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10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김영희 강의안)
10 장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8절) 이 말씀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경외감과 자신의 부적격함을 가져야만 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다. 팔복에는 일정한 사상의 연결이 있으므로 여러분은 본문이 맨 처음에 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사람의 온갖 노력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목적이 되어왔다.
어째서 이 본문이 여기에 오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6절이 설명을 제공한다. 6절은 가운데 있어 처음 세 복은 6절에 인도하고 나머지 복들은 6절을 분수선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처음 세 복은 우리의 깊은 필요 의식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필요를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목마르게 되며 하나님은 우리가 배부르게 채워질 것이라는 놀라운 대답을 가지고 오신다. 이때부터 계속해서 만족의 결과 채워진 결과, 곧 가득 채워진 결과를 보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긍휼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 그 후에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된다.
이 보다 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6절의 중심이 되어 뒤에 오는 세 복은 처음 세 복과 부합한다. 긍휼한 사람은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긍휼하게 되는 데 가장 중한 필수 단계가 된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애통하는 사람’과도 부합이 된다. 그들은 그들의 심령 상태에 대하여 애통하며, 그들의 죄성 때문에 애통한다. 심령이 깨끗한 사람은 그들의 불결한 마음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들이며, 그것이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되는 단 한 가지 방법이다. 이와 같이 화평케 하는 사람은 곧 온유한 사람들임을 발견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두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이것을 강조하신 까닭은 틀림없이 바리새인들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주의 가르침의 중심이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마음의 상태임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 동시에 교리가 절대 중요하며 지적 이해가 절대 중요하며 이해가 사활로 중요하다는 점을 즉시 덧붙여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하여 동의에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들이 단순히 지적 관심만을 가지게 되었을 때 교회가 저주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신다. 머리의 문제이지만 머리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주께서 외형과 행위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신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기독교는 마음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 ‘마음’이란 무슨 뜻인가? 마음은 단순히 감동과 감정의 자리만은 아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세 가지를 포함한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이며, 다른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샘이다. 마음은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한다. 마음은 전인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표면 뿐 아니라, 마음의 중심도, 마음의 온갖 활동의 근원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마음은 이처럼 깊고, 가장 중요하다. 복음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본문은 마음이 항상 모든 문제거리의 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지난 수백년간의 비극적인 오류는 사람의 모든 문제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환경만 변화시키면 된다고 한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인류가 타락한 것이 낙원에서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인간이 맨 처음 잘못된 것도 완전한 환경 속에서였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다. 사람의 문제거리는 사람의 인격 중심에 있다. 교육만으로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마음에 있다. 마음은 절망할 정도로 악하고 부패했다. 이것이 문제이다.
-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할 때에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사람됨은 이것과 완전히 정반대이다. 복음이 제의하는 것은 우리를 이 무서운 함정에서 하늘나라로 들어 올리려는 것이다. 복음의 제의는 초자연적이다. ‘마음이 깨끗함’은 ‘위선이 없다’는 뜻이고 ‘선한 것’이란 뜻이다. 이 말은 구김살이 없다, 아무것도 숨겨진 것이 없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신실이란 말로 서술할 수 있다. 이것은 일편단심, 전심이란 뜻이다. 순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시편의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게 하소서”이다.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분할된 마음이다. ‘깨끗함’의 의미는 이것뿐이 아니다. 이 용어는 동시에 ‘정화된’, ’흠이 없는‘이란 뜻도 있다.
“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22:14-15). 부정하거나 불결하거나 더러운 흔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의 완전한 표현은,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으신 완전하고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깨끗한 것은 가장 크고 으뜸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 삶의 최고 갈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알고자 열망하며 그를 사랑하고 섬기고자 소원하는 것이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뵙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의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끔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결, 깨끗한 마음, 혼합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빛과 어두움은 혼합될 수 없으며, 검은 것과 흰 것은 혼합될 수 없다.
- 하나님을 본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객관적이며 가시적인가? 아니면 순전히 영적인 것인가? 우리는 이것에 대해 정확히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이 영광스런 약속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복에서와 같이 이 약속도 땅위에서 지금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일대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본다. 그의 가까우심을 느낀다는 의미에서, 그의 임재를 누린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비록 불완전해도 지금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 있다.
그 분을 볼 수 있는 또 한 방법은 우리의 체험,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은혜로운 교제 관계에서이다. 우리는 지금은 거울 속의 영상같이 희미하게 본다.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볼 것’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삶을 혁신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만왕의 왕의 존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임재 가운데서 영원히 거하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 복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묵상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여러분의 최대 관심사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데에 있을 것이다.
- 마음은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인가?
수 세기를 통하여 주목을 끌어온 견해가 있다. 첫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승려나 수도원제도 같은 견해로 이 세상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다. 성경의 방법은 우리의 타고난 마음이 검다는 것을 알고 다윗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할 것이다.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깨끗케 하시는 일이다. 이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흠 없이 점과 주름 없이, 오점 하나 없이 될 날이 오고 있음을 안다. 하나님께서 정결케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하여 수동적인 태도로 가만히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야고보가 말한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오 그리하면 그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실 것’을 믿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 분이 이 일을 최종적으로 하셔야 함을 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영으로 육체적인 행위를 죽이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목표요, 갈망이요, 소망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리고 복음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요한이 “그리스도에게 이런 희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자신을 순결하게 할 것이요”라는 말씀에 동의해야 한다. 시간은 짧다. 우리가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는 왕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에 여러분에게 아무 가치도 없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게 될 일들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이 순간 부끄럽지 않는가? 시간의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뵈려고 하며, 그의 영원한 영광 속에서 영원히 영원히 누리려고 한다. 우리의 한 가지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며 이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순결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깨끗케 하자.