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머리말, 1장 서론적 기초 (2017 수정강의안,김영희사모)

강대식 2017. 1. 11. 12:27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1, 기독교문서선교회,1998

1, 속죄와 칭의(3:20-4:25)

머리말

 

필자가 희망하는 대로 본서는 바울의 서신 중 가장 위대한 로마서의 강해집 중의 첫 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이 강해집들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매주 금요일 밤에 정규적으로 전한 강해 설교들로 엮어진 것이다. 이 강해집의 시리즈는 320절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필자가 로마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단숨에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초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사죄의 위대한 교리의 고찰로 직접 옮아갈 수 있기 위해 처음 두 장 반의 논점을 요약하였다.

 

그것들은 강의도 아니고 각 절과 각 구절들에 대해 대충 훑어 지나가는 주석도 아니다. 설교 형식을 취한 강해이다. 여러 주석들은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큰 가치가 있으나, 건축을 하는 데 있어서 재료로서 가치 밖에는 없다. 더구나 이 로마서 같은 서신들은 바울이 설교했던 것들을 요약한 것이다. 그가 서신을 썼던 것은 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압축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강도자와 교사의 임무는 바울에 의해 요약 형식으로 되어진 것을 펼쳐 보이고 상술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진리란 항상 응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간단한 성경 주석과 성경 연구서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가장 큰 요구는 강해식의 강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강해식 강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시대나 복음운동이 일어났을 때 행해졌던 방식이다. 성경과 그 메시지의 위대함과 영광,

그리고 성경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낼 수 있기 위해 이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방식은 많은 반복을 가져올 것이다. 사도 바울 자신도 자신의 말을 자주 반복했다. 그는 진리의 다양한 국면들로 너무나 감동 받았기 때문에 반복하여 진술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 나는 그것을 압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섭렵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인내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아덴 사람들(17:21)의 정신구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사도적인 방법과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이 설교를 전하는 동안 45분이 걸리는 것이지만, 참석한 사람들의 수가 평균 1,000명 내지 1,200명가량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큰 기쁨과 용기를 준 것은 없다.

 

필자의 소원은 이 책과 다음에 나올 책들이 성도들에게 신앙의 위대한 중심 원리를 명백히 이해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가득 찬 영광으로 충만해지며 감격과 사랑그리고 찬양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출판을 위해 원고정리와 융숭한 대접으로 도움을 준 손길들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가장 큰 도움과 용기는 나의 가장 훌륭한 비평자인 아내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D. M. 로이드 존스

1장 서론적 기초

 

(3:19-20)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지도자들의 생애에 있어서 로마서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책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은 없었다.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이 개종한 것도 로마서 13장 마지막 몇 절을 읽음으로써 되어진 것이다. 마틴 루터가 기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은 1:17의 참된 의미가 깨달아짐으로써 였다. 존 번연, 요한 웨슬리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을 1:16, 17에서 아주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이 점은 물론 성경 전체의 총괄적인 주제이다. 즉 성경 전체 영역에서 발견되어지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에 관해 이 로마서에서 가장 명백하고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의 교리는 사람들의 구원과 하나님에 대한 화해의 길을 하나님이 친히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의 행하심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은혜로 용서하시며 도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점에서만 머물지 않고, 신자들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고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에게 이식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기에 열납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세움을 받은 것이다. 바로 이점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의 진수이다. 이것은 사람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는 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동의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교회의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는다기보다 성경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자랑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능력이다.

 

- 저는 언제나 이 서신을 읽을 때마다 교향악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다. 교향악 서곡에서는 중심 주제들이 암시적으로 던져지고 그런 다음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어나간다.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끝낸 다음에 그 전체를 하나의 웅대한 결론과 절정 속에 응집시킨다.

1:16-3:20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의 교리를 논증하고

3:21이제는이란 말로 다음이 연결되는 영광스런 사실(예수 그리스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 왜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쫒아 나타난다(1:18)고 답변한다.

복음만이 인간의 이중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첫째 문제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다. 둘째 문제는 인간이 실제적으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두 가지 문제를 표현한 순서에 강조점을 살펴 보자.

인간의 첫 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발견하는 것이다. 불경건은 불의보다는 우선한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대 세계의 비극이다. 세계는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치료하고 있으며 질병의 원인은 잊고 있다. 세상은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등 모든 영역에서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둘째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다(12:28-31). 참으로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한 참 문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바울이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이다. 그 점이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 육신의 치료자, 한 조각의 평안을 주는 자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그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견해를 혐오하고 싫어하며 또한 공의와 의의 사상, 그리고 심판 받는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들 메시지 중에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진실로 교회(복음적인 교회까지도)가 이 점을 잊어버려, 사는 길을 벗어나 방황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주님께서도 친히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신 방식은 아빠’, ‘우리 아빠가 아니라 거룩하신 아버지였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에게 주관적으로 어떠한 것을 행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 바울은 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한 자들에게나타났다고 계속 언급하고 있다. 구약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경로에 대하여 1:24-27에서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이 행하고 있는 무서운 죄목을 열거한다. 이것은 고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의 두 세계대전과 오늘날의 생활에 대해 설명한다면, 그것은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버려두는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백성들이 하나님 음성을 듣기 싫어하고 그의 율법을 거역하며 하나님 없이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장담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시어 그의 사신을 보내신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악한 길을 고수하며 반역을 계속하면 그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어간섭치 않으실 때가 오는 것이다. 백년 이상을 인류는 그의 명철과 현학 속에서 불경건에 대한 죄를 짓고 있다.

 

소요리 문답 제 1 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송 받으실 조물주보다 더섬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불의는 자동적으로 뒤따라 온 것이다. 그런 다음 그 결국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교리를 소개하는 바울의 방법인 것이다. 바울은 먼저 이방인들이 받을 궁극적인 저주를 명백히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표상을 만물 가운데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사회적인 개혁을 단행했든지, 얼마나 많이 불의와 악한 것들을 완화시켰든 간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회개케 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전혀 무익한 것이다.

 

- 이제 유대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것이 2장의 주요 주제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있었고 또한 할례의 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대인 바울은 자기의 비극이 그 점을 의존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2:25에서 바울은 그런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2:28-29에서 노골적으로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심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런 식으로 바울은 자기의 할례를 의지하는 모든 유대인의 사례를 뒤엎었다. 국적이나 어떤 인간적인 연관성에 의지하는 모든 것은 할례에 관한 이 역설에 의하여 완전히 배제된다.

 

율법에 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2:13). 유대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에게 문제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율법에 대해 전문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율법에 무지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관점은 첫째,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그들은 조문의 다수와 율법의 주요 부분을 지키는 이상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율법의 99%를 지키고 1%를 지키지 못했다면 전체 율법을 어긴 것이며 또한 율법을 범한 것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2:10). 셋째, 심각한 것은 그들이 의문에는 전문가였고 정확하였는데, 영에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의문과 영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만일 영 안에서 범죄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간음한 것이고 살인한 것이다.

 

- 3장 초두에서 바울은 그럼 유대인에게는 어떠한 이익도 없으며 할례에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바울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유대인의 유익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나타내 주셨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것을 기록된 형식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익이 그들에게 도움이 됐는가? 3:20까지의 나머지 부분은 유대인의 본래적인 부패 때문에 그 유익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3:19-20 안에 있는 요약과 굉장한 결론에 이르게 되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의 핵심적인 서두를 접하게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음이니라”. 바울은 1:16에서 시작한 말을 여기서 마무리 짓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뜻하는 참다운 목적은 모든 입을 막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만일 입을 다물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왜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가?”라고 말하는가! 당신의 입이 닫혀져 함봉되고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아직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보여 보라. 그러면 율법은 그 모든 것을 쓸모없는 지푸라기이며 더러운 넝마분토라고 말한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다.

바울은 좀 더 나아가 반복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3: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지식을 주기 위함이다. 죄의 가공할 성격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것은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 많게 하려 함이다.(7:5)

 

율법의 요점은 너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그렇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켰는가? 없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적인 절망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며 영원토록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렇게 선포하는 복음을 바울은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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