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엘 비키, `칼빈주의`, 1부, 8장,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 (강의안)
8장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
칼빈주의의 5대 교리 가운데 네 번째 교리는, 성령께서 그 대상자들을 믿음으로 이끄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않은신다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이다. 우리의 전적 타락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가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선택은 불가항력적 은혜의 정박지이다. 만일 구원적 은혜가 항거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해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되기 때문에, 제한 속죄는 불가항력적 은혜에 상응하는 진리이다.
1. 불가항력적 은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히브리어와 그 파생어들은 ‘친절함, 은총, 인자하심’을 뜻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선한 뜻, 인자, 은총’을 의미한다. 이 단어가 구속 사역에서 죄인들에게 적용될 때에는 당연히 받아야 할 진노에 대한 과분한 은총을 의미한다. 은혜란 불행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값을 치르고 수여된 복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실행에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은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더 강하고 우리의 모든 역경과 인간적인 불가능을 이기는 강력이다. 은혜는 성경의 핵심이지 우리의 구원의 핵심이다.
은혜는 불행과 지옥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들(전적 타락)을 구원하는 것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사역임을 가르쳐 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께서 이 은혜의 사역에 참여하고 공헌하신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 은혜의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백성들을 성령께서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에 결코 실패하심이 없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그 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구원적 은혜의 대상자들은 틀림없이 구원받고 말 것이다.
도르트 신조 제3,4교리 제11항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택자들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실 때, 또는 그들 안에서 참 회심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외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분별하게 하신다. 또한 거듭나게 하시는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사 닫힌 것을 여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할례받지 못한 것을 할례받게 하시고, 지금까지 죽어 있던 의지를 살려서 새로운 활력을 갖게 하여 악함과 불순종함과 완고함으로부터 돌아서서 선하고 순종하고 온순하고 활기차고 강하게 하여, 마치 좋은 나무처럼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0장1절 역시 불가항력적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 단지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을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된다.”
불행하게도 불가항력적이라는 용어는 의지를 향한 죄인의 변덕스러운 힘이나 폭력을 암시할 수도 있다.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가 매우 강력하고도 강제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상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영접했던 사람들보다 더 기쁘고도 즐거우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다. 루디아(행16:14ㅏ15)와 빌립보 감옥의 간수(행16:30-34)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기꺼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기 위해 그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요 6:44은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이끄시기’ 전에는 그들이 결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때 ‘이끌다’라는 말의 원어는 설복하는 특정한 힘을 뜻한다 이 단어는 요 21:6-11에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끈다는 개념은 어떤 우월한 힘이나 권세가 물건이나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끌고 가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열망하게 될 때까지 우리의 반대를 깨뜨리신다. 복음에 반항할지라도 우리의 의지가 변화된 이후에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능하게 하시며 참된 자유를 행사하도록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요청과 명령에 기쁘게 순종하도록 자유롭게 하신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즐거워하며 영접’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불가항력적으로 택한 백성들을 사랑과 전능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위대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지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유효적 부르심(소명)“이라고 부른다.
2. 효과적인 부르심
불가항력적 은혜는 유효적 부르심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존종 은혜가 거절될 수도 있지만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적 믿음으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은 결코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르심을 두 가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듣는 외적인, 또는 일반적인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은 거절될 수 있다(요7:41,42, 10:20,히12:25).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택자들에게 미치는 내적인 부르심이다. 이것은 항상 회심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마22:8,행2:39,롬9:11,딤전6:12).
죄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 메시지에 담겨 있는 외적인 부르심 이외에 특별하고도 내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을 베풀어 주셔야만 한다. “만일 인간이 본질상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거절한다면, 그 은혜가 효과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반드시 불가항력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효과적이지 못하다면,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아더 커스탄스). 이 내적인 부르심에 대해 존 머리는 ‘죄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시고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안내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선택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이 부르심을 행하시는 위대한 초청자이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여기에 성령께서 관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요16:13,144). 성령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귀에서 영혼으로 옮겨 그 마음을 열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말씀을 이해하게 하시고, 이 영적 진리를 믿고 그 말씀에 복종하게 하신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며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게 하기 위해서 죄인을 불가항력적으로 부르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언제나 유효하다. 그 안에 있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령의 이 변화시키시는 사역을 ‘거듭남(요3:5),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요5:24), 아버지께로 이끄심(요6:44), 우리 안에 들이심(요10:16), 망믕르 열어 주심(행16:14), 하나님의 뜻에 따른 부르심(롬8:28), 눈을 밝혀 주심(엡1:18), 영적 부활(엡1:19,20), 죽음에서 다시 살리심(골2:13), 중생(딛3:5), 하늘의 부르심(히3:1), 어둠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부르심(벧전2:9)’ 등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이 내적인 부르심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능력이 표현되는 은혜가 그리스도인을 구원한다(롬8:28-30). 그의 구속 사역은 그 결정과 공급만큼이나 그 적용도 주권적이다. 오직 은혜만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선한 충고, 도덕적 삶, 율법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죽은 사람에게는 강연이 아니라 생명이 필요하다. 실제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외적인 부르심은 언제나 내적인 또는 유효적인 하나님의 부르심과 결합될 때에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이 되는 것이다. 내적인 부르심이 진리와 동반되는 능력과 함께 임할 때, 죄인에게는 복음에 반응할 힘과 능력이 주어진다(히3:1). 이 반응은 택자들에게만 일어난다(롬9:110.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성자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돌아가신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구원받을 것이다(딛3:5). 구원적 은혜는 거절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호의이며, 하나님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그들이 본질상 성령의 은혜 사역을 대적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죄인들에 의해 중단될 수 없다.
3. 단독적인 은혜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은 단독적이고도 일방적인 사역이다. 신-인 협동 사역이 아니다. “단독적인 사역은 그것 자체로 수행되는, 또는 오직 주요 동인으로 혼자 역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스프롤).
펠라기우스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부르심에 반응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기에 잘못되었다. 또한 루터주의자들은 우리가 복음을 거절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공급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초청에 순종할 수 있는 회복된 능력을 소유한다고 가르치기에 잘못되었다.
구원은 단독적인 은혜이다. 이것은 우리가 전부 성취할 수 있는 사역도 아니며, 일부분만이라도 성취할 수 있는 사역도 아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가 동역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협동할 수 없다. 택자들은 그들이 믿기 때문에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요일5:1).
둘째,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은 단독적 은혜가 엄청난 희생의 값을 치르고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이 복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죄값이 지불된다는 점에 있다. 믿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하실 때도 그분의 의와 공의와 진리는 여전히 유지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요1:17)’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풓실 때도 죄를 그냥 무시하시지 않는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의에 근거한다. 그것은 참된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을 희생함으로써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마리아의 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심으로써, 그리고 그분이 율법의 공의로운 정죄에 따라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 언덕에서의 고난에 순종하심으로써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실 때, 그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사역 때문에 신실하고 공의로우신 것이다.
4. 방편과 열매들
유효적 부르심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적용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적 복음을 통해 발생한다.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4).
존 칼빈은 모든 설교에는 두 명의 사역자가 있다고 즐겨 말했다. 한 사람은 외적인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임직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다. 다른 한 분은 내적인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으로 전달하여 그것을 깨닫게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는 성령님이다.
존 플라벨은 그리스도의 외적, 내적 음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외적인 음성(임직받은 사역자)이 마음을 향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내적이고도 영적인 음성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언제나 효과적이지 못하며 성공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신 부르심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브루스 디마레스트는 그 열매로, 새로운 정체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형상(롬1:6,7),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엡2:12,13),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갈5:13,14), ‘그리스도의 평강’(골3:15), 선포와 찬미의 삶(벧전2:9), 고난 가운데서의 인내(요15:20,벧전2:21), 거룩한 삶(딤후1:9), 하늘의 상급과 나라와 영광(빌3:13,14) 등을 든다.
하나님의 구원적 은혜가 항상 불가항력적이며 유효하다는 사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친구들을 전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사명이며 우리는 종종 쉽사리 실패하곤 한다. 클레어 데이비스는 말한다. “그 어떤 설명도 죄의 먹구름이 드리운 마음을 파고들기에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일이 쉽지 않다. 그 어떤 확신도 흐리멍텅한 눈을 열어 예수님을 보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 어떤 사랑도 반항적인 마음을 깨뜨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부르고 거듭나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우리 친구들을 믿음으로 전도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자신의 백성이 많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많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서 사역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향18:9,10). 조지 휫필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윌리엄 캐리, 찰스 스펄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공허하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계속해서 설교하였다.
또한 불가항력적 은혜는, 예수님이 실망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제지물과도 같다(마11:25). 복음의 씨앗을 심고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자라게 하시는 분임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겸손한 일인가(고전3:7).
5.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듭남
「도르트 신조」는 거듭남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과 동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한다. “성경에서 크게 찬양하는 거듭남, 즉 새 창조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 살아나도록 일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사역이요, 가장 강력하면서도 가장 기쁘고 놀라우며 신비롭고 형용할 수 없는 사역이다. 창조나 죽은 자의 부활의 효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확실하게, 실패 없이, 유효적으로 거듭나게 되고 실제로 믿음에 이른다.”
유효적 부르심과 거듭남은 우리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사역이다. 이안 머리, ‘우리에게는 갈보리 십자가 사역에 협력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거읍남에 협력할 능력도 전혀 없다.’ 유효적 부르심과 마찬가지로 거듭남은 초자연적이며 인격적이고 강력하면서도 우리를 이끌어 내며 유쾌하고도 즐거운 사역이다. 또한 그것은 놀랍고도 신비한 사역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성한 역사이다. 그것은 영혼을 향한 성령님의 최초의 숨결로 말미암는 생명이며, 믿음과 회개와 칭의와 양자와 성화와 견인과 같은 모든 구원의 서정의 ‘기초이자 원천’과도 같다.
구원은 자원적이며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원한다.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며,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당하여 영원한 멸망의 위험에 처해 있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거룩하고도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비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