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6/18 주일설교, 공의를 따르라, 신 16:18-20

강대식 2017. 6. 19. 13:20

2017-06-18 주일설교

본문: 16:18-20

제목: 공의를 따르라

 

1.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말한다.

거룩함은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순결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죄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관계 없으시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40:25)라 부른다.

주님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17:11)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6)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의와 공의가 나온다.

의와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세상을 통치하는 가운데 실행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입법적 거룩하심의 표현이고, 공의는 사법적 거룩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의로운 요구들을 부과하시기 위해 율법을 제정하셨고(입법),

공의에 의해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어기고 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형벌을 내리신다(사법).

의는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이 혐오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1:13).

 

하나님의 공의를 알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에 대한 가장 숭고한 선포이고 실행이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제물이 되어 피흘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하여야 했고, 그 공로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3:26)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의로운 자들을 상 주신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다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다.

그것이 우리의 성화이다. 흠도 티도 없도록 거룩함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선하심과 사랑은 세 번째 순서임을 기억해야 한다.

순서에 주의하라. 거룩함, 의와 공의, 다음에 선하심과 사랑이다.

 

그 다음이 신실하심(미쁘심)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어느 하나라도 따로 분리시키거나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그분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공의이시며 동시에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공의와 대립시키는 것은 비극이고 멸망에 이를 수 있다.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 안에 전체로 거하시며,

하나님은 이 모든 속성을 동시에 소유하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

하나님 안에 있는 균형의 완전성을, 우리의 사고와 성품에도 항상 유지해야만 한다.

 

2. 공의를 굽게 하지 말라.

 

재판장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의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16:18-19)

 

재판하고 심판하는 모든 권세는 다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이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인식과 믿음이 없으니까

재판을 공의로 하지 않고 재판을 굽게 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사법부는 정의의 보루(가장 튼튼한 발판)라고 한다.

그런데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말을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돈의 권력이 재판을 좌우한다는 거지요.

 

뇌물에 따라서 재판이 굽어진다는 것이다.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만다.

의인의 말을 굽게 하고 만다.

 

정의의 여신상은 한손엔 저울을 들고 다른 한손엔 칼을 들고 두 눈을 가리고 있다.

사사로움을 떠나 정의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여신상을 법원에 세워놓았으면, 그렇게 배웠으면, 그대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뇌물을 받지 말고 외모를 보지 말라고 한다.

권력의 시녀가 되는 것은 권력의 외모에 굴복한 것이다.

각 분야의 거물들이 죄를 지어도 가볍게 처벌되는 것은 판관이 외모를 본 것이다.

 

뇌물과 외모는 잠시요, 영원한 것은 의와 공의이다.

재판관들이 뇌물과 권력에 휘둘리면 나라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만다.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 할 곳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해방 이후 권력기관이 그래도 다 정화 작업을 했는데,

유일하게 사법부만 정화 수술을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변호사 비용도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비싸다는 세론이 있다.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마지막으로 보호되는 곳인데 거기에 공의가 없다면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손상을 입는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의함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심판하실 것이다.

눈앞의 뇌물과 권력의 힘에 공의를 그르친다면 역사의 사필귀정의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질 때 모른척 하지 말고 발언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익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세우는 곳이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5:24)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이 말씀을 사회 각 분야에 실천하고자 헌신하고 희생하였다.

어느 편을 들지 말고, 오직 공의의 편에 서서 말하고 실천해야 한다.

 

3. 공의를 따르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16:20)

 

공의만을 따르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하신다.

공의를 따르지 않고 뇌물과 외모를 따르고 재판을 굽게 하면 죽는 길이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재판 뿐 아니라 삶의 정도(正道)는 공의,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를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공의를 몰라도 교육을 통해 정의와 공평에 대해 배운다.

우리의 양심과 이성도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무엇이 원칙인지 판단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지식과 양심과 이성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른다는 데 있다.

 

이조시대에 공자와 맹자왈 배워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따놓고서도,

그 배운 지식과 양심대로 살지 않고 이익 따라 살다가 부패하고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공부한 지식으로 판검사 공무원 되어서는 그 배운대로 살지 않고 이익 따라 산다.

정치인들도 힘없는 국민을 위해 산다고 해놓고 당선되고 나면 제 이익 따라 산다.

 

교회도, 힘을 가지면 진리를 따라 공의를 따라 살지 않고, 이익을 따라 산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교회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다.

중세 천년은 교회가 권력을 쥐면 얼마나 타락한 이익집단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교회는 재물과 권력을 쥐어서 세상을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곳이 아니다.

영적 연합이 아닌 교회 연합은 탐욕과 방탕을 위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의 방법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No Cross, No Crown ! 이다. 지금의 고난을 감사하라!

십자가 없이, 재물과 힘을 모아서 왕관을 얻을려고 하는 것은

사사시대, 중세 암흑시대를 다시 만들어 보자는 것이고 그래서 망하는 길로 가자는 것이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서 가는 자들이 많아 왔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들이 적어 왔다. 항상 소수였다.

그 선택은 거짓 선지자를 따를 것인지 참 선지자를 따를 것인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주님은 그들의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진리의 열매, 공의의 열매는 보지 않고,

얼마나 많이 모이는가, 얼마나 큰가, 얼마나 유명한가, 외모를 보고 길을 선택한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닌데도 대중문화의 여파로 세상의 유행으로 수와 크기와 모양이 기준이 된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미혹의 역사를 보내어 거짓 것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11-12)

 

현대인들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고 지식과 교육은 오직 출세의 수단일 뿐이다.

공부 잘했다고, 학위를 가졌다고, 경력이 화려하다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운 자들이 배운 지식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악을 담대하게 도모하고 나라를 도둑질하고 망치고 만다(국정농단).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 본인에 대한 심판은 곧 뒤따라 온다.

지금 쇠고랑 차고 재판 받고 있는 무리들은 역사의 전환기마다 되풀이 되는 무리들이다.

그래도 여전히 부모들은 자식들을 일류학교에 보내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땅에서 진정한 기업을 차지하고 땅을 차지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거짓말을 가르치는 책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이 말씀을 우리는 깊이 마음에 새기고 생활에서 실천해야 한다.

 

공의를 따르는 사람이 우선은 손해 보는 같지만, 사는 길이 열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곧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

예물을 드릴 때도, 남을 도울 때도 공의로 하라고 하신다.

 

일류 학교 나오지 않아도, 학 박사 따지 않아도, 경력 화려하지 않아도, 외모 없어도,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대로 살고 실천하면,

오직 그것만을 보시고 하나님은 땅을 주셔서 기업을 차지하게 하신다.

 

그런데도 공의대로 왜 그리스도인들도 살지 않는가?

이유는 둘 중의 하나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존재, 그리스도인이 아직 아니든가,

아니면, 거듭났는데도, 자신의 거룩한 신분을 모르고 육신을 따라 세상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살려면,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고,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내 마음의 보좌에 모시고, 성령을 구하고 힙입어야 한다.

 

세상과 사탄과 육신과 정욕의 힘은 파도처럼 밀려와서 우리를 사로잡을려고 한다.

그에 맞서 싸워 대적할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한다.(6:10)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능력을 따라 나도 힘을 다해 수고를 해야 한다.(1:29)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전15:5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아야 한다.(4:18)

 

사람은 안다고 그 안 것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익과 정욕 앞에서 지식은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진리는 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오셔야 하고,

진리이신 성령의 능력을 힙입어야 하고 나도 힘을 다해 진리를 살려고 수고를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리와 공의를 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은 땅을 주시고 기업을 차지하게 해 주신다.

복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1:1)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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