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1/13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히 6:1-3
2016-11-13 주일설교
본문: 히 6:1-3
제목: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1.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와 ‘교훈의 터’는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히6:1-2)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기본 원리가 바로 도의 초보이고 교훈의 터이다.
기초와 터가 튼튼하지 못하면 그 위에 건물을 세울 수가 없다.
기본에 충실해야 그 위에 발전과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
계속 5대0을 먹으면서도 기본에 충실했기에 히딩크 축구팀은 4강까지 갈 수 있었다.
어렵다는 수학도 영어도 기본부터 충실히 해야 정복할 수 있다.
급하다고 건물만 마구 올렸다가는 쉽게 무너지고 만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다. 산상수훈의 결론적 말씀이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오늘 본문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는 기본 원리를 6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본 원리를 잃어버려서도, 결코 잊어서도 안 된다.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신앙 고백과 소망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1)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의 행실은 죽은 행실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 영혼이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살려 주셨다.
회개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와 행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거듭나게 하시고 회심케 하실 때 일어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
회개는 성품과 생활에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2) 하나님을 향한 믿음.
회개와 믿음은 연결되어 있고 항상 함께 간다. 떼어낼 수 없는 쌍둥이들이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회심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은혜가 와서 믿어지는 것이지, 내가 믿기로 결단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가 오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 된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게 되니까 회개하고 죄를 버리게 된다.
3) 세례.
물 세례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한다.
죄의 회개와 하나님 향한 믿음이 이루어졌다고 인정하는 표요 인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인쳐주는 초보적인 표시와 상징이다.
세례 받음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회원으로 가입이 되고 성찬 예식에 참여할 자격을 취득한다.
세례 받음으로 우리의 성품과 삶은 그 전과 다르게 구별되어야 한다.
세례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죄를 멀리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가도록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써야 한다.
세례 예식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성령으로 세례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세례는 한 번 받으면 되고, 반복해서 다시 받을 필요가 없는 믿음의 기초이다.
4) 안수.
세례는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안수는 기름부음을 대신한다.
왕도 선지자도 제사장도 기름부어 세웠다.
목사직도 노회에서 안수를 받음으로서 자격을 정당하게 갖추게 된다.
병든 자를 위해 안수를 행하기도 한다.
5) 죽은 자의 부활.
죽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이다. 영혼은 영원히 산다. 영적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이시고 우리는 그 다음의 열매들로 부활한다.
주님 재림하실 때 우리의 죽은 몸은 영혼과 재결합이 이루어진다.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된다.
6) 영원한 심판.
심판은 재결합된 몸과 영혼의 영원한 상태를 결정한다.
믿지 않은 악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을 내리고, 믿는 의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믿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영광과 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산다.
2. 도의 초보와 교훈의 터에 계속 머물러 있지 말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히6:1-2)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라는 것은 이제 그만 생략하거나 내버려두는 것, 최소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는 것은, 터는 한 번 닦았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와 교훈의 터가 매우 중요하지만 계속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깊이 더 위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 초보와 교훈의 터 위에 신앙을 세워나가야 한다.
초보와 터가 놓여졌으면 그 위에 상부구조가 세워져야 한다.
초보와 터는 건물을 지탱하고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놓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어린 아이에서 장성한 자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2-14)
때가 오래 되었다는 것은 믿은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도 다시 배워야 할 처지에 있다.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계속 젖이나 먹어야 할 어린 아이의 처지다.
어린 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이다.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성실을 맛보아 알아야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자이다.
사람들이 장성하면 지각을 잘 사용하고 단련하여 음식을 잘 구별하는 것 같이
영적으로 장성한 자들은 영적인 지각들을 잘 사용하고 연단하여 선과 악을
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잘 분별하고 행하는 숙련자들이다.
믿음생활을 오래 하였으면 이런 선생, 이런 장성한 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우리도 달려가야 하고 향하는 푯대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푯대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어야 한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고난을 이 땅에서 받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하셨다.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상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되어야 한다.
그 소망이 우리 영혼의 닻이 되어 튼튼하고 견고한 믿음의 항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환경과 고난에 흔들리지 말고 견실하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2-3)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나아가라는 것은
완전한 데로 가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이다.
사람이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느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들의 죄성과 부족함을 합리화하는 철학자들의 궤변일 뿐이다.
중국 속담에 상(上)을 목표로 하면 중(中)에 이르고 중(中)을 목표로 하면 하(下)에 머문다는 말이 있다.
성경은 거룩과 온전에 이르라고 하신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벧전1:16)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한 일도, 완전함도, 결코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우리는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분도 아니시고, 오직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훈을 주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주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도를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8-29)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치면,
그리고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하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자녀가 되게 하신 목적이 무언가 보라.
거룩하고 흠이 없게, 곧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로마서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우리가 본받아야 할 아들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분의 성품과 삶을 말한다.
그분의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닮고, 공평과 공의와 사랑의 삶을 말한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자녀 삼으신 목적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 땅에서 사랑과 축복과 형통을 주기 위함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교회 이름에 사랑교회, 축복교회, 행복교회 등등이 많은 것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그것을 주고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간판을 걸고 있다.
책임도 못 지면서 해결도 못하면서 우선 사람을 끌어들여 채우고 싶어서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아마도 이런 사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교회들이 얼마나 성경을 왜곡하고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는 교회인데, 그리스도도 말씀도 없는 교회, 기독교는 기독교인데 세상의 포로된 교회들이다.
복음이 세상의 부와 형통의 바벨탑에 갇히고 말았다고 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다고 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들이 적다고 하셨다.
왜 적은가? 거룩과 완전을 이루어야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결 없이는 성취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다들 쉽다고 속이는 길로 가기 때문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어찌 거룩한 하나님이 그러한 자들을 축복하시겠는가?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성경과는 다른 예수이고, 성경과는 다른 하나님이고,
성경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고,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9)
교회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도,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고 있는데도,
수가 많으니까 거기에 속하여 안심들 하고 있는데, 저주에 놀라 자빠질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은 바른 복음을 못 믿도록 교란하는 자들이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다.
사도 바울의 한탄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가 그랬으니,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성경의 복음과 멀어져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경의 명령은 분리하여 나오라는 것이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6:17)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1:10)
이런 말씀을 보고도 한 번 속하고 나면 진리와는 상관 없이 절대 안 나오는 것을 본다.
젖먹는 어린아이들은 분별하질 못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사람이라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 영적 지각이 연단 되어야 선악을 분별할 수 있다.
지각이 연단이 안 되면, 다른 교훈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분별할 수 없다. 비극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젖먹는 어린 아이인 채로, 초보와 교훈의 터에만 계속 머물러서야 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장성한 자가 되기 위해 경건의 훈련을 하자.
말씀과 기도에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