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도 아카데미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9장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2017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7. 5. 24. 14:02

9장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6-11)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두 방면 즉 되어진 일과 그 되어진 일의 혜택을 받는 장본인들의 경우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보기 위해 우리 자신의 상태를 숙고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첫째, 연약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관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 “경건치 않은 둘째, 우리는 경건치 않은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경건치 않은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상은 지성과 이해, 이성과 능력,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 등으로 이루어진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무서울 정도로 손상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신 바 사람의 진실한 신성성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영광이었다. 죄의 결과 그것은 흐트러지고 사람은 경건치 않게 된 것이다.

 

경건치 않은의 두 번째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원수라는 것이다. 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과 반대이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율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사람들이 그러한 불경건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입증해주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모두 그릇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신이며 그들 자신이 생각해 낸 고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은, 그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을 믿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방식에 복종하고 있는지 또한 그가 그 자신을 버린 바 되고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오직 자기를 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공로에만 전적으로 의지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알고 있는지? 그것이 바로 그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그리스도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지 바리새인을 위해서는 죽지 않으셨다.

나는 내가 저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또한 이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18:11)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찬양하고 있었다. 자신을 아주 경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아무런 필요성을 알지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10:2). 본성적으로 우리는 모두 불경건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연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건치 않을 때의 우리를 위해서도 죽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그러하다.

 

-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의인선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인은 정직한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행동에 있어서 아주 바른 사람이다. 선인은 의인일 뿐 아니라 사랑에 의하여 통제받는 사람이다. 그는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옳고 바르기만 한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인을 위해서는 그에게 끌린 나머지 난 그를 위해서 죽을거야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죄인들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고 반역했고 공격했고 그의 율법을 조롱했다. 우리는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따위의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던 것이다.” 선인이나 사랑할 만한 사람들이 아닌 비열하고 미움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1: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않은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3:3)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그와 같았고 하나님의 공의 아래서 진노를 받을 만했고 심판과 그의 보시는 앞에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하게 인식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사람들이었다. 누가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죄지은 여자와 바리새인 시몬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은 두 빚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으니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것이 하나의 척도이다. 그녀는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주님에 대한 자기의 진 빚을 깨달았다. 주님에게 아무리 좋은 것을 드린다 할지라도 지나치지 않았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발을 씻어 사랑과 감사함을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기의 죄스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궁핍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전혀 무가치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논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 인간 속에는 하나님께 내보일 만한 아무것도 없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비열하고 구역질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대가없이 얻은 것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전적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사도가 주장하는 바이다. 사도는 엡2:4-10에서 감동 깊게 표현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것이 모두 은혜에 속한 것은 누구도 자랑하지 않게 함이다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우리와는 어떤 식으로도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는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원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포착할 때에 그것을 기뻐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제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가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풍부한 확신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있는 것이다. 나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 그것에만 달려 있고 내 안에 있는 아무것에도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며 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 내 구원의 값없는 특징, 내가 연약하고 불경건했고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 또한 내 그러한 모습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사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궁극적인 터가 된다. 나는 이 근거 위에서 내가 지금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아울러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과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사도의 위대한 논리적이고 변증적인 명확성을 분명히 인식했는가?

 

사무엘 데이비즈는 용서하기에 너무 큰 범죄들, 무례한 벌레라고 자기를 표현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었지만 우리와 우리 죄를 위해서그리스도는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연약하였을 때 뿐 아니라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비열하고 저주받은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오직 할 말은 이것 뿐, 주와 같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누구리오? 그처럼 넘치고 값없는 은혜를 가진 자 누구리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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