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13장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 (2017 김영희강의안)
13장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5:12-21)
11절로 5장의 첫 주제를 마무리 짓고, “이러므로”라는 말로 12절에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여 21절 마지막까지 계속한다. ‘이러므로’란 말을 사용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접속사가 중요하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책의 저자에게 모독적인 처사이다. 그 열쇠는 10절 끝에 있는 한 작은 낱말에서 발견된다. 흠정역은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by his life)로 되어 있으나 ‘by,가 아니라 in’ 으로 되어야 한다. 개정역 이후의 번역에서는 ‘in’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그의 생명 안에서’(in his life)로 번역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살으심으로 인해’ 구원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외부적이고 법정적이고 객관적인 것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그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화목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신다는 선언에로 인도할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우리는 끝내 그의 생명 ‘속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만일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우리 죄에 대한 심판에서 구출해 내셨다면, 하나님의 생명에서 우리를 분리시켰던 모든 것에서 구원받는 것은 우리가 그와 그의 생명에 연결됨으로 말미암는다.
“만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10) 사도는 10절의 논증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에 대한 궁극적인 증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 관계를 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12-21절도 이를 위해서 첨가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 그러나 그 점은 단번에 그 전 위치와 그전 위치를 가져오게 한 원인을 생각하게 한다. 지금 사도는 그것을 다루어나가기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이러므로’란 말을 도입한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아담과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므로’란 말로 표현된 관계성은 아주 분명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을 하였기때문에 이제는 우리 구원이 용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체 지위와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나 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다. 바울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과 최종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10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 문제에 관심이 있다. 구원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 달려 있다. 그래서 이것을 아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고 어떻게 신자와 모든 인류가 전에는 아담 안에 있고 지금은 이신칭의의 결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한꺼번에 구원의 필요성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방법의 영광과 완벽성을 나타내 준다. 실로 12-21절은 9-10절의 ‘더욱’의 속편이며 특별히 10절 끝에 있는 ‘그의 생명(살으심) 안에서’라는 표현의 해석이다. 동시에 그 대목은 1:18~3:20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해 말한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해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새 대목은 우리 모두가 어째서 구속받을 필요가 있는지, 어떻게 해서 이신칭의만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의 방편인가를 말해줄 뿐 아니라 어떻게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저는 12-21절의 대목이 로마서의 심장부라고 담대하고 주장하고 역설한다.
첫째, 이 대목은 앞에 진술된 모든 것의 요약이다. 사도는 여기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8장 끝까지 계속되는 진술의 시작이요 서론이다. 이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허튼 소리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1:16-18에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인류 위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아담이 한 일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타락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구속이 있다. 바로 이 문제가 이 대목의 주제이기 때문에 ‘이러므로’란 말로 그 주제를 도입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값없는 구원을 선물로 받아들이기가 언제나 어렵다. 전 인류의 내력은 우리와 아담의 관계 차원과 우리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된다고 하는 면에서만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류를 하나의 머리와 대표를 통해서 다루셨다.
세계 상태를 보라. 그 모든 것은 아담으로부터 나온 열매이며 아담이 행한 일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그리스도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 때문이며 그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연유하는 것이다.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전체 내력은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달려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파헤치는 것이다. 아담과 우리의 옛 관계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표상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14절,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아담을 이해하면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담과 인류와의 관계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속받은 자와의 관계에 대한 그림자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고전15:45)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사람’이다(47절).
아담은 첫째 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다. 인류에게 두 머리만 있을 뿐이다. 우리들 각자는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이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라고 한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시대와 새 왕국과 새 질서를 함께 들여오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의 권속과 자녀의 일원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의와 기쁨과 평화 속에 결코 파괴되지도 않고, 아무도 우리를 그로부터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새로운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 있지 아니하며 새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결정지어진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처한 상태와 지위의 영광들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일들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면 이 진리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단지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 속해 있으며 새 인종의 일원이며,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자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라!” 이 대목은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의미에서 로마서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임을 역설한다. 이 대목은 전체 논증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이 중차대한 대목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1) 원죄의 교리이다. 성경 가운데서 원죄교리에 대한 전형적인 구절이 여기에 있다. 이 대목은 원죄 교리의 충추와 중심이요 표준구이다. 2) 창세기 1~3장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창세기의 설화를 문자 그대로 사실과 역사로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나온 것이다. 3)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과 계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신다고 가르치는 ‘언약신학’의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바울의 모든 서신서들 중에서 가장 광범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성경 전체에서 비추어 보아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은 뒤돌아서서 구속의 모든 파노라마의 장관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먼저는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토록 그 안에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안전이 보장된다. 8장 마지막 절에서 “다른 아무것이라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으리라”고 하는 것이다. 사죄는 제 1보에 불과하며 진정 영광스러운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원에는 “안에 있다가 밖에 있다” 하는 것이란 없다. ‘아담 안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원한 보장을 받고 영원히 그분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