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6/11 주일설교, 이스라엘에 요구하시는 것, 신 10:12-16
2017-06-11 주일설교
본문: 신 10:12-16
제목: 이스라엘에 요구하시는 것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 물음으로 모세는 설교를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포함한다.
표면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면적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스라엘이다.
표면적 교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이면적 교인이 그리스도인이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를 한 것이 진정한 할례인 것과 같다.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인들은 만민 중에서 택하신 주의 백성들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오직 믿음의 조상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후손인 우리를 오늘 만민 중에서 택하셨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입술로는, 외양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 같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먼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목이 곧은 사람들이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사람은 외양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사울왕이 욕심이 나서 좋은 것들을 다 남겨 놓고서,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하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릴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하지만 통하지 않는 것을 본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셨다.
순종한 다음에 제사요, 명령을 듣고 행한 다음에 숫양의 기름으로 제사이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면서도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면, 바리새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이 가면서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니까 낙심하지 아니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이룸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이 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4:16-18)
우리 인생은 짧지만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에, 영원한 것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
오늘 뭐가 됐다고, 뭘 좀 쥐었다고 좋아하다가, 얼마 못가서 쇠고랑차면 그것은 비극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진리가 보장하는 확실한 것에 목표를 두고 착실한 걸음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의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높은 쌓은 바벨탑이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하나님의 법도에 맞는 것만이 늦지만 그 열매와 번영이 오래간다.
법도에 맞게 살려면 성품 훈련이 필요하기에 하나님은 광야의 고난과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마음속 묵은 땅은 갈아 엎고, 가시덤불은 제거하고, 옥토를 만들어 씨를 뿌려야, 열매를 맺는다.
이스라엘은 살가죽을 베면 할례인 줄 알았지만 마음 가죽을 베지 않으면 할례가 아니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라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신19:12)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의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경외의 영어 번역은 fear,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이다. 우리 번역이 훨씬 낫다.
현대 교인들은 잘못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 두려운 줄을 모른다.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사랑만 하고 복만 주시고, 무조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믿고 말만 하면 이루어진다는 ‘믿음 신학’, 구체적으로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형통신학’,
‘4차원의 영성신학’이란 것들이, 말하는 거짓 하나님만 배우고 좋아해서 그렇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샤마니즘과 무속신앙이 베어 있는데다, 불교 믿다가 유교 믿다가,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용을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오늘의 운세, 토정비결 류들이 귀신의 가르침인 것을 모르고 무심코 죄의식 없이 접한다.
그리스도인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그보다 더 큰 능력으로 재창조하신 사람이다.
물과 성령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그 능력으로 살아나게 해서 새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피조물이 자기를 창조하신 창조주를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첫째 원리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렘19:11)
우리는 진흙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옹기에 지나지 않는다.
창조주이신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만드셨는데, 그 손에 있는 피조물이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니거나, 사탄의 속임과 어리석음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우러러 사모하며, 그분의 권위 앞에 떠는 것이다.
그분의 권능에 놀라움으로 압도 당하며, 그분의 분노와 진노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6:15-16)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게 된다.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신8: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신28:9)
그의 모든 도를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걷도록 정해 주신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는 길이요, 진리요, 원리이다.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언행이 그분의 거룩하신 뜻에 일치하게 행해져야 함을 말한다.
사람의 길과 여호와 하나님의 길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사람은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인생 길을 가서 가나안 땅을 암흑시대로 만든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으로 기업으로 주셨다.
300년에 걸쳐 그 땅을 암흑시대로 만든 이유를 성경은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신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길을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에 나의 생각과 길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을 때 경외하는 줄을 아신다고 하셨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경외함을 인정 받는 수준이 이러하다)
2. 여호와를 섬기라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10:12)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두 번째 사항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권능을 경외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수 없다.
경외함이 없는 사랑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식의 하나님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도 상대방이 자기 식으로 사랑하면 싫어한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식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맞게 해야 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다 거절하면서 자기 식으로 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고 하셨다.
마음과 뜻은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따로 뜻 따로 겸해서 겹쳐서 중복해서 이것도 저것도 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면서, 저것도 사랑한다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것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할 때 그것이 우상 숭배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여호수아는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어느 신을 택한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24:15,19-2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요, 영광을 나누어 갖지 않으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섬기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피조물들인 신들과 겸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3.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10:13)
세 번째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긴다면,
그분이 가르쳐주신 방법을 따라야 한다.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그 방법이다.
명령은 행하라고 계명으로 명령하신 것이고,
규례는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정한 규칙이나 의식이나 형식을 말한다.
구약에서는 제사법 같은 것이고, 신약에서 대표적인 것은 세례와 성찬이다.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오늘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은 천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행복과 형통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이 단순한 사실을 왜곡하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루고자 한다.
그 또한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의 총체일 뿐이다.
그들이 동원하는 심리학적인 방법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일 뿐이다.
철학과 속임수로 인간의 계명을 따라 교훈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길 뿐이다.
그런가 하면 귀신의 가르침이 신비주의의 탈을 쓰고 도입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의, 말씀이 없으면, 세상과 인간과 사탄의 온갖 지혜가 마음을 차지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이요 안목의 정욕이요 이생의 자랑일 뿐이다.
행복과 형통의 길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성경은 오직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지킬 때 행복과 형통이 온다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도 없고 하나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행복과 형통도 함께 멀어진다는 것을 알라.
탐욕을 품고 열심을 낸다고, 목표와 야망을 향해 달음박질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그분의 법도인 명령과 규례로 다스리신다.
그것이 공의와 정의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공의 없는 사랑이 아니시다. 그분의 거룩함과 일치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십자가로 가야 한다.
거기서 사랑만 따먹고 공의를 도외시하는 것은 사탄의 지혜요 멸망의 자식들이 하는 짓이다.
여러분의 인생에 참으로 행복과 형통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오늘 요구하시는 것을 행하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그의 모든 도를 행함으로 경외하라.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
하나님이 명하시는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려면, 성경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성경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복 받는 비결이고 행복하고 형통하는 길이라고, 시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말씀한다.
다른 지름길도 없고 편한 방법도 없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오직 성경!” 하며 살았던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본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