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뉴에이지 신비주의의 옹호자와 전파자들/ 레이 윤겐(신비주의 강의안)
3 장 옹호자와 전파자
웨인 티즈데일의 말처럼 관상 수련에는 분명히 신의 임재가 느껴진다. “침묵 가운데 한 역동적인 임재가 거하고 있다. 이것이 신이다. 우리는 그에게 맞춰진다.” 그러나 이 임재가 진정 하나님이신가? 성경은 경고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이 문제는 진정으로 중요하다! 나는 기독교를 좀 더 깊이 탐구해 보려는 바람으로 시작했다가 아래 저자들이 권장하는 책들과 수련법을 따르다가 골수 뉴에이지 추종자가 된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글에는 일면 좋은 면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은 누룩이 전체 덩어리를 쉬게 만든다(갈5:9). 뉴에이지 저자인 마릴린 퍼거슨이 뉴에이지 추종자들에게 물으면 31퍼센트는 그것이 “기독교 신비주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콧 펙(1936~2005)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지난 수십 년 넘게 책 한권이 늘 올라와 있었다. 고 스콧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이 그것이다. ‘라이프’지는 이 책을 “나라의 제도”라고 칭했고, 책의 판매를 성경의 그것과 비교했다. 이 책이 수백만 권이 팔리고 숱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도 이 책이 “영적 성장을 추구함과 정신적인 성장을 달성함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면에서 뛰어나다”는 찬사를 반복했다.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부문에서 스콧 펙의 책들은 서가의 거의 반을 차지한다. 펙이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문제에 대한 그의 과장 없는 접근이다. “영적 성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조금 더 대담한 진술을 한다. “그것은 개인이 전적으로, 온전하게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펙은 “붓다, 그리스도, 노자 등 다른 많은 성현들이” 과거에도 “이 개념”을 전파해 왔다고 믿는다.
1980년 세례 받고 생을 마칠 때까지 펙이 받아들인 일종의 “기독교”는 어떤 것인지 보라.
1. 뉴에이지 잡지와 인터뷰에서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신이 내려주신 책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지만 근본주의에 질려 버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펙이 “동방 신비 종교에서 기독교 신비주의(관상기도)를 향해 움직인 궤적 또한 보여준다.”
2. 신비 기도는 펙의 영성적 기초가 되기도 한다. 펙은 ‘열리길 기다리는 세계’라는 책에서 신비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마음 비움의 과정은 너무 중요해서 계속해서 의미 깊은 주제가 된다--- 따라서 마음 비움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 예기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들어올 것을 위해 마음에 공백을 만드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의 음성이다”. 펙은 예수가 “하나님과 자신을 통합한 서구 신비가의 한 전형”이었다고 한다.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의 낮은 자아에 기대길 중단”하고 “우리의 더 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관상기도는 “최고의 각성에 바쳐진 생활이다.”. 미국의 전 부통령 엘 고어는 이 책이 “대단히 중요한” 책이고 “놀라운 가치를 지닌 안내서”라고 한다.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야 할 강력하고 새로운 이유”를 주었다고 찬탄한다.
3.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이라는 책은 뉴에이지 지도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가 “신비주의”는 모든 세계 종교를 연합할 수 있는 실천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폭스는 이것을 “깊은 의미의 에큐메니컬”이라고 칭했다. 폭스는 설명한다. “우주적인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나 자신이다.” 그리고 예수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성을 깊이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준” 분이다. 펙은 폭스의 진술을 철두철미하게 지원하고 나선다. 폭스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는 구원이 요구하는 가치와 실천”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폭스는 “역사적인 예수를 떠나” “우주적인 그리스도”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펙은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덧붙여’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1 나는 20년간 선불교 수련자였다. 이것은 기독교로 향하는 준비였다.
2 “미국의 모든 초등학교는 5학년부터 선불교를 가르쳐야 한다”.
3 “기독교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잘못은 다른 종교에 구원이 없다는 생각이다.”.
4 “뉴에이지 운동은 괴팍스러워보이지만 그 바탕은 매우 경건하고, 덕은 정말 엄청나게 크다.”
5 “뉴에이지가 단지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면, 뉴에이지는 진정 거룩하고 절박하게 요청된다.”
6 그는 독자에게 질문한다.“스콧 펙은 뉴에이지 추종자인가?” 스스로 대답한다. “그렇다.”
“물병자리 시대의 모사로 인식되는 것이 자랑스럽다.”
7 그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 격려 재단이 “본격적인 뉴에이지 조직”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안토니오는 펙을 “뉴에이지의 빌리 그레이엄”으로 보았고 “뉴에이지의 굵직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토머스 머튼(1915~1968)
루터 킹과 인권 운동, 헨리 포드와 자동차가 연결된다면, 토머스 머튼은 관상 기도와 연결된다. 머튼은 이 기도를 수도원에서 꺼내어 대중에게 소개하고 대중 사이에서 유행시켰다.
인류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죄와 환영이 만질 수 없는 무가 놓여 있다. 이 지점에 순수한 진리가 있다.--이 작은 점--이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순전한 영광이다. 이 점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머튼의 진술이 신비교에서 규정하는 더 고양된 자아와 얼마나 유사한지 보라. 무슬림의 한 분파 수피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만트라로서 알라의 이름을 묵송하면서 황홀경에 들어간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서 신을 경험한다. 판매 카세트에 나오는 말이다.
머튼은 이슬람의 영적 교사이며 신비가인 수피들을 애호했고 그들과 깊은 영적 공감을 나눴다 여기 머튼은 수피들의 심오한 영성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한 수피 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머튼은 말한다. “나의 기도는 여러분의 파나를 많이 지향하고 있다.” 파나는 “신적 일체에 합일하는 행위”라고 한다. 파나의 이 수피적인 개념을 무슬림과 기독교를 연합하는 하나의 촉매제로 보았다.
말에는 해결할 길이 없는 무한한 복잡성과 교활함이 도사리고 있기 쉽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적인 빛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유익한 대화가 오갈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여기다.
아시아, 선, 이슬람 등은 내 삶에서 함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배제하고 수도원에서 지내라면 내게는 너무 엄혹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수도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머튼의 신비 경험은 그 자신을 궁극적으로 다른 동양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영을 믿는 자 그리고 비슷한 신비가로 만들었다. 머튼의 통찰과 동양 종교의 통찰이 너무나도 똑같기 때문이다. 머튼의 전기 작가는 말한다.
머튼이 동양으로 간 이유를 알고 싶으면, 머튼의 신앙 전통(가톨릭)의 뿌리가 관상 기도임을 알아야 한다. 가톨릭은 그에게 동양의 합당한 지혜의 길을 깨닫는 데 필요한 영적인 준비(관상기도)를 해주었다.
이것은 사막 교부들이 심은 나무의 열매이다. 동양 종교에서 방법론을 빌려 올 때는 그들의 신 이해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머튼이 가톨릭교회와 주류 개신 교단에 남긴 영향은 상당히 강하다. 그리고 이제는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자라나기 시작했다. 많은 기독교인이 머튼의 겸손, 사회적인 의식 그리고 경건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그의 지적 역동성 역시 끄는 힘이 강력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머튼의 이단적 성향은 그의 특징을 중화하고 말았다.
“머튼이 남긴 작품 전체는 아시아적인 지혜의 중심 사상, 경험 그리고 비전에 녹아 있다.”
헨리 나우웬(1932~1996)
토머스 머튼에 버금갈 정도로 기독교 진영에서 인기와 존경을 얻은 인물이 있다면 가톨릭 신학자인 고 헨리 나우웬이다. 많은 목회자와 교수가 나우웬의 깊은 사색에 크게 매료됐다. 시적이고, 위안이 듬뿍 담긴, 그러면서도 지성적인 문체로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은 미국 장로교회 지도자 3,4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1994년의 여론조사를 인용해, 영향력 면에서 빌리 그레이엄에 이어 나우웬이 2위를 차지했음을 말하고 있다.
나우웬은 그를 영감을 주는 인물로 꼽는 많은 평신도들에게도 인기가 있다. 따뜻한 위로로 감싸 안아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모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자주 인용하는 나우웬이 노년에 하나님을 보편 구원론자의 입장에서 주저함 없이 진술했다는 사실은 유감천만이다.
나는 이제 예수가 하나님의 집 문을 열기 위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인간 존재는 자신이 예수를 알든 모르든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제 내 사명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길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우웬은 만트라 묵상을 지도하는 힌두교 영적 선생인 에크나스 에아스와란의 책을 추천하면서 “이 책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썼다. 나우웬은 기독교를 힌두교 영성과 관련짓는 한 책에 서문을 달면서 이렇게 썼다.
저자는 불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선물에 활짝 열려 있다. 그는 기독교적인 영적 생활에도 유익한 종교들의 위대한 지혜를 깨내고 있다--- 저자는 자신 스스로 영적인 전통을 배우기 위해 인도를 여행했다. 그는 많은 보화를 가져왔고 그것들을 이 책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마음의 길’이라는 저서에서 나우웬은 권한다.
단어 하나를 조용히 반복하라. 생각이 마음의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다--이 단순한 기도의 방법이 -- 우리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로 열어 간다.
이 하나님의 “역동적 임재”는 정통적인 복음주의 기독교가 아니라 고전적인 힌두교에 좀 더 가깝게 서도록 가르쳤다.
기도는 “영혼의 노동”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하나인 곳의 중심이다.-- 실재하는 모든 것의 통합을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 안이다.
나우웬은 “만유가 하나다”라고 했다. 이것은 내재신론의 기본적인 신 인식이다.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이 만물을 통합한다는 인식이다. 나우웬은 머튼과 마찬가지로 신비 기도가 모든 기독교 전통 안에 자리 잡는 패러다임이 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나우웬은 복음주의 교회가 칭찬할 만한 많은 점이 있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 약점을 위한 방법이 바로 신비주의다.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힘주어 주장함으로써 이 약점을 치료하려고 애썼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 침묵(관상 기도)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나우웬은 자신의 자서전적인 ‘안식의 여정’에서 1996년 저술가며 강연가인 앤드루 하비와 만난 일을 기쁨에 겨워 말하고 있다. “나는 영혼의 친구(멘토)를 만났다는 느낌을 가슴 깊이 느꼈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 나우웬의 신앙 체계를 깊이 엿볼 수 있는 것은 하비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기반의 혼합 영성 옹호자라는 사실에 있다. 하비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신성의 자녀들이기에 여기 이 땅 위에서 그리고 하나의 몸 안에서 우리의 원천과 더불어 정체를 구현할 수 있다.
나우웬의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이클, 토머스 그리고 나는 근처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나눴다. 우리는 엔드루의 신비주의가 어떤 감동을 우리에게 줬는지 제법 길게 토론했다.
토머스 키팅과 바실 페닝턴
이 두 사람은 ‘중심에서 은혜 찾기’를 같이 쓴 가톨릭 수사들이다. 이 책의 한 내용이다.
우리는 동양의 오래된 지혜의 열매를 취하고 그 열매를 그리스도에게 “갖다 바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실로 우리 가운데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동양의 수련 방법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자기 것으로 습득하는 노력을 반드시 기울여야 한다.
기도생활을 충실히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요가, 선, 초월명상 그리고 이와 비슷한 방법에 크게 도움을 얻고 있는 바,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교사들이 이끎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견고하게 자라나 결국 경험에 이르는 내면의 형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자들에게서 그렇다.
이 두 사람은 기독교를 자신들이 ‘침잠 기도’라 하는 관상 방법을 통해 동양의 신비주의와 섞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교감하기 위해 만트라를 사용합니다.” 침잠 기도를 하는 공동체가 오늘날 번창하고 있다는 말은 딱 맞는 말이다. 아주 활동적이고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를 받아 들인다. 그들이 교회 안으로 새로운 활기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
키팅은 “신의 첫 언어는 침묵이다”라고 전파한다. 그는 1991년 한 해에만 모두 31,000명의 사람들에게 “신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쳤다. 한 번의 세미나에 보통은 수백 명씩이 참석해 “침잠”을 배운다. ‘뉴스위크’지가 2005년에 ‘영적인 것을 찾아서’라는 기사를 실었다.
수련자들은 하루에 두 번 20분씩 조용히 앉아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눈을 감고 마음을 신에게로 향한다. 키팅은 십여 권의 책, 많은 강연 그리고 수련회에서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키팅은 “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자 찾는 허기진 사람들”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퍼드리고 있다.
틸덴 에드워즈와 제럴드 메이(1940~2005)
관상 기도 운동을 성장시킨 학교가 있다면, 워싱턴 DC에 자리 잡은 샬렘(영적 훈련) 연구소일 것이다. 1972년 설립 이후 많은 영적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에드워즈는 성공회 사제이다. 이 단체의 사명은 기독교 전체에 신비 기도의 수련을 퍼뜨리는 것이다.
일부 불교 전통은 매우 실용적인 행위 방법을 발전시켜 왔기에 많은 기독교인이 도움을 얻고 있다-- 참가자들에게 삶을 향한 새로운 시야와 가능성을 제공하고 살아가는 나날을 통해 빛나는 은혜의 임재 안에 좀 더 충만하게 거하게 한다.
기독교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있다면 정신과 의사이며 저자인 제럼드 메이다. 샬렘 연구소의 공동 설립자며 연구원이었다. 그의 저서 ‘진짜 제 정신’의 서문에서 과감하게 기술한다. “이 책이 취하고 있는 탐구의 계보는 세계의 고등종교 경건이다.”그는 이어 두 명의 티베트 불교 라마(거룩한 자)와 한 명의 일본 선승을 향해 자신에게 “각별한 영향을 미쳤음을 감사하고 있다.
동양적인 영성의 영향에서 ‘중독과 은혜’라는 메이의 책은 기독교적 치유 분야에서는 고전으로 손꼽힌다. “우리의 중심--사람의 중심--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와 우리 각 사람의 본질적인 통합을 깨닫는 곳에 있다.” 물론 이 핵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침묵이다.
제시된 이미지 혹은 성구 묵상과 관련된 묵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좀 더 관상적인 수련이다. 고요히 앉아서 하나님과 더불어 깨어있는 것이다.
(요약자 주- 토저의 침묵 기도와 비슷하다.)
그에게 우주적 임재는 “우리 자신과 모든 창조 세계를 관통한다.”
힌두교의 인사인 자이 박완과 나마스테에는 우리 모두 안에 거하면서 동시에 모두를 감싸는 신성에 대한 경외심이 깃들어 있다.
메이는 스콧 펙과 마찬가지로 1970년대를 풍미한 선불교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30년 후에도 여전히 선불교를 향한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메이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이라는 책의 추천사를 썼다.
모턴 켈시
영국 성공회 사제이고 그의 ‘침묵의 다른 면: 기독교 명상 가이드’는 정말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내면의 길 동반자: 영적 안내의 기술’은 “영적 지도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책”라고 한다. 그는 관상 기도를 이렇게 말한다.
독자는 기독교의 심층에서 뉴에이지 수련법의 대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나는 거룩한 자가 모든 심령 안에 산다고 믿는다.
켈시의 말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뉴에이지가 한층 더 부각한 현대인들의 종교적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지금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 필요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각 교회는 기도에 대한 강좌를 열어야 한다. 신학교가 목회자들을 기도, 사색 그리고 묵상, 아울러 소그룹 진행으로 훈련시키는 것이 유일한 가능성이다--교회는 선포하고 가르치고 치유할 때 뉴에이지를 꺼려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매튜 폭스
그의 저작 ‘원래의 축복’ 그리고 ‘우주적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주적인 영성을 안내하는 입문서로서, 내재신론을 강렬한 제목으로 이만큼 간명하게 소개한 책이 없을 정도이다. 폭스는 가톨릭과 주류 개신 교단 모두로부터 상당한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폭스는 머튼과 나우웬이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 안에 있는 신을 똑같이 선언하고 동양 종교에 공감한다.
신성은 모든 피조물에서 발견된다--우주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나”다.
신비주의가 없으면 “깊은 에큐메니즘”은 없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에서 지혜의 힘이 터져 나오지도 않을 것이다. 신비주의가 없으면 전 지구적인 평화 혹은 정의를 꿈꾸기 어렵다. 왜냐하면 인류는 더 나은 자아를 깨우치기 위해 영적인 깊이와 훈련, 제의와 의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들어낸 신조어 “깊은 에큐메니즘”은 혼합 영성이라는 말의 동의어다. 표면을 넘어 모든 종교의 신비적인 핵심에 도달하는 일종의 연합을 의도한다. 그는 ‘창조영성 대학’을 세웠고 지금은 ‘지혜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잘못 앉은 좌석
머튼을 이해하면 이 운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머튼과 그의 옹호자들이 분명 신 앞에서 조심하고, 도덕적인 청렴성을 강하게 나타냈다 하더라도, 이들은 사막 교부들을 통해 동양의 종교에서 얻은 신비주의에 성경적인 원리들을 혼합시키려고 시도했다.
나도 한때는 모든 종교가 하나라는 교리를 가르치는 어떤 혼합 영성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가? 내가 믿는 종교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것을 명백하게 오류라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보호하려는 그 누구도 혼합 영성주의자는 없었다. 단 한 명도 없었다!
바울은 이 다른 신들이 하나님이 아님을 알았기에 행14:11~16을 말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고, 오직 그분만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다른 종교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힌두교와 불교의 카르마, 그리고 이슬람의 복종은, 아무리 좋게 봐도, 무익하고 허망한 인간의 노력일 뿐이다. 우리는 관상을 권유하는 책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메시지를 축소하거나 실제로 정죄하는 수많은 글을 발견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지난 수 세기 동안 기독교는 거의 법률적인 용어로 제시되어 왔다. 마치 신과의 상거래, 담합인 듯 말이다. 누군가가 우리와 신 사이의 틈을 매워야 한다. 이것이 다 비즈니스다. 우리는 이런 기독교를 치워 버릴 수 있다. 법률적인 은유는 다른 세대인들에게는 도움이 됐었을 수도 있다. 좋다. 도움이 된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하지만 한 번 이런 식으로 굳게 자리 잡게 되자, 오늘날까지 이렇게 됐다. 우리는 이런 기독교를 버려야 한다.
근본주의자들은 우리 앞에 있는 복음서의 전체 문맥에서 한두 구절을 뽑아내, 그것들을 합당한 해석과 의미 너머로까지 늘였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구절은 기독교인 외에는 누구도 신에게 이를 수 없다고 잘라 말할 때, 혹은 “구원받아야”하는 필요를 역설할 때 쓰인다. 우리가 알기로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성모께서 앞으로 몇십 년 안에 그분의 추수를 단행하실 때, 근본주의라는 쭉정이는 새로운 자의식이라는 알곡과 분리가 될 것이고, 한 구석으로 치워 놓아 버릴 것이다.
혼합 영성을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한 종교에 국한하는 개념에 대단히 혐오감을 나타낸다. 한 성공회 주교는 다음과 같은 경멸을 나타냈다.
배타주의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이 사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희망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신에게서 우리가 구출받아야 하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배타주의의 신은 편협하고, 가혹하며, 맹목적이다. 이 신은 기독교 밖의 사람들의 고매함과 개인적인 거룩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 신은 영적 거장들인 모세, 싯다르타(부처), 무함마드 그리고 간디의 삶에 부모와 같은 살가운 정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신에게는 영예, 영광, 예배 혹은 찬미를 돌릴 가치가 없다. 이 신은 종교 계파로 깊게 골이 생긴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한다. 세상은 평화와 화해를 애절히 찾고 있다.(마카엘 잉함)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말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이방종교의 신비주의)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10:21). 관상 운동은 더 이상 로마 가톨릭교회와 주류 교단에만 갇혀 있지 않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좀 더 깊은 방법을 찾으려는 진지한 열망을 지닌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이 내가 분류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영성을 깊이 공부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는 오순절주의부터 침례교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 기독교 전체를 기분 나쁘게 뒤덮고 있다. 오직 분별하여 성경적으로 바로 서 있는 기독교인들만이 관상 기도 운동의 위험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분별력의 부족 혹은 성경의 왜곡은 관상하는 기독교인을 만들 수 있다. 아니 이런 복음주의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복음주의 교회를 새로운 신비주의 패러다임으로 교묘하게 옮겨 놓는 일에 관련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면 아마 놀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