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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엘 비키, `칼빈주의`, 5부 칼빈주의의 실천, 25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동 (강의안)

강대식 2017. 7. 26. 15:00

25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동(레이 페닝스)

 

노동에 대한 태도는 그 사회를 정의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고대 헬라인들은 노동을 저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 사회에서는 신들과 같은 자유인들이 명상과 불멸을 추구하기 위해 노예제도를 지지했다. 칼빈주의는 특별한 노동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개신교의 (노동) 윤리라는 익숙한 용어가 세속적인 부르심 안에서의 수고로운 일과 검소, 그리고 능률과 관계된 가치로 정의되어 있다. 특히 칼빈주의적 견해에서는 그것이 개인의 선택 또는 영원한 구원의 표지로 간주되었다. 이 용어는 1905년에 출판된 막스 웨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를 통해 대중화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난 3세기 동안 서구 문명은 독창적인 청교도 노동 윤리의 세속화된 왜곡으로 인해 얼룩졌다라고 주장한다.

 

1. 웨버의 풍자

 

웨버는 독일에서의 칼빈주의의 지배와 그에 따른 경제적 번영의 상호관계를 인식했다. 웨버는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든 심리적 조건을 종교가 창출했다고 주장했다. 웨버는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의 결과이므로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이 과연 구원받았는지를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개인적 삶의 선행을 확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자들에게 선을 이루는 삶을 요구하는데, 이 요구에 대한 부담이 노동에 대한 견해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성화의 삶의 과정이 거의 사업적 정신의 성격을 띠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2. 긍정적인 구조

 

1) 노동에 대한 견해

종교 개혁자들은 노동에는 본질적인 위엄이 있다고 믿었다. 칼빈, “아무리 천하고 추한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일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찬란하고도 고귀한 일이다.” 휴 레티머는 노동의 신성함과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연결 짓는다. “세상의 구주와 모든 왕 중에 가장 뛰어나신 왕께서 일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이 땅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하시면서 그는 모든 직업을 거룩하게 하셨다.” 존 코튼, “믿음이란 육적인 마음이 그것을 부끄러워할지라도 자신의 소명이 이끄는 대로 그 어떤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노동에 대한 개혁주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노동을 통해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공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를 원하시며, 그것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개인의 필요를 채우시는 특별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타락한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린다.

노동이란 개인적 활동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이다.

성경은 단순히 노동의 기능적이며 공리주의적 양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도 능동적 순종을 통해 일하셨으며, 신자의 노동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의 한 부분이다.

 

2) 소명(부르심)

소명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청교도의 작품은 1603년에 소명 또는 인간의 부르심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퍼킨스가 전한 설교이다. “각 사람은 부르심은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라는 고전7:20에 기초한 이 설교에서 소명을 일반적인 선을 위해 하나님이 예정하고 부과하신 삶의 특정한 종류라고 정의한다. 부르심의 목적이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라 공공의 선, 즉 전 인류의 유익과 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공공의 선은 그들의 단순히 삶을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의와 거룩과 참된 행복 안에서 훌륭하게 살아가는 삶에 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르심을 예정하시고 배치하시며, 그의 섭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다.”

 

우리의 은사와 재능들은 단순히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위한 것이다. “모든 특별한 부르심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일반적 부르심안에서 그리고 그 부르심과 함께 실행되어야만 한다. 개인적인 소명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참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며 이러한 섬김과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신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일하게 하신다.

리 하디. “칼빈의 견해와 같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 우리가 행동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 가장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3) 복의 약속

청교도들은 살후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를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 때문에 신자들이 노동에 대한 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초기 작품들을 보면 부유함이 하나님의 은총의 표지라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작품의 일반적인 주제는 부를 소유하는 데 존재하는 영적 위험에 관한 것이었다. 리차드 백스터는 부자가 구원받기 더 어렵다는 것을 기억하라라고 경고한다. 사무엘 윌러더, “부유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처럼,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노여움이나 증오의 증거가 하니다라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복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움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한다.

상급은 채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으로 말미암는 약속이다. 상급과 공로 사이에 상호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실수이다. 왜냐하면 상급은 우리의 노동이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를 위한 소명적 칼빈주의

 

웨버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제공된 구원에 대해 감사하는 삶이라는 점이다. 구원에 공헌하거나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구원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자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는 반드시 복음의 본질에 기인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살도록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만든다.

 

소명은 공동체적이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공동체적으로 모든 것을 섬길 수 있도록 이웃에게 헌신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몸으로 연합시키실 때 주어지는 섬세한 배려로부터 형제사랑이 흘러나와야 한다.

 

칼빈주의 윤리는 우리가 하는 노동을 우리에게 무엇을 생산해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셨듯이, 그 형상을 닮은 우리 역시 각각의 소명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이 재능과 은사들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와 사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역할을 수행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영광, 즉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노동이 바로 우리의 예배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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