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1권, 15장, 믿음의 본질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3. 2. 17:54

15장 믿음의 본질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경우가 이신칭의의 전체 문제에 대한 완벽한 예증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본질에 대해 이 구절 이상으로 그렇게 극적이고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성경 전체 어느 곳에도 없다. 바울의 궁극적 목적은 칭의에 관련된 진리를 보여 주는 데 있다. 동시에 믿음에 속한 것과 믿음의 모든 측면, 즉 칭의 뿐만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의 믿음이다. 믿음 안에 있는 모든 대 요소들은 여기 짧은 구절에서 발견되어진다.

첫째,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너희들은 조상 아브라함을 보라는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그의 믿음의 결과, 즉 오직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정확히 무엇을 행하게 했는가?

첫 번째로,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에게 맺었던 언약의 놀라운 말씀을 믿게 했다.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 1. 아브라함이 매우 크고 수많은 자손을 갖게 되리라. “바닷가의 모래를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음 같이”, “하늘의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이 두 가지를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아이가 없는 99세의 남자와 90세의 아내에게 육신적 자손에 관한 말씀이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혈통상의 자손뿐만 아니라 또 다른 후손에 관해서도 동시에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 약속을 분명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3: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통한 구원의 모든 계획과 길을 펴 보였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아주 뚜렷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서 구원하실 것이며, 그 아들은 육신을 따라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이다. ‘so’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 그의 보혈, 그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방법도 포함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사건에서 그 점을 거듭 반복하셨다.

3. 이방인들이 이 구원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영적 의미에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자의 조상이다.(16)

두 번째로,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적나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이것을 믿을 때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증명거리를 찾지도 않는다. 믿음은 그러한 증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앙은 하나님 말씀만으로 족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로 하여금 이 엄청난 약속을 오직 하나님 말씀에 입각해서만(모든 현상이 그것과 정반대로 된다 할지라도) 믿게 하였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느니라그때 아브라함은 완전히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어느 면으로 봐도 한 점 희망의 빛도 없었다.

 

네 번째로,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망에 차서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희망적으로 믿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께서 넌지시 말씀하셨던 장래의 일을 바라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오실 소망, 구원의 소망, 인도의 소망, 이방인들이 가입하여 오는 소망 소망은 바로 그것이다. 그 소망은 구약을 명백히 뚫고 흐르는 위대한 소망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것은 믿음의 참된 요소이며, 신앙이 그 자체를 확증하는 곳 어디에서나 있는 요소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21) 우리는 믿음, 참 믿음이란 언제나 그 안에 이 확신의 요소를 가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하여야 한다. 신앙은 단순한 소망스러움이 아니고 완전히 확신하여 완전히 설복 당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서움을 없애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이다. 믿음이란 확실한 보증이 있는 권리증서(부동산)이다. 우리는 믿음을 희미하고 불확실하며 불투명하고 애매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믿음을 소위 신앙주의(believism)’와 구별하여야 한다. ‘산데마니안주의라는 이단은 18세기 교회를 괴롭혔다. 그것은 예수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떠들어대는 교훈이다. 그 교훈은 감정과 확신을 배제한다. 신앙은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지각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슴 속에서 전인적으로 일어난다. 완전히 확신한것이다. 이것은 매우 참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은 것을 행했고 믿는 대로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다섯 번째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입각하여 행동했다. 17:5에서 하나님은 아브람(높은 아버지)’이라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을 아브라함으로 불렀고 그에 따라 행동을 행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새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알도록 행동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11:13) 아브라함은 외국인과 나그네가 되어 하나님이 건축자 되시어 기초가 놓인 하나의 도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눈을 떼지 않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는 그 위대한 약속을 붙들었다. 그는 그가 믿는 바에 입각해 행동하였고 그가 완전히 확신한이 약속에 의지하여 행동하였던 것이다.

 

- 어떻게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런 다섯 가지의 일들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게 했는가? 어떻게 믿음이 이런 일을 하는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 바울은 믿음이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란 우리들을 강하게 하고 열심 있고 능력 있게 만들어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19) 그가 그것을 계속 생각지 않아서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보고도(생각하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엄연한 사실들 앞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가장 나쁜 상황을 본 것이다. 그는 보았지만 전혀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사실들과 장애와 환경만을 바라보았지만 그밖에 다른 무엇- 다른 분을 보았다.

 

불신앙의 문제는 어려움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신앙은 문제들을 두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극복한다. 신앙은 그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것들 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믿음은 의심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의 의심을 극복하고 그 의심에 대답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불신앙이 두 길을 따라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을 경험상으로 발견한다. 먼저 어려움을 그리고 연약한 네 자신을 보라그것을 극복했을 때, 두 번째 길로 와서 네게 하신 약속들을 보라 그 일은 불가능하다.’ 그 약속의 위대성은 우리들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되곤 한다. ‘의심한다는 말의 의미는 스스로 마음에 분열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믿습니다. 내 불신앙을 도와 주소서그것이 망설이는 것이다. 정함이 없이 두 마음으로 이리저리 밀리며 요동하며 주저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너무나 위대하여 그는 주저하지(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약속의 위대성을 보고 추춤거리지 않고 확고하게 걷기를 계속한다.

 

믿음 이 놀라운 일 은 아브라함과 참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로 하여금 확실한 일들을 향하게 한다. 믿음은 우리를 강하게 함으로 그렇게 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약함을 막아 주고 우리의 망설임을 제지해 준다. 마귀는 의심이 오도록 조작할 것이다. 마귀가 우리에게 던지는 불화살이다(6:16).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들은 모두 소멸될 것이다. 죄와 시험을 혼동하지 말라. 문제는 여러분이 의심을 따라가느냐 하는 것이다. 의심은 아브라함에게도 왔듯이 여러분에게도 올 것이다. 아브라함은 약해지지 않았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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