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2장, 하나님과의 화평의 양면성 (2017수정 김영희강의안)
제2장 하나님과의 화평의 양면성
(롬5:1-2)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이신칭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화평’은 하나님 편과 사람 편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화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 인격이 관계되기 때문이다. 두 인격간의 관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의 화평은 사람과 하나님간의 평화이다. 화평을 얻으려면 하나님 측과 우리 측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었던 우리 자신의 신분을 재음미해야 한다. 율법 아래 있던 우리 자신의 신분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우리는 결코 이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은 늘 그것을 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역사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는 그들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있으려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에게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단번에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러면서도 영원토록 변함없이 공의롭고 의로울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그분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 그가 짊어진 그 죄에 대해 진노를 부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보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 자신께 우리를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도 무슨 일인가 있어야 함은 역시 필연적인 것이다. 죄에 눈 멀고 마귀에 의해 제 정신을 잃은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것이 잘 되어 있으려니 생각하고 또한 종종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다고 믿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신을 구상하여, 거기에 우리 자신의 사상을 투영하고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상에서 우러나온 거짓 화평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참 모습은 하나님과 원수이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떠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 대한 ‘고뇌깊은’ 공포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6).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그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 두렵고 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어떤 화평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의 결과로서만 모든 원수됨의 원인이 처리되고, 하나님이 사람과 화평한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편의 이러한 화해가 있어야 ‘하나님과 더불은 화평’이 존재케 된다. 죄와 타락으로 깨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다시 정립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본문의 의미다.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거나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이미 얻었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 이제 우리의 신앙고백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하는 우리 본래 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적의가 사라졌는가?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가?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것이 칭의의 필연적인 귀추라고 못 박아 놓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 필연적으로 분명해야 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8:1)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어떠한가?
첫째,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안돈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 번연은 18개월 동안 영혼의 고뇌에 빠져 있었다고 술회한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 먼저 그렇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평은 맨 먼저 사람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이 하나님의 길이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음을 안다. 마음이 복된 칭의교리를 파악하고 붙잡아 안식하지 못하는 한, 그 자체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평화는 없다. 칭의만이 화평의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심령의 진리로서 와 닿으며, 마음이 밝아지고 심령이 만족해진다.
둘째, 자기가 죄인임에도, 자기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아는 사람이다.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로 고심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세우시고 죽음과 부활케 하셨다는 사실을 봄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굳게 잡은 것이다.
셋째,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송사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네 자신을 살펴보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가능할 법한 일이겠는가?” 만일 양심의 송사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이신칭의에 대해 명백하지 못함이 분명하다.
넷째, 마귀의 송사에 대해서도 같은 확고함으로 대답해 나갈 수 있다. 마귀가 결코 대변하지 못할 오직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피’이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계12;11) ‘증거는 어린양의 피에 대한 증거’이다.
다섯째, 더 이상 죽음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필연적인 논리이다. 인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것은 마귀에 의해 조종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리스도는 마귀를 이겼고 그래서 죽음에 대한 공포의 굴레로부터 그를 건져내셨다.
여섯째, 죄에 빠졌을 때라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시험이나 죄에 빠졌을 때 자신들의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칭의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이미 4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가 죄에 빠졌으니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적용)
1) 믿음은 여전히 때때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언제나 이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싸워 승리한다. 믿음 안에서는 언제나 확신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나침반의 바늘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언제든 믿음은 싸울 수 있고 믿음은 기어코 이겨낸다. 어느 의미에서 우리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이상 그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다.
2) 믿음에는 언제나 확신의 요소가 있지만 늘 ‘완전한’ 확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확신과 온전한 확신에는 차이가 있다. 전제하는 바는 믿음에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온전한 확신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3) 거짓 평화를 주의하라.
특징; ① 거짓 화평은 믿음을 단순히 신념이나 명제와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조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산데마니안주의 이단- 롬10:9을 근거로 함).
②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에 의지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한다. 믿음을 일종의 자기들이 신뢰할 공로로 본다.
③ 결코 의심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참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먼저 무언가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것이다. 그러나 거짓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고민한 적도 의심이나 고통도 없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강건해’ 보인다. 지나치게 위장된 말을 하며 명랑한 사람들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침통하고’, ‘냉정하며’,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④ 용서 사죄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의에는 관심이 없다. 거룩하여지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⑤ 죄에 빠질 때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빨리, 너무나 쉽게 가볍게 자신을 치료한다. 그것은 죄를 너무나 가볍게 취급한데서 기인한다.
참 화평의 특징은 무엇인가?
① 결코 재잘거리지 않고 마음을 가볍게 먹지 않는다. 참 그리스도인은 지옥을 생각하며 오직 그 사실을 늘 생각하며 피상적이거나 가볍게 마음을 먹지 않는다.
② 언제나 경이로움과 감탄으로 충만하다. 자기가 진정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목하시고 그의 은혜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감격해 한다.
③ 겸손하다. 곧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낮아지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을 깨닫고 하나님과 우리 주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솟아나는 사람이다. 생활과 기도에 넘치는 찬양과 감사가 있다.
④ 언제나 자기 생활에 조심한다.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조심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늘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쓴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3:9) 믿음이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값지고 고아한 그릇에 담을 만한 것이다. 참 화평을 가진 사람은 늘 선한 일을 경주하려고 애쓰게 된다. 여러분은 이것을 가졌는가? 여러분이 이 참 화평을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요일1: 과 2:1-2의 말씀에 따라 모든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