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안 머리, "부흥과 부흥주의", 4장 장로교 부흥
제 4 장 장로교 부흥
아키발드 알렉산더와 부흥
1774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장로교는 하노버에는 10명의 목사가 있었고, 버지니아에는 목사가 없는 19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교회와 목사들은 데이비스 시대와 같은 복음적 기독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영국 국교회에서 침례교로 옮겼던 한 버지니아 교인은 이 시기의 많은 장로교도는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옳지만 체험이 결핍되었다’고 평가했다.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1775년 당시 그가 들었던 한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조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회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을 공부했더라면, 그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내용을 지지해 주는 또다른 강력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부흥역사에 있어서 매우 신뢰하고 의존할 만할 주석가 가운데 최고인 아키발드 알렉산더에 대한 사건이다. 알렉산더는 1772년 4월, 버지니아의 제임스 강 상류지역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더는 유아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프린스턴을 졸업한 윌리엄 그레이엄 목사 밑에서 배웠다. 알렉산더는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자신의 목사였던 그레이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의 선생님이자 우리의 설교자였던 그가 강단에서 외친 설교에 전혀 집중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더가 17세 되던 해,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포세이 장군 집으로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타일러 여사에게서 간증과 함께 침례교의 특징적인 설교를 자주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장군을 도와 함께 일했던 침례교 신자 밀라이트는 알렉산더에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중생해야 한다고 믿느냐는 예상치 않은 질문을 던졌다. 후일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가끔 중생에 대해서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중생해야 한다는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자 그는 또 내게 중생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주저하며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만일 당신이 이 위대한 변화를 경험했더라면, 그것에 대해 정말 잘 알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의 대화는 끝났지만 이 대화는 나로 하여금 내 생애에 정말 그런 변화가 있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했다.
알렉산더는 당시 식사 후 이것이 서로 토론의 주제가 되곤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알렉산더의 영혼은 각성되어 있었고, 특히 타일러 여사가 소장하고 있었던 청교도 목사 존 플라벨 목사의 책을 그녀에게 읽어 주면서 그의 회심의 직접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는 책읽기와 함께 기도의 습관이 병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밤에 그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데,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책을 읽어 주는 나의 의무는 타일러 여사의 시력을 대신하는 일뿐 아니라 주일에 전 가족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도 계속해서 요구되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저녁 플라벨 목사의 책의 내용, ‘은혜의 방편’ 읽어 주게 되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계3:20)의 설교의 초점은 완고하고 고집이 센 죄인들을 향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하심과 용서하심 그리고 자비하심에 대한 것이었는데, 내가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갈 무렵, 진리의 말씀이 나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으며, 내가 읽는 모든 글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같이 느끼게 되었다. 내가 이 부분을 다 끝내기 전에 내게 임한 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은 정말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결국 나는 책을 내려놓고 즉시 일어나 은밀한 기도 장소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었고 나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토해내듯 기도하기 시작했다. 정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의 홍수가 밀려왔고 나는 더 이상 계속 기도할 수가 없었다.
위에 언급된 묘사들은 알렉산더의 첫 영적 경험들의 일부분이다. 이 시기에 버지니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햄든 시드니 대학에서 교회를 섬겼던 존 블레어 스미스는 그의 장로들을 기도회에 초청했는데, 그들이 주축이 되어 모인 이 기도회는 소수의 무리가 참석했지만 ‘매우 즐겁고 유쾌한 모임’이 되었고, 다른 일부 회중 가운데서도 사적인 기도회를 시작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 발전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확신은 점점 깊어졌고, ‘기도와 간구의 영이 동시에 강해지기 시작’했다.
1787년 9월, 대학이 여름방학 후에 다시 개강했을 때, 한 학생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두 사람이 더 이 구원의 길을 진지하게 추구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힐이었다. 윌리엄 힐은 토요일 오후마다 서너 명이 대학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숲에서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비가 내린다는 일기 예보가 있자, 그들은 대학 내의 한 교실에서 기도회를 하기로 하고 장소를 변경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른 불신 학생들의 방해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문을 쾅쾅 내려치며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기도회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진행한다면, 반드시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 소동은 스미스 목사님에게까지 전해졌고, 스미스 목사님은 기도회 모임을 교회에서 열며, 자신이 그 기도회를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주 토요일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스미스 목사님의 예배당이 기도하기를 원하는 학생들로 가득 차며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윌리엄 힐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토요일에는 거의 모든 학생이 참석했고 이웃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했으며, 예배당뿐만 아니라 다른 교실들도 가득 차게 되었다. 대략 2주 후에 대학 내의 전교생 가운데 거의 반 이상의 학생들이 강렬한 영적 감동에 사로잡혔으며, 그들의 죄를 자복하게 되었다. 이런 깊은 감동과 영적인 근심은 이웃 주민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났다.’
기도회의 모임은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존 블레어 스미스는 자기 교회와 대학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회중의 영적 대각성은 모든 방면에서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고,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교수들도 깊은 영적 잠에서 깨어나 각성되었고 경건으로 전신갑주를 입게 되었다. 존 블레어 스미스 목사의 부친이었던 로버트 스미스는 그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들인 존 블레어 스미스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아들의 교회에서 네 번 설교했습니다. 나는 1740년과 1741년의 영적 대각성 운동 이래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진 하나님의 능력과 영적 영광과 현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치적인 발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며, 모든 대화는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영적이고 경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 듣기를 좋아했으며, 성찬식과 교구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축복은 신분의 지위고하나 빈부귀천, 유무식자, 백인이나 흑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퍼져 나갔으며,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나타났습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존 스미스의 교회의 성찬식에는 225명의 새로운 교인들이 추가되었는데 대다수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들으러 갈 때나 혹은 기도 모임에 갈 때면 언제나 무리를 이루어 영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찬송을 부르며 가곤 했습니다. 그런 달콤한 찬송은 내 생애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말하는 모습은 얼마나 천상적이며 영적이며 순전한지요! 나는 같은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백여 명의 젊은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강렬한 확신에 차 있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구주의 품 안에 안겨 사랑에 번민했으며,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날들을 즐거워하며 기뻐했습니다.
후에 윌리엄 힐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부흥의 결과와 영향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이 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법원과 법정에는 치안 판사와 변호사가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모두 교회의 회원들이 된 것이다. 특별히 젊은 남녀 청년들이 이 부흥의 역사와 깊이 관련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쉽게 발견되었던 불신앙적이고 불경건한 청년들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쾌락과 오락 그리고 경박함은 모두 금지되었으며, 그것들은 찬양과 진지한 대화와 기도회로 대치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각성을 경험한 후에 변절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알렉산더가 블루리지 산맥 반대편에 위치한 그 조용한 마을에 그토록 비범한 종교적 각성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후였다. 렉싱턴 지역의 목사가 브리에리의 요청을 수락하고 알렉산더와 그를 돕는 젊은 사역자를 파송했는데, 브리에리에서 그에게 임했던 시간들은 그의 전 생애 동안 가장 잊을 수 없는 축복의 시간들이 되었다. 그들이 에드워드 카운티에 거의 도달할 무렵 놀라운 회심 소식들을 듣게 되었다. 가장 최근만 하더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더러운 행위를 일삼던 한 남자가 이제 진리인 말씀의 가장 열렬한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토요일 밤에는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말을 타고 가면서 찬송을 부르는 가장 고상하고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다. 바로 그 날 밤에 그 곳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바로 그 장소에서 존 블레어 스미스를 처음으로 보고 듣게 되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스미스의 모습이 ‘내가 이제까지 본 그 누구의 모습보다 엄숙했고 내게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회상했다.
주일 아침,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말했다. ‘길은 브리에리로 예배드리러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집은 그들의 절반을 수용하기에도 부족했다.’ 아침 예배 때에 주의 떡과 잔을 나누었고 회심하지 않은 자를 위한 또다른 노방 예배가 예정되었다. 여기서 알렉산더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예배에 임하는 회중의 태도였다. ‘모여든 회중의 얼굴에는 이상한 부드러움과 진지한 엄숙함이 배어 있었다.’ 그들은 설교자인 존 블레어 스미스에게 고정되었다. 두 번째 설교자는 알렉산더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였던 윌리엄 그레이엄이었다. 하루 전날 저녁만 하더라도 그들은 블레어 박사에게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설교할 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는 매우 비범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회중의 모든 입은 찬양으로 가득 찼고 바로 이 시간부터 그레이엄 목사님은 대륙의 가장 능력 있는 설교자 가운데 한 분으로 간주되었다.
그레이엄과 부흥
그레이엄의 생애에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 부흥의 소식들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이어지는 주일 아침 예배에 몬머스 교회도 엄청난 회중으로 가득 차게 되었던 것이다. 방문 설교자의 설교가 끝난 후 그레이엄 목사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 모든 부흥의 소식을 증거했다. 이 증거를 들은 한 회중은 ‘이제까지 들었던 그 어떤 권고보다 더욱 영향력 있는 권고였으며, 그가 눈물을 흘리며 증거하는 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는 회중은 거의 없었다. 그 곳에 모인 회중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는 모습은 대단히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도처에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다.
그레이엄 목사가 렉싱턴과 가까운 지역에서 수년 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교회가 설립된 것은 1789년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후에 이 교회를 담임하던 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교회는 사실 부흥의 결과로 말미암아 탄생한 교회다.’ 당시 당회는 이 교회의 첫 해의 역사에 대해 감사의 표현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은 ‘젊은 청년들이 대중연회장의 출입을 삼갔’으며, 반면에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는 일과 특별히 소요리 문답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었다. 그 당회는 또한 이 날부터 1831년까지 있었던 다섯 번에 걸친 부흥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간에 무려 235명의 새 신자들이 교회에 등록했다.
장로교도들에게 1787년부터 1789년 동안 벌어진 이 성령 하나님의 운동은 또한 그 전파된 영향력의 범위와 영속성 때문에 ‘위대한 부흥’으로 알려졌다. 이런 영향력의 결과 가운데 한 사례가 바로 헨리 패틸로 목사다. 패틸로는 하노버에서 데이비스 박사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프린스턴 졸업생인 데이비드 콜드웰 또한 선교사이자 교사로 사역하였다. 버지니아에 임한 부흥의 영향들은 복음 설교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젊은이들의 세대에서도 잘 나타난다. 윌리엄 그레이엄에게 교육을 받은 아키발드 알렉산더를 포함한 7-8명의 능력 있는 비범한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로교도들을 위한 위대한 부흥의 가장 중대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강타한 새로운 신앙 사상에 있었다. 이런 새로운 신앙 사조는 남부의 교단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체험적인 신앙을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기도가 합당한 처소에서 다시 드려졌고 ‘열정적인 사랑과 자선’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었다. 이런 영향은 교회 구성원에 대한 성경적인 표준에 대한 답을 요구했다. 태어날 때부터 교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을 자동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고 단순한 ‘믿음의 고백’이 회심의 필요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지도 않았다. 목사와 장로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살폈고, 그들이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검토했다. 이전에는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도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나 이제 구체적인 신앙의 확인과 검증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영접되기까지는 수 개월이, 어떤 경우에는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1790년대에 새롭게 조직된 교회 가운데 한 교회가 작성한 신앙 원리이다.
1.교회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적 복의 증진과 유익과 관계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원적인 모임이다.
2.가견적 교회는 가견적인 그리스도인 혹은 명백한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다.
3.기독교의 교리들을 이해하는 가견적 교회는 효과적인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을 잘 알고 있는 교회이며,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심으로써 그 삶과 대화가 그의 회개와 일치하는 교회다.
4.인 침으로서의 성찬식을 가견적 교회의 회원이 아닌 자에게 베풀어서는 안 된다.
5.교회 회원들에게서 출생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그들이 비록 교회의 모든 특권을 다 향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교훈들과 훈련 그리고 그 경책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버지니아의 복음적인 모든 교단은 1787년부터 1790년에 발생했던 이 부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는 특별한 영향과 유익을 받았다. 부흥이 임하기 전 그들은 이미 남부에서 청소년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학교들과 대학설립,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산 가운데 하나였던 영적 문학의 유산들을 출판하는 조직적인 정책들이 있었다. 침례교도들은 ‘책을 읽고 배우는 것’에 대해 매우 소심했던 반면, 젊은 세대의 장로교 사역자들에게 청교도 문학은 값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교훈의 학교가 되었던 것이다. 얼라인, 플라벨, 오웬, 백스터, 베이츠 등 다른 수많은 청교도 작가는 장로교도에게 다시 한번 살아 역사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정리를 하면 장로교의 위대한 부흥은 단순히 정통을 견지하는 것과 올바른 설교를 하는 것, 비록 그것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권위, 부드러움, 열정, 경건 이 모든 것은 하늘에서부터 광대하게 부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에만 신학에 불이 붙을 수 있으며, 그 신학은 불붙은 강력한 신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그레이엄, 존 블레어 스미스가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흥 시기에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