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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엘 비키, `칼빈주의`, 5부 칼빈주의의 실천, 22장, 전인적 삶을 위한 실천 (강의안)

강대식 2017. 7. 20. 14:52

5부 칼빈주의의 실천

22장 전인적 삶을 위한 신학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명령했다. 이런 원리를 신학에 대입하는 것이 바로 칼빈주의가 지향해 왔던 역사적 관심사였다.

 

1. 중세 시대의 이원론

종교 개혁 시대 이전의 영성은 주로 명상하며 수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어 왔다. 일상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고자 했던 사제들이나 수도사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이런 실제적인 이원론은 삶을 고등한 것과 하등한 것,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라는 두 범주로 나누었다.

 

종교 개혁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조망에 도전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은혜의 유일한 중보자이며 분배자라는 그릇된 교회관에 대해 도전했다. 그리고 만인제사장 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았다. 이 진리들은 신학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국면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루터, “그 일(수도사들과 사제들의 일)이 대단히 위대하고 거룩하며 분투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일들은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이나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아내의 일보다 더 우월하거나 거룩하지 않다.” 이러한 가르침은 순식간에 노동과 예술과 음악과 음식과 여러 일상적인 일들을 전혀 새롭고도 다르게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매일 하는 일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물론 급진적인 패러다임의 변혁이 단순히 하룻밤에 또는 논쟁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 역사적 표본

 

루터의 접근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반면 인간의 왕국은 율법이 적용되는 불신자의 영역이다. 다만 우리가 믿는 복음이 평강의 복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신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인간의 왕국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질서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칼빈의 접근법은 루터의 논쟁적인 접근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접근법으로 바라보았다. 칼빈은

계시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정황 속에서의 인간의 책임이라는 좀더 확고한 신학을 세웠다.

하나님이 한없는 권능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지탱하고 그의 지혜로 그것을 운행하며 그의 선하심으로 그것을 보존하고, 특히 그의 의로우신 판단으로 인류를 다스리고 그의 긍휼하심으로 인류를 참아 주며 그의 보호하심으로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지혜와 빛, 의나 능력이나 정의, 순전한 진리 가운데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이 그 원인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칼빈은 인간과 그의 의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사역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밖의 일상적인 다양한 삶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를 인정한다. 칼빈은 교회와 국가가 대립 관계에 있다는 중세기적 개념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소속되지 않는 인간의 왕국일 뿐이라는 루터의 견해를 채택하지도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이 죄악된 세상의 삶의 구조와 방식으로부터 구별되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제세례파의 견해도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빈은 정부 관리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명령을 위임받고 신적 권위를 힘입으며, 실상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칼빈은 학예와 공예가 반드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통해 경배와 영광을 받으셔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자들이 어떻게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것인가?” 칼빈은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한다. “진리의 빛이 고대의 입법자들에게 비춰서 그들이 그렇게 공정하게 시민의 질서와 규율을 수립해 놓을 수 있었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부인하겠는가? 철학, 수사학, 의학, 수학 등의 탁월한 점과 유익들을 뭐라고 말하겠는가? 미친 자들의 허튼소리라 하겠는가? 아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칭찬할 만하고 감탄할 만한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배은망덕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들은 철학과 법과 모든 유용한 학문들이 신들이 만든 것임을 고백했다. 성경이 육에 속한 사람이라 칭하는 그 사람들도 저급한 일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실례들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자. 인간 본성이 그 참된 선을 빼앗긴 이후에도 주께서 정말로 많은 은사들을 그 본성 속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말이다.”

 

이러한 조망은 포괄적인 칼빈주의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을 만든다. 칼빈주의 역사가 정치와 예술과 교육과 경제와 과학과 광범위하게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육은 칼빈주의가 영향을 끼친 삶의 또 다른 국면이었다. 그들은 교육을 증진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 교양과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보편적인 교육체계를 장려했다. 전문학교로 시작해서 종합대학으로 발전한 제네바의 교육 방식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다. 현대 역사가들은 청교도들이 일반 교육과 대학 교육을 장려했다고 확신한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 네덜란드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주의의 포괄적인 견해와 쟁점들에 관해 가장 훌륭한 연구 사례를 내놓았다. “만물의 주권자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내 것이라외치시지 않는 부분은 단 한 뼘도 없다.” 카이퍼는 칼빈과 동일한 신학적 구조를 통해 사역했다. “종교 개혁적 원리에 대해 가장 분명한 통찰력과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것을 가장 폭넓게 적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역사는 그가 비텐베르그의 영웅이 아니라 제네바의 사상가인 칼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루터의 출발점은 의롭다 하시는 믿음의 특별한 구원론적 원리였다. 반면 칼빈의 목표는 좀 더 확장되어 하나님의 주권의 일반적인 우주적 원리에 있었다.”

 

3. 오늘날을 위한 영향

 

카이퍼에게서 비롯된 신-칼빈주의적 구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유용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또한 창 1:28에 나타나는 문화적 사명에 대한 카이퍼의 해석은 직업적이며 소명적 결정을 위한 체계를 제공한다. 그는 칼빈의 가르침을, 불신자와의 관계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반은총의 신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선교적 노력보다 문화를 강조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역사의 영역과 정황 안에서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일반 은총은 세속화에 문을 확짝 열어 둔 셈이 되는 것이다. 경건한 초세속주의를 반대하는 신-칼빈주의는 경건한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에 성경의 진리들을 적용함에 있어서 명백한 긴장을 설명해 주는 단순한 법칙은 없다. 그러나 근대에서 포스트모던 시대로 이동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정통 교리에 근거한 공공의 신학을 분명하게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는’(13:14) 신자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일상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충실히 답하며 성실한 윤리에 적용되고 순례적인 삶을 살게 해주는 세계관이다.

 

우리 신앙의 포괄적인 함축성을 강조할 때, 거기에는 교리를 경시하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교리가 경시되고 궁극적으로 타협하였기 때문에 교회 밖의 삶의 영역들을 기독교화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심각하게 혼탁해지고 말았다. 이것은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정신을 요구한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을 포함하는 성경적 가르침의 전체성이 성경적 균형과 함께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정통 교리는 반드시 일상사에 실제적인 영향과 결과를 끼쳐야만 한다. 삶이란 세계관에 의해 진행되는 것으로, 우리는 청교도들로부터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천국의 마음을 가진 충성스러운 청교도들은 질서있는 사람들이었고, 모든 면에서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질서의 사람들이었으며,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패커)

 

청교도들은 거룩을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지 않았고, 복음을 값싸게 흥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일상을 하나님 앞에서 옳은 자리에 두었다.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다가올 도성을 추구하는 청교도의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청교도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그가 행하는 모든 활동과 결정이 부패와 혼동과 이기적인 야망 없이 오직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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