은혜 언약의 약속과 준비 안에서 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도 신적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고 능력 있는 존재들이며, 그들 역시 구속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유아들의 지성에 역사하시는지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구원의 축복에 어떠한 수단과 매개체로 참여하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유아들의 중생은 그들의 지성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언제나 은혜의 원리, 아이들에게도 이 원리가 존재하며, 실행에 옮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지만 여전히 이 원리는 참된 구원을 향한 원리임을 주장해 왔다. 미발달기에 있는 유아들에게 있는 이러한 원리는 일반적으로 부모들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부모와 유아들이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때와 장소와 방법에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받고 구원함을 얻는다.” 왜냐하면 바람이 불되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기 때문이다.

 

2. 세례 중생론의 오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어떤 이들은 세례를 단순한 의식이나 아무런 의미 없는 표시, 혹은 쓸데없는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또 다른 이들은 모든 세례가 중생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외의 또 다른 중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매우 강력하게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논조는 이 두 가지 주장을 매우 파괴적이고 악성적인 오류로 간주하며 배격한다. 이제 이 주제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1)이미 언약 안에 있기에 받는 유아세례

무엇보다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능력을 가지며, 세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언약의 이해관계 안에 있음을 전제한다. 유아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언약을 획득하거나 언약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여러 면에서 매우 실제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는 세례 받지 않은 자는 결코 중생받을 수 없다는 이론을 뒤엎는 것이며, 이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기 이전에 아이을 잃은 많은 부모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부분이다. 또한 이러한 구분은 세례 자체의 독특한 본질과 목적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부모의 자녀들 역시 언약의 백성들이며, 언약과 인침의 표로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다.

 

2)그리스도의 소유로 간주되는 표와 인침

언약 안에 있는 신자의 자녀들이 세례를 받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 접붙이게 되는 것과 중생, 죄의 사면과 주님의 것으로 간주되는 표와 인침을 의미한다. 세례라는 교리에 대해 명백하게 증거해 주는 구절들(6:3-4, 벧전3:20-21, 고전12:13, 2:11-12, 2:38-39)은 심오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세례는 복음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설명하고 구원에 필요한 진리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제까지 어린아이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고 능력 있는 존재들이며 세례의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 접붙이는표이자 인침이 됨을 살펴보았다.

 

성인들의 경우, 신앙고백이 없는 세례식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유아들의 경우, 부모들의 신앙고백이 없는데도 아이들을 위해서 세례식을 거행한다면 그 세례 역시 동일하게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경우 세례가 언약 안에서 믿음이 역사하는 은혜의 가시적인 상징이자 참된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아세례의 시행은 부모들에게 풍성한 격려와 위로를 주며, 유아들에게는 그들이 성숙한 나이에 이르면 그것이 얼마나 풍성한 영적 교훈을 주는 것인지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에는 언약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은혜의 표와 인침을 세례 받는 유아들의 것으로 만드는 가시적인 적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적용은 세례 받는 아이들에게 복음의 초청과 부르심과 약속에 대한 특별하고도 인격적인 지침들을 제공한다. 또한 이 적용은 부모들의 믿음과 소망을 살찌우게 하기에 충분하며, 나중에 그들의 자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에게 부과된 엄숙한 책임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부모들의 믿음의 기초로 인하여 자녀가 거룩하다고 선포되고 세례의 특권에 참여하였음을 아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고 능력 있는 존재들임을 반드시 확신해야 하며, 그들을 위하여 믿음과 소망과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제시해 주는 언약과 특권들을 소유한 자들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임을 수시로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여생 동안 언제든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의심, 즉 그들이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심이 들 때면, 그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는 유아였을 때,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 언약의 인침을 회고해 보아야 하며, 거기서 완전한 자유의 복음이 제공하는 소중한 확신과 보증을 받아야만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렸을 때 아이를 잃은 부모들에게 이 진리의 말씀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큰 위로와 확신을 준다.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8:26-40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 사건은 무지하지만 신실하고 진지한 구도자가 비록 예수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는 명백한 진리의 지식을 배우기에 여러 가지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형편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종종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아름다운 실례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진리를 추구했으나 아직도 여전히 어둠 가운데 거함으로 빛을 보지 못한 자들의 경우를 설명하기에 알맞은 회심이다.

 

1. 에디오피아 내시의 절망스러운 처지

 

회심하기 이전의 에디오피아 내시는 약간은 소망스러운 조짐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회심을 발생시키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나쁜 상황에 처해 있었다. , 그의 회심을 방해하고 진리의 지식을 획득하는 일을 지연시켰던 상황들 가운데 하나는 에디오피아라고 하는 그의 출생지와 거주지를 지적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통치를 받던 큰 권위를 가진 내시라는 높은 사회적 신분과 광범위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처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는 많은 외부적 환경과 상황들이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본문에서 그의 마음에 발생한 소망스러운 징조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에디오피아라는 이방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신조와 고백에 있어서 유대 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며, 오직 참되고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었다. 그가 어떻게 믿었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라는 말과 그가 돌아가는 길에 구약 성경을 읽고 있었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예배에 참석할 만큼 매우 헌신적이고 열렬한 예배자였다. 그가 예배하러 왔다는 것은 곧 그가 기도하러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미 그가 기도의 영에 사로잡혔음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병거에서 이사야서를 읽으며 소중한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게 된 것은 부지런히 탐구하는 영의 소유자였다. 그의 탐구의 영은 겸손과 가르침을 잘 듣는 마음으로 채워졌으며, 이는 위대하고 복스러운 변화의 가장 소망스러운 징후들로 간주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진리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한 자였다. 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철저하게 결핍되어 있었다. 그저 의식적인 종교생활을 했던 자였다.

 

2. 내시의 회심과 진리의 말씀

 

그러하다면 이제 에디오피아 내시가 구원적인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그의 신분이나 영향력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동안 유대 지역에 퍼져 있던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소식들을 듣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그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채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진지한 구도의 영과 기도의 영을 베풀어 주셨다.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사(Gaza)의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주셨고, 바로 그곳에서 그가 회심한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와 복음 전도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중재사역 모두가 이 에디오피아 내시의 회심 사건에 동원된 수단과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그의 회심이 효과를 발휘하게 한 참된 수단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단순한 진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내시의 회심과 믿음의 관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발생한 변화의 본질,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실제적인 결과들은 철저하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던 그의 믿음에 있었다. 그의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는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간청이었다.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자기 자신의 죄를 씻음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세례를 받은 후 내시는 흔연히(기쁘게)’ 길을 떠났다(8:39 참고). 그는 복음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느꼈던 것이다. 그가 복음을 믿은 그 순간부터 그 복음은 기쁨이 되었고, 그의 마음은 축제의 마음이 되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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