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토마스 보스톤, 「인간 본성의 4중 상태」, 2부 본성의 상태, 의지, 감정, 양심, 기억, 몸의 부패(강의안)
2. 의지의 부패에 대하여(3강)
명령 기능인 의지는 처음에는 하나님께 충성하며 그분의 뜻에 따랐지만 지금은 반역자로 변하여 마귀를 따르며 그를 위한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 “전적으로 거룩한 씨앗”을 심으셨지만 지금 “그 씨앗은 이상한 가지를 지닌 퇴화된 식물로 변해 있다.”
중생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선한 것들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완벽한 무능을 드러낸다. 인간의 의지는 사탄의 굴레에 갇혀 있고 또한 악의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어서, 죽은 자가 스스로 무덤으로부터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엡2:1). 혹시 그들이 영적인 것들을 택하거나 바란다면 그 동기는 육적이고 이기적이다.
사람이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하도록 그 눈앞에 자주 빛이 비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손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 빛에 응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사람은 옳은 것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그른 것만 따른다. 자유의지의 부패는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인 쓴 뿌리이다.
속박의 영의 세력에 의해 붙들린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율법이 그들 앞에 놓이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그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말한다. 중생하지 않은 의지는 선을 싫어한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본성적으로 죄악된 자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경건한 의무에 쏟는 것은 종종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가! 사람들은 종종 의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만 그들의 얼굴은 세상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몸은 규정에 따라 모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자신의 탐욕에 따라”(겔33:31) 저 언덕 아래에 있다. 그들은 선한 일에 금새 싫증을 느낀다.
책망은 살해되고 진리는 감옥에 갇히면 양심은 의지를 방해할 수 없다.
본성적인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빛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지 생각해 보라(욥24:13). 사람이 빛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때때로 빛은 사람 안에 들어온다. 하지만 사람은 빛보다는 어둠을 사랑한다. 어떤 때는 진리의 강력한 힘 때문에 이해의 바깥문이 부서진다. 하지만 의지의 안쪽 문은 단단히 잠겨 있다. 그 후 정욕이 빛을 대항하여 일어나 부패와 양심이 맞부딪힌다. 그리고 전쟁터처럼 싸움이 진행되고 마침내 부패가 힘을 얻게 되면 양심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난다. 책망은 살해되고 진리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다. 따라서 양심은 더 이상 의지를 방해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거나 읽혀지는 동안 또는 하나님의 회초리가 인간에 임하는 동안, 때때로 책망이 사람에게 화살처럼 날아와서 그의 영이 다소 부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런 책망은 사람을 쓰러뜨릴 수 없고 그는 자신의 양심에 화살이 꽂힌 채 달아난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든 그 화살들을 뽑아내어 다시 온전해진다. 이처럼 빛이 비치는 동안 사람은 본성적으로 그 빛을 싫어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눈을 닫는다. 하나님이 분노 가운데 심판하사 그들의 눈을 어둡게 만드실 때까지 그들은 늘 주님의 말씀과 섭리에 대항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로 가든 평안하게 앉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귀보다 더 깊게 뚫고 들어가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말씀이 그들에게 결코 없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4:17).
주의 성령이 택한 자들을 “사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때 그들은 저항한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지 않으면 아무도 그분께 갈 수 없다(요6:44). 그 영혼은 마귀의 팔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동안 깊은 평화와 안전을 느낀다. 하지만 주님은 “용사가 빼앗은 것을 도로 빼앗으며 사로잡힌 자를 건져 내신다.”
인간의 의지 안에는 본성적으로 악으로 기우는 경향, 곧 죄를 향하는 통탄스러운 성향이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기운다”(호11:7). 어린아이들이 맨 처음 가는 길이 악한 길 아닌가? 그들은 그런 성향을 감출 능력이 없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는도다”시58:3). 미련함이 우리의 본성 그 자체에 묶여 있다. 그 매듭은 매를 맞아서 두 동강이 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죄에 미혹되는가!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마귀의 뜻을 따른다”(딤후2:26). 사람의 의지는 거룩과 악에 대해 동등한 균형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즉, 악을 껴안는 것이 쉬운 만큼 거룩을 껴안는 것은 어렵다. 사람이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존재의 손에 의해 멈추어지지 않으면 얼마나 계속적으로 죄의 길에 머물려고 하는지를 고려하라.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사57:17).
인간이 어떤 좋은 감명을 받아도 그 감명은 지속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요동하는 물 같아서 그 감명을 지킬 수 없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돌을 던지면 잠깐 진흙에서 나왔다가도 다시 그리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사람이 잠깐 자신을 씻었을지라도 그들의 돼지 같은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은 어렵다. 이런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중생하지 않은 의지가 선함을 이루어 보유하는 것이다.
과거에 회심하지 않는 상태에서 죄를 섬기는 것이 익숙했듯이 지금 성도들이 주를 그렇게 섬기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옛 사람의 몇몇 행실이 남아 있는데, 이는 옛 사람이 그들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의지 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뜻에 대항하는 본성적인 불일치와 노골적인 대적과 반감이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무한한 순결함과 거룩함에 어떻게 반응을 하는가? 양심은 이에 대해 답변할 것이지만 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주의 거룩하심에 참여한 바 되지 않으면 당신은 주의 거룩하심과 화목할 수 없다. 이교도들은 그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더러움 가운데 있는 자신들과 유사한 신들을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우상들은 본성적인 인간이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원하는지 보여 준다. 당신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중생하지 못한 모든 인간들은 정욕에 깊게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불의한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7).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원수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상속자를 죽이고 그를 포도원에서 내쫓는 농부들과 합세하려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정욕의 달콤함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달콤함보다 수십 배나 더 크다. 그들은 주님께 전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며 단지 자신의 정욕을 평안하게 즐기기 위해 주님의 죽음심과 고난을 남용할 뿐이다. 아아! 당신에게 달콤하게 여겨지는 그리스도는 왜곡된 그리스도일 뿐이다.
중생하지 못한 모든 자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반감을 갖는다. 그리스도가 그의 성령으로 사람들의 내면의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을 때 받으신 대우를 고려하라.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귀먹은 살무사처럼 되기 위해 그들의 귀를 막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한다. 그들은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 “그들은 주의 길의 지식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부탁한다.
그리스도가 주의 말씀으로 사람을 외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오셨을 때 받으신 대우를 고려하라. 그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은 업신여김을 당한다. 주님은 임마누엘 땅으로 가는 인생 지도를 알려 주시기 위해 교육서적으로서 성경을 남기셨다. 성경은 우리가 어두운 세계를 통과하여 영원한 빛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등불이다. 광부가 은과 금을 캐기 위해 광산을 파듯이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라고 권하신다(요5:39). 하지만, 아! 이 거룩한 보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더렵혀지는가! 그들은 마지막 날에 거룩한 말씀으로 심판받아야만 하는데도 그 말씀을 조롱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성경과 주일에 입을 옷을 함께 둔다. 옷을 매일 갈아 입지만 성경을 들여다보는 적은 없다. 오직 주일이 올 때까지 건드리지 않는다. 아아! 당신의 성경 위에 덮인 먼지는 당신이 주님의 말씀을 싫어하는 증거다. 이 외에 성경을 자주 읽는 자들 중에도 그 말씀을 자신의 영혼에게 주신 주의 말씀으로 읽으며 그 안에서 주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자는 거의 없다!
본성적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원수다.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에 의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즉, 그분의 희생 제물과 중보에 의해 죄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화목할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전파될 때는 그 도가 걸림돌이요 어리석은 이야기일 뿐이다(고전1:23),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새로운 살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아니다. 본성적인 인간은 주께 나아갈 때 중보자 없이 가든가 또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러 중보자를 둔다. 그들은 결코 심령이 가난한 적이 없고, 주의 속죄하는 피에 모든 짐을 내려놓기 위해 빈손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적이 없다.
본성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에 원수다. 하나님 아버지는 중보자를 “시온의 왕”(시2:6)으로 지정하셨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며”(시2:12) 그분께 자신을 굴복해야 한다. 부패한 본성의 인간들은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으려고 한다. 주의 나라의 법과 규례에 복종하기를 싫어하고 그것에 의해 제약되는 것을 사람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어쩌다 본성적인 인간이 성도들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욕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속 보좌에 앉아서 군림한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한다(딛3: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위대한 계획을 받아들이고 주님 발 앞에 구원의 문제를 의탁하는 영혼은 성경에 의해 틀림없는 참 성도로 선언된다. 참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내세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6).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본성적인 사람은 성령의 원수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본성적인 인간은 거룩하지 않으며 거룩하지 않은 상태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령을 거스른다.
본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원수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마음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몇몇 또는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정욕과 얽혀 있다. 그는 자신의 성향들을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율법을 자신의 성향에 맞도록 낮추거나 희석시킨다. 율법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 본성적인 양심에 편하게 자리 잡고 있으면서 부패를 성가시게 한다. 율법이 가까이 올수록 본성은 더 거세게 대항한다. 이런 경우 율법은 본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불에 기름을 붓듯이 본성이 더욱 타오르게 만든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났다”(롬7:9).
인간의 의지 안에는 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퍅함이 있다. 그 마음은 돌과 같은 마음이기에 돌처럼 단단하고 굳다(겔36:26). 자비로도 그 마음을 녹일 수 없고 심판으로도 깨뜨릴 수 없다. 그 마음은 휘어지기 전에 부러질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또한 무감각하다.
중생하지 못한 의지는 인간의 최고 주된 목적과 관련해서 전적으로 비뚤어져 있다. 본성적인 인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사람의 존재는 단지 관계적이고 의존적이고 빌린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그의 주된 목적으로 삼고 그분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죄에 빠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자신을 의지하게 되었다. 마치 보좌를 찬탈하려는 반역자처럼 그는 맡겨진 왕관들을 모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전적인 배도와 보편적인 부패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디로 향하든 자아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추구하며 자신들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의 본성적, 사회적, 종교적 활동은 자아로부터 나와서 결국 자아의 사해(死海)에서 합류한다.
본성적인 인간의 종교 활동에 있어서 그들의 최고 목표는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마6:1) 또는 이생의 유익을 위해(요6:26)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한다. 만일 그들이 좀 더 세련된다면 자신의 평강, 또는 기껏해야 지옥 및 진노로부터의 구원, 나아가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최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마19:16-22). 그들의 눈은 닫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찾지만 그분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찾는다. 이는 자신들의 안녕을 위하는 것일 뿐 사실은 전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인생 전체가 실제적인 신성모독, 곧 자신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에 사용된다. 그렇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자기 자신이다.
이제 인간의 의지를 더 이상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이는 인간의 의지는 독한 것이 되었고 또한 쓴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더 이상 자유의지라고 부르지 말고 정욕의 노예라고 부르라. 인간의 의지는 중생하게 하는 은혜가 죄악의 밧줄을 끊어줄 때까지 마음껏 악을 저지르지만 선을 행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3. 감정의 부패에 대하여
인간의 감정은 잘못돼 있어서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괴물이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였다”(요3:19)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자들”(딤후3:4)
인간의 감정은 부패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감정은 전체적으로 무질서하고 또한 병들어 있다. 인간의 감정은 기수를 태우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기수를 태우더라도 제멋대로 거칠게 달리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과 같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모든 가증한 것들의 어미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막7:21-22). 본성적인 인간의 감정은 지독하게 잘못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영적으로 볼 때 괴물이다. 그의 마음은 발이 있어야 하는 땅에 고정되어 있다. 그의 발꿈치는 마음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하늘을 향하여 높게 들려 있다(행9:5). 그의 얼굴은 지옥을 향하고 등은 하늘을 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에게 돌아서라고 부르신다.
사람은 미워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을 미워한다. 그는 애통해야 하는 때에 즐거워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때에 애통한다. 그는 자신의 수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영광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사람은 바라야 하는 것을 싫어하고 싫어해야 하는 것을 바란다(잠3:13-15).
사람들은 가야바가 한때 사도들을 향해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행17:6)이라고 외친 것처럼 참으로 중대한 핵심에 이른다. 죄가 모든 것을 너무나 무질서하게 만들어서 하늘을 아래에 두고 땅을 위에 두었기 때문에, 복음은 이 세상의 천하를 다시 뒤집는 일을 한다. 사람은 적절한 만큼 즐기지 못하거나, 혹시 즐기게 되면 누르고도 차고 넘칠 정도로 즐긴다. 그들에게 영적인 것들은 언제나 거의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을 결코 바르지 않으며 오직 악하기만 하다.
자, 여기에 쉽게 끊어지지 않는 세 겹의 밧줄이 있다. 이 세 겹의 밧줄은 눈이 먼 이해와 비뚤어진 의지, 그리고 병들고 무질서한 감정으로서 하늘과 거룩을 대적한다. 자만에 부푼 생각은 사람이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의지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주를 대항하여 일어서는 부패한 감정은 부패한 의지를 변호하면서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가련한 피조물은 권능의 날이 임하여 그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까지는 하나님과 선을 대항하여 우뚝 선다.
4. 양심의 부패에 대하여
양심은 부패하고 더렵혀졌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 양심은 악한 눈이다. 양심은 사람의 생각을 많은 어둠과 혼란으로 채운다. 본성적인 인간의 양심은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오직 주께서 새로운 빛을 그 영혼에 비추어 양심을 깨울 때만 그 기능을 회복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양심은 잠들어 있고 비활동적이다.
본성적인 양심의 빛은 선과 악, 그리고 죄와 의무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매우 결함이 많다. 그러므로 양심은 흉악한 죄악들을 저지할지라도 죄의 간교한 역사에 대해서는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막지 못한다. 따라서 양심은 끔찍한 죄만 아니라면 술 취함, 욕설, 기도 태만 등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침으로 깊은 평강을 누린다. 심지어 어두운 지각 안에는 거짓된 빛이 있기 때문에 본성적인 양심도 그 빛을 따라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선을 악이라고 부른다(사5:20). 따라서 양심은 종종 눈이 먼 맹렬한 말처럼 자기 멋대로 격렬하게 달린다.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본성적인 양심이 책망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깨어나게 되면, 양심은 참으로 분노하며 포효하는 가운데 그 사람 전체를 끔찍할 정도로 경악하게 만들고 또한 그 곤경에서 그 사람을 돕기 위해 영혼의 모든 능력들을 엄청나게 다 불러 모은다. 이에 굳었던 마음은 떨리고, 무릎은 꿇어지며, 눈은 눈물로 가득해지고, 혀는 죄악을 고백하게 된다. 모든 참된 회심자들의 경우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이 양심을 사로잡아 피를 뿌림으로 죽은 생실로부터 깨끗하게 한다(히9:14,10:11).
5. 기억의 부패에 대하여
선하고 가치 있는 기억은 마치 구멍 난 그릇 안에 담긴 것처럼 미끄러져 사라진다. 채를 물 속에 넣어 물로 가득 채운 후 끄집어내면 모든 물이 빠져 나가듯이 영적인 것들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드시 잊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죄악된 것들은 기억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에 진심으로 그 기억을 잊고 싶어도 풀처럼 붙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을 다 망각하면서도 자신이 당한 손해는 쉽게 잊지 않는다. 또한 기억은 종종 과거의 정욕에 새로운 기름을 공급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은 마치 채와 같이 순수한 곡물은 다 통과시키고 찌꺼기만 취한다.
6. 몸의 부패에 대하여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5). 몸 자체도 부패와 더러움 속에 있다. 성경은 몸을 죄 있는 육신(롬8:3)이라 부른다. 본성적인 기질 또는 이상이 생긴 우리 몸은 죄를 향하는 자연스런 경향이 있다. 사실 몸 자체가 영혼에게 덫이다. 몸은 종종 화가 난 맹렬한 짐승처럼 열을 가라앉히지 않고 절제를 거부하며 영혼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은 영혼을 사로잡아 더 많은 죄와 비참에 빠지게 한다.
몸은 영혼이 수많은 죄를 짓는 것을 돕는다. 몸의 각 지체는 불의의 병기이며 사람들은 이것으로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다. 눈과 귀는 열린 문으로 이를 통해 불순한 생각과 죄악된 욕구가 영혼으로 들어온다. 혀는 “불의의 세계”이며, “죽이는 독이 가득한 쉬지 아니하는 악이다”. 더러운 마음은 혀를 통해 그의 엄청난 더러움을 실컷 쏟아 낸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발은 마귀의 심부름꾼으로 달린다. 배는 술주정뱅이와 소란을 피우는 방탕한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본성적인 인간들의 신이다(빌3:19). 이처럼 몸은 본성적으로 마귀의 첩자요 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기 창고다.
영혼은 몸에 의해 더 악해지고 몸은 영혼에 의해 더 악해진다. 영혼의 모든 기능(지각, 의지, 감정, 양심, 기억)은 각 기능이 더욱 부패하도록 서로 돕는다. 몸 안에는 천박하고 더러운 것들이 있다(빌3:21). 이것들은 성도들에게서도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고 무덤까지 가서 녹아 없어질 때까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천박하고 낮은 이 몸은 부활의 때에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영적인 몸으로 다시 나오게 될 것이다.
Ⅲ. 사람의 본성이 어떻게 이처럼 부패했는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롬5:12). 아담의 죄는 인간의 본성을 부패시켰으며 인류 전체를 죄로 부풀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인 아담 안에서 부패했다. 뿌리가 독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가지들도 독에 물들었다. 아담은 그 죄책과 부패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그 본래의 의를 빼앗겼고 자신을 부패시켰다. 우리는 아담을 대표로 하여 그 안에 있었으며 그는 행위 언약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인 머리로서 우리를 대표하였다. 아담은 인간 본성의 머리로서 우리는 그의 안에 종자로 있었다. 우리는 마치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으면서 십분의 일을 바친 것처럼 아담 안에서 타락했고, 그의 불순종에 의해 죄인이 되었다(히7:9-10).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의 단 한 가지 죄로 인해 그런 끔직한 변화가 생겨날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지 말라. 그 한 가지 죄는 그들의 자기들의 주된 목적인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것으로서 이는 필연적으로 온 세상의 부패를 의미한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배도한 것이고, 모든 율법을 어긴 것이며, 모든 악이 복합된 것이었다. 즉, 그들은 단 한 가지 죄로 한 번에 모든 계명을 어겼다.
그들은 새로운 신들을 택했다. 그들은 감각에 의해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았다. 자아는 그들의 야망에 의해 자기들의 신이 되었다. 그들은 마귀를 믿고 창조주를 믿지 않음으로써 마귀를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은 한 번에 모두 훼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