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2권, 19장 한 범죄와 많은 범죄 (2017수정,김영희강의안)
19장 한 범죄와 많은 범죄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6-17)
바울의 목표는 아담이 한 일에 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해놓으신 일의 영광스러운 우월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와 같지 아니하니” 아담의 불순종, 아담의 범죄를 우리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완벽한 역사에 대조하고 비교하려는 것이다. 한 쪽에서는 아담의 ‘한 범죄’가 정죄에 이르렀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범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행동에 의해 장악된다. ‘많은 범죄’와 ‘한 범죄’의 대조이다.
- 심판은 한 죄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죄에 이르게 한다. 사도는 이 로마 교인들이 그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한다. 바울은 그 아담의 범죄가 우리를 아담이 한 일과 죄를 스스로 따라 하도록 우리를 끄는 힘이 있어 결국 우리 자신을 정죄의 아래로 끌고 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정죄의 심판이 아담이 지은 한 죄의 결과로 온 것이라는 점이다. 아담의 한 범죄 결과로 우리 모두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는데 그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바울은 정죄에 이르는 심판이 ‘한 죄’에 대해 내려졌다는 것이다. 사도의 역설은 아담의 ‘한 죄’의 결과로 유죄선고가 온 인간 세계에 내려졌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다른 쪽으로 옮겨간다.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노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심판의 반대가 은사이다. 은사는 값없이 주어지고 선물이다. 값없는 은혜와 값없는 선물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의 전적인 죄악성과 절망과 전적으로 쓸모없음을 안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값없는 선물은 심판에 반대된다.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그 한 범죄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은 모든 죄, 많은 범죄에 관해서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우리를 위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전에 저지른 모든 죄와 범죄로부터도 구원받고 깨끗함을 받은 것이다.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그 안에서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한 범죄와 많은 범죄를 대조하여 그 점을 나타낸다.
최종적인 대조점은 ‘정죄’의 반명제인 ‘칭의’이다. 정죄가 법정적인 용어이듯이 값없는 은사의 결과로 나오는 반대도 법정적 즉 칭의의 법률적인 선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재판장으로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17절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구원은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곳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이 세상의 삶을 이 구절보다 더 완벽하게 압축시키는 진술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사망은 정복자로 왔고, 전 인류는 이 한 사람 아담의 죄의 결과로 사망의 폭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는 12절, 14절에서 이 점을 말해왔으며 15절에서 다시 그 점을 말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4-15) 모든 자들이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이다. 그래서 가장 가공할 일은 죽음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들 아담의 후예들은 사망이 자기들 모두 위에 왕 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워하고 떠는 것이다. 그 얼마나 절망인가? 아담이 타락한 이래 사망은 전 세계 위에 왕 노릇했다. 세상은 공동묘지이다. 세상은 죽음과 우울과 종말의 장소이다.
우리가 그와 반대되는 곳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고 생각할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구원의 선물을 받고 있는 반면에 아담의 죄에 함께 휩쓸려 들어간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우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죄보다 훨씬 더 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고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진다. 그리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한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은 의로웠다. 아담은 결코 자기에게 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가 잃은 것은 그 자신의 의였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인간의 의 - 타락 전의 아담이 가졌던 의 - 만을 되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것이다. ‘더욱더’ 풍성함과 넘쳐흐르는 그 사실에 온전한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확신-을 얻었나니”(히10:19)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볼 신분을 갖췄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것’의 반대는 ‘생명이 왕 노릇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그보다 더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라”는 것이다.
①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생활 속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현실 세계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우리에게 이미 되어진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정복된 죽음 위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것이다.(히2:15)
② 죄가 그리스도인 위에 왕 노릇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6:14) 죄에 대해 승리했을 뿐 아니라 마귀에 대해서도 승리를 한 것이다. 더 이상 죄와 마귀의 지배 아래 있지 않고 마귀를 대적할 수 있고 그를 도망치게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약4:7).
③ 넉넉히 이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장)
빌 4장의 영광스러운 진술도 같은 의미이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1-13). 바울은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고 있다. 그는 죄와 사탄과 생명과 사망 그 외 모든 것을 제압한 것이다. 그는 정복자 이상이다. 이것은 이미 이 현실에서 우리에게 사실이다.
④ 우리는 “영광과 존귀와 영원함과 평강”을 기대한다(롬2:10).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오고 있다. 우리의 현재 왕 노릇은 그에 대한 ‘첫 열매’의 시식에 불과하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예수 그리스도는 왕중의 왕으로 묘사된다. 그럼 왕들은 누구인가? 여러분과 제 자신이다. 우리는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며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를 판단할 것이다. 성부와 함께 최고의 왕관을 쓰신 성자와 함께 우리도 왕관을 쓸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망이다.
‘더욱더’란 말과 ‘넘치다’란 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 그리고 그가 그 모든 것의 값없음과 충만함을 강조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바로 이 순간에 주님이 이미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실감하였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았다는 것 그래서 어떤 것이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지금 여기 이 세상 삶에서 왕 노릇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늘 자신을 그와 함께 세상과 천사까지라도 판단할 자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