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3장 버지니아 부흥
제 3 장 버지니아 부흥
자렛의 사역
1760년대에 버지니아에서는 복음적 기독교라고 하면 장로교라고 인식했다. 드베렉스 자렛은 이 시기에 대해 ‘참된 경건을 소유한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장로교도들 사이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몇 년이 안 되어 모든 교회의 상황은 급속히 변했으며, 이 변화의 중심에서 자렛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데이비스를 이은 버지니아의 부흥에 있어서 미래의 지도자). 1733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자렛은 장로교 목회보다 영국 국교회 목회에 투신했다.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1762년 감독으로 임직되었으며, 돌아온 그 다음 해 디윈디 카운티에 위치한 배스의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독립된 사역을 했으며, ‘버지니아에서 나만큼 열심인 사역자는 찾아 보기 힘들다. 나는 열광주의자로, 예언가로, 비국교도로, 장로교도로, 심지어 미친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의 회중은 자렛의 설교에 대해서 ‘우리는 자렛 목사를 만나기 전에 많은 목사들에게서 많은 설교를 들어 보았지만 이제까지 회심이라든가 중생에 대해 들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1756년 자렛의 교회에서도 16년 전 하노버 카운티에서 발생했던 일들과 비슷한 부흥의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의 회중은 급속도로 증가했고 새로운 사람들이 ‘원근 각처’에서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770년과 1771년 사이에는 ‘화이트 오크 교회에서 광대한 성령의 부어 주심을 경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렛은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 부흥의 시작을 흥미진진하게 설명하고 있다.
1772년에 접어들자 부흥은 더욱 거대해졌고 50-60마일(80-96Km)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까지 확장되었다. 이 부흥은 이듬해인 1773년에도 계속해서 증가했고 많은 죄인이 참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심했다. 1774년 봄에는 이전의 그 어떤 해보다도 더욱 비범하게 우리에게 임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는 형언할 수 없는 능력이 배어 있었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강타했다. 청중의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어떤 이들은 절규하며 울부짖기도 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해 있는 카운티에서도 역시 경건한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 나는 이 회심한 회중을 여러 모임으로 조직했고 믿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믿음을 강화하는 일과 그들의 믿음의 확신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마음껏 경험했다.
이 기간에 영국 국교회나 장로교가 아닌 또다른 복음적 영향(침례교)이 큰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거대한 변화는 1760년 식민 지역의 남서쪽에 위치한 핏실베이니아 카운티에 첫 교회를 설립한 침례교 ‘분리’ 교파(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미국 동북부의 여섯 개 주)의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거대한 변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설교자는 대니얼 마셜과 새뮤얼 해리스다. 해리스는 때때로 ‘아마도 휫필드보다 나은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강타하는 설교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침례교의 엄청난 성장을 촉진했던 두 번째 사건은 데이비드 토머스가 버지니아 북부에 정착한 1760년 이후부터 발생했다. 토머스의 설교는 성령의 능력과 증거로 충만했다고 한다. 그들의 복음적 설교의 내용은 조지 휫필드와 같은 것이었으며, 1740년대의 다른 지도자들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쨌든 이 새로운 운동은 성경적 설교에 목말라하고 있던 사람들을 소생시켰으며, 이런 생명력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셈플에 따르면, 1770년에 분리 침례교파는 제임스 강북 지역에 2개, 강남 지역에 4개 교회가, 1774년에는 강남 지역에 20개, 강북 지역에 24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주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때 국교도 목사들은 월급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반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가는 동안 열정적인 침례교 설교자들은 금전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람들에게 위대한 경건과 그들의 능력이 배어 있는 복음 설교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1784년 완전한 국교회의 폐지로 이어진 중대한 결과이기도 했다.
침례교의 침례의식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자렛은 침례교파의 강력한 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대응은 새로운 더 큰 연합의 결과를 가져왔다. 감리교라고 불리는 또다른 새로운 복음적 프로테스탄트 단체는 이 관계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침례교보다 신속하게 행동했다. 자렛은 감리교가 오직 영국 국교회 안에서 존립하고 있다는 분명한 확신 때문에 그들에게 강단을 개방하고 그들과 조직들을 병합하고자 했다. 인접해 있는 서식스와 브런즈윅 카운티에서 1773년부터 시작된 복음 사역은 ‘주로 감리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수고로 수행’ 되었다. 자렛은 1775년 말경에 ‘아마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놀라운 신앙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존경하는 웨슬리 목사님, 이 신앙 부흥은 1775년 말경부터 시작되었지만 1776년 1월에 가서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것은 서로 멀지 않은 세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들 중 두 교회는 내가 목회한 교회였고, 나머지 하나는 많은 시간 동안 무관심과 불경스러움 그리고 여러 종류의 부도덕으로 가득했던 아멜리아 카운티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작년 겨울에 감리교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세드포드 씨는 위에 언급했던 세 장소에서 자주 설교했습니다. 그는 내가 오랫동안 행했던 설교의 교리들을 확증했고, 그들의 귀는 그것들을 향해 열렸으며, 그 해 1월에 확신들과 회심의 소식들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삶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인한 활력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 해 겨울 내내 여호와의 영은 우리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부어졌습니다. 거의 모든 집회는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례들로 가득 찼고, 특별히 학생들의 모임에서 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10명 내지 12명의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기도 했습니다.
은혜의 방편들에 게을렀던 이 지역의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말씀을 듣기 위해 몰려왔으며, 그리고 그들의 기도 모임에서 어떤 이들은 다섯 시간 혹은 여섯 시간 동안 비탄과 슬픔에 잠겨 있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의 부어 주심은 오래지 않아 순회 설교자들이 종종 설교했던 4-5백 마일 반경으로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나의 교구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모임에 참석한 많은 군중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영적 민감함을 소유한 채 집으로 돌아갔고, 그들의 이웃들에게 이 부흥의 불꽃을 전했습니다. 이 불꽃은 가정에서 가정으로 전달되었고, 하나님에 대한 대화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전쟁(1775-1783)이 교회에 미친 영향
1775년부터 1783년까지의 독립전쟁 당시 서부 펜실베이니아에는 일반적인 부흥의 징후들이 보이지 않았다. 혁명 이전의 13개 식민 지역에서는 독립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없었다. 그러나 1776년 12,000명의 독일 용병들이 미국으로 파견되었을 때, ‘이 13개의 식민지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닌 독립된 국가임’을 결정할 영국 의회의 결정은 전혀 필요 없게 되고 말았다.
뉴잉글랜드에 거주했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혁명을 지지했고, 단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막대했고 이런 고통 때문에 장로교도들은 독립을 후원하는 데 일치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협력하게 되었다. 미국의 많은 지역이 전쟁으로 인해 유린되었고 황폐해졌다. 프린스턴도 두 번씩이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나소 홀은 파괴되었다. 졸업생 가운데 살해당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전쟁을 통해 유익을 얻은 교단은 버지니아의 침례교였으나 결국에는 그로 인해 핍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또한 그들의 영적 진보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783년 평화조약이 맺어진 후, 비록 침례교의 자유에 대한 호의적이었지만 이 전쟁은 그들의 신앙 생활에 정반대의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자유무역의 개방은 부를 좇으려 하는 신학 교수들을 가장 강력하게 유혹하는 미끼가 되고 말았다. 이제 이 곳에서 영적 침체와 경건의 타락을 생산하는 부자들이 증가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인 일은 없게 된 것이다. 약간의 예외가 있긴 했지만 영적 침체는 전 미국에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영국 국교회의 교구 목사들은 전쟁이 끝나게 되었을 때, 많은 곳에서 신임을 잃었으며, 그들의 교회는 거의 전멸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또 웨슬리 계통의 감리교도들은 종종 혁명에 동감하지 않았던 단체로 분류되었다(반애국주의자로 취급). 대서양을 건너 온 모든 감리교 설교자는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곤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지도자들은 구속되었고 심지어는 습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명이었던 뉴욕의 감리교 교회원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결국 60명으로 급격히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와는 달리 감리교는 그 시초부터 영적 운동이었으며, 1784년에 그 지역 모임들이 감리교 감독교회가 되던 해, 정치적으로 일시 불충했던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1780년대의 부흥
셈플에 따르면 1776년의 일반적인 영적 침체 현상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1785년도에 나타난 변화의 첫 번째 징후는 제임스 강에 있던 침례교회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셈플이 보고한 바로는 이 때부터 부흥은 여러 다른 지역에서 수 년 동안 계속해서 ‘그루터기 가운데 불이 타는 것같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이런 축복을 받지 못한 교회는 몇 되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이 시기에 동부의 장로교 복음 전도 본부는 더 이상 하노버가 아니고, 한 대학을 설립했던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의 햄든 시드니였다. 그 대학 학장이며 커브크리크 교회를 섬겼던 존 블레어 스미스는 당시 침례교 교회들에서 보았던 부흥의 증거들을 가지고 교회 장로들과 함께 그들의 회중과 대학에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하신 부어 주심을 위해 기도하는’ 기도회를 개최하도록 결심하게 했다.
또한 에즈베리는 1787년 봄에 버지니아에 있는 감리교도들에게서도 특별한 점들을 찾을 수 없었으나, 10월 그의 두 번째 방문 때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이런 광경을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흥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한 것 같다.’ 이 시기에 설교자가 된 이새 리는1787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피터스버그 마을에는 엄청난 신앙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지역 주민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회심했고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많은 그리스도인이 소생되었다. 기도 모임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빈번하게 열렸고 이런 기도 모임을 통해 심지어 설교자가 없었을 때조차도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회심에 이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역사하심은 주로 5-6시간, 심지어는 밤새도록 기도 모임이 빈번하게 열렸던 서식스와 브런즈윅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한번은 브런즈윅 근방에 있는 마브리 교회에서 열린 7월 25일과 26일간의 계간(季刊) 집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비범한 방식으로 임했다. 이 집회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성했고 이틀동안 적어도 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회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로 이 모임에 수천 명이 참석했던 것이다.
다음 계간 모임은 서식스 카운티의 존스 교회에서 7월 28일과 29일에 열렸다. 이 모임은 이전의 그 어떤 모임보다 하나님의 임재가 더욱 충만한 모임이었다. 그 해 여름에 서식스 근방에서는 약 1,600명의 영혼들이 거듭난 것으로 보고되었고, 브런즈윅 지역에서는 1,800여 명이, 그리고 아멜리아 지역에서는 800여 명이 회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세 지역에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부흥을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단지 설교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기도 모임에서도 나타났으며 그들의 집과 일터에서도 많은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또는 백인들과 흑인들이 같이 옥수수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그들은 종종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시작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며, 그들 가운데 일부가 자기 영혼에 평화를 누릴 때까지 계속해서 부르짖는 장면들은 흔히 있는 일이 되었다.
버지니아의 감리교 역사가인 베넷은, 블루리지 산맥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제임스 강 남부의 모든 곳이 이 영적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이 역사하심은 그 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 부흥은 ‘1791년 혹은 1792년까지’ 제임스 북부의 침례교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대해 셈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천 명이 회심했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 외에도 많은 사람이 감리교와 장로교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침례교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터커호 교회는 1788년에 300명의 새 신자를 맞이하는 부흥을 경험했고, 1786년 4월, 교인이 17명이던 노미니 교회는 1788년에 222명 그리고 1789년에는 300명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에 위대하게 쓰임을 받은 침례교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은 루이스 런스포드였다. 그는 목사로 있을 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설교 전도여행을 했는데, 어떤 이는 그가 지구를 두 바퀴나 돌 정도의 여행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 외 존 윌리엄스, 노미니 교회의 헨리 톨러, 존 릴런드가 있었다. 새뮤얼 해리스의 설교와 릴런드의 설교는 1786년 8월, 많은 사람을 각성시켰다고 전해진다. 릴런드에 따르면 부흥은 1787년 가을부터 1789년 봄까지 엄청난 강도로 진행되었는데, 그 기간에 무려 400여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버지니아 부흥에 대한 평가
모든 부흥에는 많은 것이 혼재한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즉석에서 사람을 한시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또는 그것을 심리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회심자를 통해 확인한 고양된 감정과 쓰러짐과 기절과 같은 경험들은 일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데는 전혀 안전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런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분류할 수 있게 하는 ‘어떤 표지’로 인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법칙이나 과정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람을 교회로 성급히 등록시키려는 위험을 지양했다. 그럼에도 부흥이 지나간 후에는 언제든지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판명된’ 명목상의 교인들을 가려 내는 기간이 뒤따르곤 했다.
인간의 교만과 오류는 결코 죽을 때가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인물이 선한 일과 위험한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부흥 시기에도 그러하다. 이 시기에 대해 셈플은 ‘부흥이 지나간 뒤에 무질서와 혼돈’을 야기한 어떤 것들이 교회에 침투했다고 관찰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자렛의 증언은 그것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진술이라 할지라도 매우 유익한 것이다. 그의 친구인 존 콜먼에게 보낸 편지이다.
나는 우리 교회에서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나와 동떨어져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에 결국 현재로선 나의 능력이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전에 수백 명씩 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던 장소에 가면 고작 40여 명이 나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예전에 인산인해를 이루던 나의 회중은 이제 겨우 150명 정도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서도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교인 수가 10배나 감소한 것입니다.
자렛은 이 시대 상황에 적절한 하나의 비사(祕史)를 밝힌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가장 순수하고 훌륭한 원리들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저녁, 나보다 연륜 있고 경험 많은 어느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단순히 이 모임에 있어서의 내 목적과 나의 노력의 결과들이 나의 회중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그 노신사는 이따금씩 무덤을 바라보더니 내가 당연히 기대했던 칭찬의 말 대신 자신의 선조들에 대한 역사를 조금 말해 주었다. “부흥이 이 지역에 제일 처음 임했을 때, 나는 늘 우리 교회에서 기도회와 성경읽기 등의 각종 모임을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회중이 참석했지요. 그들은 종종 감동을 받았고 많은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아! 그들을 향한 내 열심이 정말 위대하고 열렬했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 인도함으로 그들의 영적 복락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모든 노력의 밑바탕에 교만이라는 악마가 자리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말을 내게 적용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말은 엄청난 위력이 되어 내 심장에 박혔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에 비추인 내 삶을 그림으로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덕망 있는 노신사의 면전에서 이전에 깨닫지도, 아니 의심해 보지도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노신사의 마음을 빼앗았던 그 악마가 슬금슬금 내 마음을 점령하게 된 것을 깨닫고는 너무나 부끄러웠고 당황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 아주 적절하고 훌륭한 교훈이었고 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런 자렛의 견해와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준다. 그 하나는 부흥이 사람을 순간적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도 때때로 진리뿐 아니라 오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흥이 완전히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엄청난 영적 진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흥은 복음적 교파들이 새롭게 하나 되고 연합하게 했다. 그곳에는 물론 분열과 아픔이 있었지만 대체로 교회에 관련된 문제로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교파적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장로교 설교자와 침례교 설교자가 같은 강단에서 차례로 회중에게 설교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모습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