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차녹

[스크랩] 스테판 차녹, 바로 알아야 할 거듭남의 본질 8

강대식 2016. 11. 28. 16:20

13장,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된다는 소망이 주는 위로


  거듭남의 본질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거듭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이 있습니다. 새 출생의 날은,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과 생명의 지배 아래로 들어오게 된 행복한 날입니다. 사망의 열매를 맺던 것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한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죄가 불만과 슬픔을 전달한다면, 은혜는 흡족함과 만족을 전달합니다. 그 위로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새창조로 당신은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의 씨이며,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입니다. 당신과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당신 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서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요17:23)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시고,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와 같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은 몸에 있는 지체와도 같습니다. 당신 안에서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가 되고, 당신 안에 있는 성령은 당신을 가르치고 살리는 원리가 되십니다.

새창조는 당신의 적대감을 없애고 아버지 하나님을 당신의 친구가 되게 해주며, 당신은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 소유로서 성자 하나님과 연결시켜 주며, 당신의 교사와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성령과도 연결시켜 줍니다.

이전의 출생으로 당신은 진노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출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본성에 의해서 당신은 아담의 허리에서 나옴으로써 세상의 모든 부패와 연관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출생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대대로 주에게 돌려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위로입니까?

신하가 보호를 받는다면, 아들은 사랑을 받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긍휼을 입는 자이지만, 아들은 왕의 본성을 가진 자입니다. 아들로서는 그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특권을 가지지만, 신하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닮은 것에게 가장 큰 온유함을 베풀지 않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으로 신적인 습관을 주입하신 사람들 속에,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닮을 것이 있음을 즐거워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피조물들 안에 있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태도에 새로운 영, 새로운 아름다움이 주입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워졌기에 이전처럼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전처럼 듣지 않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교만한 대신에 상한 마음이 되고, 모든 제사에는 통회의 눈물이 있습니다. 열정의 영,

하늘의 따스함, 그리고 향기로운 냄새가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이런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3. 당신의 행복을 위한 든든한 기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신적인 성품을 가지게 되며,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고, 하늘의 기쁨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새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새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닮는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모든 불행의 원천입니다. 반면 그분과 닮는 것은 모든 복의 기초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당신은 상속자이며, 거룩하게 된 피조물로서 당신은 그 유업에 적합한 자입니다. 당신은 세습을 통해서 적합한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적합한 자라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우리는 지금 이러한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름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합니다. 아직 우리에게 완전히 나타나지 않았지만, 행복의 확실한 기초가 됩니다. 이러한 행복은, 하늘에 대한 소망을 미리 맛보는 것과 더불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고 위로입니다

  당신이 얻게 되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변화된 자신의 상태를 바라 볼 때마다 황홀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양심이 깨어나게 되면 그 반사적인 반응으로, 거듭나지 않은 영혼 속에서는 고뇌와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는 동일한 양심의 기능이 샘솟는 기쁨을 넘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탁월하심을 생각하실 때에 무한한 즐거움을 누리시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비례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의 하십시오. 이렇게 자신을 바라 볼 때 어떠한 교만함이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그 위로를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겸손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당신의 마음 속에서 부여하신 탁월한 청사진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 안에 있는 불완전항 형상, 곧 그 형상의 희미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기쁨을 얻는다면, 당신의 영혼이 그 최고의 완전함과 가장 만족스러운 열매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에는 얼마나 더 큰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5. 때가 되면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대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서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자가 곧 완전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될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모든 일을, 영혼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그 보좌에 앉으사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보게 되는 것처럼, 그분을 닮은 것도 완전해질 것입니다. 피조물이 이룰 수 있는 그 한도 안에서 가장 닮은 꼴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있어서 그분과 닮은 모습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그분의 영광스러움에 있어서 그분을 닮게 될 것입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3:18) 닮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미한 윤곽이 아니라, 혁혁하게 빛나는 그분의 형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망의 몸의 신음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죄와 정욕의 위협이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면서, 이 새창조가 당신에게 제공하는 위로를 다음과 같은 상황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생에 대하여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과 괴로움은 다 이상 당신을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새창조를 완성시키고 하나님의 형상을 더욱 깊게 새겨지게 하며 그 형상을 따라서 실행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관계되도록 도우면서 두려움을 쫓아내야 합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지명하여 불렀다면, 무엇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신 속에 있는 은혜는 당신으로 하여금,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할 뿐만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해야 합니다.(롬5:2,3) 그 환난이 인내를 낳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으로 즐거워하는’ 것과 같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의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난의 근심과 걱정을 단 꿀로, 쓴맛을 달콤한 맛으로 바꿔 놓아야 합니다.


2) 유혹에 대하여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 자신의 작품이요, 그 마음에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보존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계획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손해를 당하면서까지, 곧 생명을 주시면서까지 가치를 두고 계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대적에게 벌거벗은 채로 노출시키신다는 것이, 무한하신 그 사랑의 마음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새로운 피조물을 친히 낳으신 성령께서 그 위를 날개로 덮으시고 강력한 대적으로부터 방어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되었기에 사탄의 악한 궤계로부터 보호를 받게 됩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2:2)라고 하신 말씀은 새로운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계속해서 믿음을 견고하게 지키면, 맹렬한 사탄의 공격에도 그의 행복이 능

히 보존되고,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사탄이 그의 모든 유혹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하만이 모르드개를 이길 수 없었던 것 같이, 하나님의 씨에 대항해서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두려움에 대하여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창조이지, 도덕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혜는 도덕적인 행위에 의해서 획득된 도덕적인 덕과 같은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힘에 의해서 가라앉거나 잃어버린 바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거듭남을 시작하신 성령께서 그것이 육체로 끝나도록 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 아니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으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서는 아담의 줄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없는 것처럼 한번 그리스도 안에 심기게 되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줄기에서 떨어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안정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당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보존하는 것도 그분의 위대한 일입니다. 또한 신적인 성품은 굉장한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한번 가지게 된 사람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새창조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빌3:10)이며, 또한 그 결과에도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영혼이 새롭게 된 것은 다시 옛것이 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결국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요, 그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 위하여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4) 은혜를 받았는데도 아직 연약함과 부패함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전체적인 뼈대는 금방 형성됩니다. 영혼 속에 새로운 기질이 주입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하지만 아기로 태어나서 점점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 것과 같은 과정이 있습니다.

은혜의 진수는 그 정도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모든 새로운 피조물 안에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불의 본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얼마나 센 불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불꽃은 본질적으로 불이므로, 그것이 비록 거대한 화염처럼 세게 타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불붙은 것입니다. 가장 약한 은혜라 할지라도 우리 육체에 부패함이 뒤섞여 있지만, 결국 그 부패함을 이겨냅니다. 그 은혜는 매일같이 정욕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서 그 정욕을 잡아 먹고, 자신과 반대가 되는 것에 대항하여 날카로운 적대감과 힘을 가지도록 날마다 자라납니다. 아무리 적은 은혜라고 하더라도 죄에 대항하여 결국 이기게 되고, 죄가 강력하게 공격해 오더라도 그 죄의 지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그림의 대략적인 밑그림은 그린 이가 그리고자 하는 것과 닮은 모습일 것입니다. 화가가 그것에 여러 번 색을 칠하면서 그것은 더욱 생생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1) 만약 당신 안에 역사하는 그 은혜의 약함과 부패의 강함에 대한 불평이 참으로 진지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포 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위로의 표시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 빨리 자라지만 곧 말라 버린 것처럼, 서둘러서 그러한 척하는 사람들이나 오만하게 자랑하는 자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더디게 싹이 돋지만 잘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되며, 폭풍 가운데서도 잘 견뎌 냅니다.


(2) 당신이 당신 안에 있는 모든 부패함을 지금 뽑아내려고 하는 것은 합당한 생각이 아닙니다.

  질병이 치료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 병의 기미가 마음이나 몸에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도 영적인 연약함의 기미는 남이 있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법이 몸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단번에 모두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신의 성품만이 아니라 마귀의 성품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형성된 그리스도는 그것을 지배합니다.

원죄의 부패는 비울 수 있는 깡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의 샘물과 같습니다. 힘을 써서 단번에 고여 있는 물을 모두 다 퍼 올릴 수는 있겠지만, 곧 다시 물이 고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리니”(요일3:9)라는 말씀은 참됩니다. 그는 이전에 행하던 기질로써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라는 말씀도 참됩니다. 가장 성숙한 영혼이라고 하더라도, 마지막 영광스러운 날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흠이 없는’(엡5:26) 상태일 수가 없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은혜를 전달하시는 것은 모두 순차적입니다.

  겨자씨가 한순간에 큰 나무가 되어 버립니까? 은혜가 심기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그렇게 빠르게 자라지는 않습니다. 마음 속에 형성된 그리스도는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와 비슷합니다. 그분은 걷기 전에 먼저 요람에 뉘여 있었습니다.

새창조는 부패함에서 완전한 순결로 껑충 뛰어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속에 새벽이 오지만, 그 빛이 어둠을 쫓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4:18) . 새벽녘에 맨 처음 나타나는 햇살은, 마지막에 최종적인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세대가 지날 때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가 점점 더 밝아져 왔습니다. 신적인 성품이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자라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형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마음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그리스도 자신만큼 성숙되게 하시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4) 이 문제가 당신의 의지와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라는 말씀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하여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기를 원하므로”(히13:18), 선하게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침착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 전체에 은혜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하며, 또한 당신의 구속주를 가까이 하려는 새로운 의지가 있습니까? 비록 그 기능들이 약하기는 하지만, 사랑과 열정, 기쁨으로 구성된 올곧은 감정이 있습니까? 더욱 생기 있고 활력이 넘치는 은혜를 들이마시려고 하십니까?

그러하다면 사망의 몸이 가진 그 불평 때문에, 당신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약화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것 안에서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것으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에게 이미 행하신 것을 더욱더 견고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이 탄원하는 소리에 귀를 막지 않으십니다.


(5) 그것은 사망의 두려움을 이겨 내는 위로입니다.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죽음은 겉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영혼은 고양됩니다. 새 본성은 자연스럽게 육체를 벗어버리고 부패의 허물들을 뒤에 남겨둔 채로 하늘로 올려질 것입니다. 원형과 복사물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떠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 안에 있는 은혜의 진리와 창조주 안에 있는 영원한 의가 서로 입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자신의 형상을 껴안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 속에 새겨진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즐거움 가운데서 보려고 하시겠습니까! 또한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서 자신을 얼마나 즐거워하면서 보려고 하겠습니까! 그 영혼은 영광 중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완전함 가운데서 바라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오직 사랑과 생명만이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이러한 행복 가운데로 새로운 피조물을 인도하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조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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