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복음주의의 변종들, 미국의 바뀐 영성 추세/ 레이 윤겐(신비주의 강의안)
4 장 복음주의의 변종
리처드 포스터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관상 기도의 학교에 초급생으로 들어가길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깊이
포스터는 레노바레라 불리는 조직의 대표이다. 레노바레는 ‘갱신’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그 목표는 복음주의적인 교회에 영적 성장을 위한 ‘실용적인 전략’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진술은 본질상 매우 복음적이다. 그의 책들이 왜 수많은 고학력 기독교인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는지 납득이 간다. 반면, 포스터는 신비주의적인 내재신론 신관으로 흐르는 수련을 부인할 수 없게 보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포스터는 관상 기도의 미덕과 유익에 대해 머튼을 당당하게 인용한다. 포스터는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책 혹은 설교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해력과 빛을 주신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포스터가 관상적인 영성의 본보기라고 말하는 신비가들의 진술을 들어보자.
* 인류라는 가족의 심령은 성령이다- 바실 패닝턴
* 신이 온 세상 안에 계심을 안다.- 노리치의 줄리안
* 내가 사랑하는 신은 높은 산, 완만한 계곡의 숲,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무인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강물이다.- 십자가의 요한
* 여기(관상 기도의 순간) 모든 것이 신이다. 신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 기용 부인
요점은 이것이다. 이 신비가들의 침묵이나 포스터의 침묵은 같은 것이다. 이 신비가들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따르라고 한다. 신비가들은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이룬 자들이다. 하나님과 깊은 연합을 원하면, 신비가들이 지킨 침묵으로 당신도 들어가야 한다.
포스터가 침묵이라 하는 것은 외형적인 침묵이 아니다. 그는 저서 ‘기도: 마음의 진정한 집을 찾아서’에서 호흡기도를 권장한다. 단어 하나 혹은 짧은 문구를 택해서 호흡과 함께 반복하는 것이 호흡 기도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상적 신비주의다. “기독교 명상은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시도다.” 관상 기도와 내재신론은 장갑을 낀 손 마냥 함께 간다.
기도의 목적은 마음을 단어 하나 혹은 한 구절에 묶음으로써 신비한 황홀경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여러 교회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인정된 자”(딤후2:15)가 되라고 권고했고, “항상--기도함”(살후1;11)은 마음과 지성 두 가지 모두를 써서 하나님께 아뢰는 일이라고 했다. 포스터는 한 주제가 아니라 한 생각에 초점을 맞춘다. 기도는 한 영적 주제에 대한 연속된 생각이다. 오로지 한 생각에 마음을 고정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진정한 묵상 그리고 기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간단한 논리로 보아도 단어들의 반복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면, 묵상 중에 나타나는 이 빛은 무엇이며, 왜 빛 안에 신성의 흔적을 넣으려고 하는가?
세미나
“머튼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려고 했습니다!” 포스터는 머튼의 신념에 깊이 공감한다. 머튼의 말이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나는 불교도만큼 선해지고자 한다.” 머튼은 관상 기도에서 불교의 각성을 발견했다. 리처드 포스터는 머튼의 신비 기도에 대해 신선한 언어를 동원해 이렇게 쓰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그 어떤 인물보다도 기도의 생활을 널리 알리고 이해시킨 인물이다.” 포스터는 머튼의 책 ‘관상 기도’를 ‘필독서’로 꼽는다. “머튼은 지금도 수많은 남녀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머튼의 책들이 “영적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가길 갈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담고 있다고 극찬한다. “동양으로 향한 그의 여정에서 불교의 잔에서 흠뻑 마신”이란 표현은 바로 머튼을 두고 한 말이다.
왜 자타 공인의 뉴에이지 지지자들이 포스터의 책을 팔고 권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포스터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 신봉자들은 자신이 하는 침묵 기도를 알아본다. 뉴에이지 지지자들은 침묵이 사람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알고 있다. 다음에 나오는 포스터의 권유가 무슨 뜻인지 그들은 안다.
몸, 마음 그리고 영의 모든 번잡함은 마음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일하심이 일어나기에 앞서 중지된 동작이 되어야 한다.
포스터가 진지하고 선의를 지닌 것은 인정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전통에 이끌렸다. 관상 기도 수련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에 호소할 때 포스터가 뽑을 수 있는 구절은 시편 62:1 뿐이다. 이 구절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한 신성한 단어 혹은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생각을 뛰어 넘게 된다는 암시는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어떤 포스터 옹호자는 포스터가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다메섹 길 위에서 경험한 바로 그것, 즉 하나님의 임재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기도문 혹은 호흡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행동이셨다. 바울이 이 경험을 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본문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바울은 여러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결코 어떤 수련 방법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바울은 다양한 영적 선물에 대해 말했지만, 이 선물은 가르칠 수 있는 일련의 기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에게 주신 것이다.
포스터는 성경으로 자신의 신비주의를 변호할 수 없다. 포스터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을 가르치는 것은 유감천만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영적인 삶의 훈련을 우리에게 주셨다.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변혁시킨다.
이 입장에 대해서는 솔로몬의 경고를 들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5~6)
포스터는 기독교 진영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기도: 마음의 진정한 집을 찾아서’는 1993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실시한 투표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서적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놀랍게도 유명한 뉴에이지 신봉자 앨런 거일리가 자신의 책 ‘기도의 기적’에서 추천하는 바로 그 책이기도 하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는 독자들이 “성경 외에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의미심장한 영향을 미친” 세 권의 책 중 하나로 뽑은 것의 하나가 저 유명한 ‘훈련의 즐거움’이라고 보도했다. 그 최신판 뒤표지에는 이 책이 지난 20년 동안 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동양과 기독교의 신비주의(관상 기도)는 모두 먼저 마음을 비운 후 채우려고 한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 마음은 그저 비우기 위해 비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성, 범(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 알라, 아인 조프(유대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무한) 등과 같은 열망으로 채우기 위함이다. 존슨은 이러한 관상 기도에 무엇이 따라오는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관상기도란, 소박하게 말해서, 생각과 감정을 정지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를 말한다.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더 잘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을 바르게 하고, 인도하고, 또한 이끄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다.
브레넌 매닝
매닝은 관상 기도를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관상 기도 방법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놓치고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있다. 그는 패닝턴의 방법(‘기도의 중심’)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깊고 살아 있는 관계로 가는 기도의 길”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관상 기도가 하나님과 더 깊은 삶으로 안내하는가? 필립 얀시는 이런 말로 매닝을 보증하고 있다. “나는 브레넌 메닝을 은혜의 학교에서 나의 영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는 분이라 여긴다.”
누구의 손을 잡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손을 잡음”이라는 그의 책의 장에서 말한다.
관상 기도에 대한 한 콘퍼런스가 진행되는 동안, 토머스 머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어떻게 하면 최고로 도울 수 있는가?” 머튼은 명쾌하게 답했다. “우리는 자신이 이미 하나님과 연합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관상 기도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한 ‘의식의 떠오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머튼은 여기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자신의 순진한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다. 매닝이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손”을 잡으라고 할 때, 기독교인들이 잡고 있는 손은 머튼이 말하는 신의 손이다! 매닝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그리피스는 머튼처럼, “자신의 기도를 더 깊이 있게 해 줄 수 있는 동양 종교에서 길을 찾는다.”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 동양 종교의 점증하는 중요성”을 보고 있다.
미국의 바뀐 영성 추세
리처드 포스터와 브레넌 매닝 이 두 사람은 자신의 베스트셀러와 세미나로 복음주의자에게 영향을 계속 끼쳐 왔다. 그들의 저서들 중 최소한 한 권이라도 미국의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을만큼 개연성이 높다. 이 두 저자의 치솟은 인기는, 지난 20년 동안 일어난 두 가지 주요한 사회적 조류 탓으로 보인다.
미국인의 영성을 사로잡은 첫 번째 추세는, 전에는 진기하고 이상하게 조차 여겨졌던 것을 찾아보려는 의욕이다. 특별히 기독교적 묵상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그렇다. 많은 사람이 첨단의 영성을 맛보려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건조한 지성주의와 창백한 제도 지상주의의 단조로움을 뛰어넘는 영적 경험을 찾고 있다. 이 구도자들은 영적인 전환과 혁신을 약속하는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
두 번째 추세는, 우리의 현대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 응급처치 의식이다. 과거 세대의 사람들은 삶의 좌절을 참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결과를 보증해 주는 확실한 점근 방안을 찾는 경향이 짙다. 우리 시대 자체는 실용주의에 강하게 의존한다. 더 이상 진리는 하나님이 진리라 말씀하신 것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듯해 보이는 것(실용적인 것)에 따라 결정된다.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결정하도록 하는 질문은 “이것이 나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줄 것인가?”이다. 기독교인들인 우리는 좋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21)”.
간격 메우기
포스터와 매닝의 옹호자들과 경배자들이 가장 흔하게 내놓는 반대 의견은, 이 두 사람이 정말로 동양적인 신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초점과 관심은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시바 혹은 붓다가 아니라 예수에게로 좀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수련 방법은 동양적이라 하더라도 가르침은 서구적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정당한 방어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틸덴 에드워즈는 말한다. “이 신비주의의 흐름(관상기도)은 극동의 영성으로 이어지는 서구의 교량이다.”
이 말은 의도와는 관계 없이, 동양과 수행 방법을 공유하는 서구의 신비주의가 동양적인 영성의 개념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여정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서구식 요가를 하고 만트라를 기도하면,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신비경에 빠진다. 이 황홀경을 통해 당신 자신을 서구의 영적 세계를 향해 열면, 결국은 똑같은 귀신의 세계 혹은 동양인들이 말하는 신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를 귀신의 영역에 열면, 온 세상이 하나요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이 신으로 보이는 지점, 곧 내재신론의 세계라는 의식 상태로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돌입한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내재신론을 받아들이면, 복음은 그 의미와 중요성을 잃는다. 순진무구한 “예수 기도”로 시작했지만, 이것은 복음의 거절이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주 잊는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다. 그 영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령으로 움직이고 그분을 예배하는 영들이었다. 이 영들은 어떻게 영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이는지, 하나님의 진리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이 영들은 속이는 임무를 수행한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막13:22),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11:14) 속인다. 왜 하나님이 성령과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주셔서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 사람의 전통(매닝과 포스터가 이미 이렇게 한 것처럼)으로 넘어 들어갈 때, 우리는 위험천만한 곳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시애틀 제일장로교회의 전 담임목사인 로드니 롬니 박사는 뉴에이지 기독교인이다. 그가 관상기도를 하는 중에 자신에게 무엇이 왔는지 매우 솔직하게 드러낸다. “지혜의 근원”과 교통하던 중 그 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네가 이 하나됨을 전파하길 원한다. 자, 세상 앞에 이것을 들고 일어나라. 연합과 함께함의 부름을 들으라.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하나됨의 증언은 지금 존재하는 어떤 장애물도 결국에는 파괴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영은 귀신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하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그 영은 이렇게 선언했다. “침묵이 저기 있다. 나는 저기서 일한다.” 이 말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침묵 가운데 일하지 않으신다. 귀신들이 침묵 속에서 일한다. 뉴에이지 신봉자는 자신을 인도하는 영이 이렇게 밝히 드러내 주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전심전력하여 마음을 쏟는 자들과 더불어 일한다. 우리 영의 움직임을 느끼는 소박하고 진실한 자들과 함께 일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들에게 있는 현재의 신념 체계라는 맥락 안에서 일한다.
여기 “전심전력하여 마음을 쏟는”이라는 말은 단어 반복 혹은 호흡 초점을 통해 생각을 정지하고 내면의 정신적 침묵으로 들어간 자들을 의미한다. 매닝은 ‘예수의 사명’에서 생각을 어떻게 정지시키는지 가르친다.
신앙의 첫 단계는 기도의 순간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정지하는 것이다.
관상적인 영성은 의식 변화의 필요를 강조한다--우리는 현실을 다르게 봐야 한다.
단 하나의 신성한 말을 선택하라--신성한 말을 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자주 반복하라.
하나님의 큰 침묵으로 들어가라. 침묵 안에 홀로 거하라.
내면의 잡음은 모두 가라앉을 것이며, 사랑의 목소리만이 들릴 것이다.
매닝과 포스터의 신비주의 영적 가계도를 그린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맨 꼭대기에 인도, 그 다음에 알렉산드리아. 그 다음에 사막 교부들, 그 다음에 토머스 머튼 그리고 매닝과 포스터, 이제 이들을 통해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고 당신.
원래 이 가계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맨 꼭대기에 삼위일체 하나님, 그 다음에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당신.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기억하라! 이것이 이 논쟁에서 결정적인 요소다. 시편에 풍부하게 나오는 성경적인 묵상과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사고를 멈추게 하기는커녕, 우리의 전 사고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윌리엄 섀넌이 한 다음의 말은 머튼을 인용한 것인데 씻을 수 없는 혐의를 제공한다.
관상의 경험은 별개 존재의 합일도 아니고, 별개 존재의 융합도 아니다. 그 반대다.
분리됐던 존재들이 하나님이신 온 세상과 모든 사물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섀넌은 본질상 한 큰 정체, 즉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라기 보다는 샤머니즘에 훨씬 어울린다. 관상기도 운동을 둘러싸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라고 교계에 도전한다. 관상 기도가 뉴에이지 신비론 그리고 동양의 신비 사상과 가지고 있는 연결 고리를 보라. 한 작가가 정서적으로 감동을 주고, 진실하며, 성경적인 용어를 쓴다는 것이 반드시 건전하고 성경적인 진리를 옹호하고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좋은 예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의 예찬이다. 마리아 숭배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정감이 가고 경건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리아 숭배가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만하거나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포스터와 매닝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관상 기도는 성경적인가, 아니면 영적인 반역이며 한낱 전통인가? 매닝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키팅의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
이런 경험(신적인 합일)을 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기독교 영적 지도자들은 동양의 교사들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래야 좀 더 온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사실 키팅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 기도라는 결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교와 불교에게 가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터는 머튼이 “화목하게 하는 말씀(고후5:19)을 거절하는 불교도와 수피교도들과 영적인 친족 관계를 맺고 있는데도, 머튼에게로 향할 수 있는가? 난처해도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여기에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관상 기도 학교에 가입’하거나, 침묵 중에 들려오는 ‘사랑의 음성'을 듣지 말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