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8장, 자랑할 데가 어디뇨?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제8장 자랑할 데가 어디뇨?
(롬3:27-31) (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이 위대한 구원의 교리로부터 추론해 보면, 이 구원의 길은 모든 자랑을 배제시킨다는 것이다. 왜 사도는 25-26절, 속죄교리의 진술로 끝맺지 않고 있는가? 바울은 이미 2:17에서 유대인들의 자랑하는 경향을 취급했었다. 그는 다시 그 문제로 돌아오고 있다.
첫째, 이유는 바울은 주제의 위대성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너무나 크고 중대하고 사활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어떠한 오해가 있어서도 안 된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서신을 받는 사람들이 이 진리에 대해 아주 명백한가 하는 점이었다.
둘째, 이유는 우리의 죄스런 상태 때문에 진리가 긍정적으로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도 진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입장을 확고하게 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부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그 사실이 그들이 얼마나 극심하게 부정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가를 뜻하는 것이다. 성경은 적극적인 면 뿐 아니고 그 부정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한다.
셋째, 더 큰 이유는 바울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 유대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구약 전체를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편견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베드로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며 고넬료를 통해 이 진리를 가르쳤다(행10:9-16). 그러나 그 이후에 베드로가 옛 유대적인 선입견이 머리를 든 것을 보고 바울은 면박을 주어야 했다.(갈2:14) 바울은 로마 교인들 가운데 개종한 유대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아주 분명해지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차별의 중간 담이 단번에 무너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저의 소견은 그 위대한 바울 사도가 논증과 논박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은 그가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논증을 싫어하는 사람의 태도는 마치 “우린 이런 논쟁은 필요 없어 우리에게 단순한 긍정적인 복음만을 말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처럼 지껄인다면 자신이 성경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사상은 모두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면 어쨌든 좋은 것이며, 그러니 논쟁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얘기를 나눕시다. 그 점이 교회연합운동의 전체 초석이다. 만일 속죄교리에 관한 명백한 진술에 반대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논쟁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속죄교리에 명백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성경은 주장하고 논박하고 논증한다. 성경은 논증으로 가득찼다. 여러분은 그 점을 분명히 알지 않고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을 수 없다. 우리는 열심히 진리를 옹호해야 한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며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그들은 처음부터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바울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진리에 관하여 명백하지 못할 때, 그들이 거짓에 요동되어 헛되이 살 때, 우리는 진리를 변증해야 한다.
- “그런즉 자랑할 데가 있느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우리는 바울은 왜 그렇게 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자랑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자랑함이 그가 개종하기 전에 그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였다. 그는 율법을 자랑하고 자신을 추겨 세우고 이방인을 멸시했다(빌3:5-6). 그 오만함! 그가 속한 민족, 그의 가문, 그의 교육, 그의 지식, 그의 통찰력, 그의 종교심, 그의 도덕성, 언제나 그는 그것들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 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 핵심적인 문제거리였다. 그것은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중심적인 문제이다. 그 점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논거해야 했다. 여러분은 아직도 무엇인가를 붙들고 뽐내고 있는가? 자기 의의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가? 여러분은 아직도 그것을 영광스런 복음의 메시지의 빛 가운데서 고집할 수 있는가?
이 구원의 길은 우리의 자랑을 빼앗아 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영단번에 쫓겨났다. 그러나 인간의 죄의 본성, 유대적인 선입견, 이것들은 기독교인을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방문 앞에 있다.
- “무슨 법으로냐” 여기서 ‘법’이란 모세의 율법을 뜻하지 않고 ‘원리’(principle)이다. 여기서 대하고 있는 것은 “너희가 무슨 원리로 자랑할 데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이 하는 행위의 원리로냐 아니라 믿음의 원리로니라”
오늘날 대중적인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먼저 행위의 율법을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주셨다. “너희가 그것들을 행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지킬 수 없었던 첫 율법을 한쪽으로 제쳐 놓고 단순히 내 아들을 믿어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신앙의 법’이라고 부른다. 행위의 율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3장 마지막 절로 바울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모세를 통해 준 율법)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대답한다. 구원의 길은 율법을 취소하거나 무효로 하는 것과는 달리 율법을 세운다. 만일 여러분이 옛 법과 새 법의 차이가 전에는 어떤 행위를 하라는 것이었고 지금은 다만 믿기만 하라는 것이었다면, 여러분은 믿음과 신앙을 행위로 바꾸고 있으며 그래서 믿기 때문에 어딘가 자랑할 것이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믿었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았다. 내 믿음이 나를 구원했다. 그래 나의 믿음의 행위가 나를 구원했노라.” 만일 여러분의 생각이 믿음에 대한 자랑을 하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자랑할 수 없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었고 지키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율법이 지켜지고 이루어졌던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율법은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도를 제공하신 것이다. 믿음이란 구원의 ‘매개체’에 불과하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믿음으로’ 혹은 ‘믿음을 통해서’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되는 ‘도구’ 내지 ‘통로’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완벽한 공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완전한 삶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그리스도가 나아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키심으로 말미암는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의 무슨 실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붙잡아 매는 것에 불과하다.
- 약2:24와 이곳 3:28의 말씀은 서로 모순되고 있지 않은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성경의 모든 진술들은 언제나 그 문맥과 그 배경 가운데서 취급되어야 한다. 야고보는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도 ‘믿음’이란 말을 지적 찬동으로 밖에는 의미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약2:14-26). 야고보의 논증들 중의 한 예로 아브라함은 믿음이 허탄한 사람이 행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어떤 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드림으로 자기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거한다. 믿음은 반드시 어떤 것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지적 찬동만은 아니다. 믿음이란 첫째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둘째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셋째 그것에 자기 자신을 위임하고 전폭적으로 그것을 믿고 그것에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 ‘믿는 것’과 ‘위탁’ 사이, ‘믿는 것’과 ‘신뢰’ 사이에 틈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믿음이라 칭하는 이 위대한 것이 율법 아래의 행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고, 야고보는 믿음을 위대한 일이며 단지 지적 찬동 즉 ‘나는 믿는다’ 하는 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것을 언급하고 있으나 다만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는 것 뿐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마저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것이 되는 매개체이며 통로이며 수로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와 함께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별도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로 인정한다” 그러나 “행위 없는 믿음이란 죽은 것이며” 그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